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086
01089 1089화
와인 몇 잔에 취할 정도로 주량이 약하진 않았다.
기분 좋은 정도.
어제까지만 해도 술을 진탕 마셔도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것에 비하면 신기할 정도였다.
태수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의사이기에 병원에 소속된 것 자체만으로도 많이 안정된 터였다.
태수는 문득 생각했다.
그래서 그랬나.
머릿속으로만 이해하던 혜미의 마음이 확실히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는 혜미를 떠올리며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미소 지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보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자신도 이 밤이 지나면 그렇게 될 거다.
당분간은 바쁘게 살고 싶었다.
그래야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빨리 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하던 태수는 제임스를 떠올렸다.
추천장까지 보내 주다니, 고마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모든 마음을 표현하는 건 백 마디로도 부족하지만 인사는 건네고 싶었다.
태수는 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나 제임스와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통화 불능 지역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하여간.”
정말 대단한 의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절감했다.
그러던 중 문득 카프레네를 떠올렸다.
이젠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그의 기억에도 많이 익숙해졌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분리할 수 있었다.
제임스가 태수에게 다시없을 스승이라는 건 누구도 인정할 일이었다.
태수는 그런 생각이 진해질수록 카프레네를 한 번씩 떠올렸다. 그로부터 시작된 이 모든 인연에 감사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와 한 번이라도 같이 수술을 하고 싶단 생각도 했다.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 갈망했다.
그와 같이 수술할 수 없는 현실이, 태수가 의술에 더욱 매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태수는 아차 했다. 미국에 도착한 후로 김혁권에게 전화 한 통화도 하지 않은 탓이다.
더 시간 끌면 잔소리가 심해질 터이니 빨리 전화하는 게 살길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잠시 기다리자 김혁권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 있습니까?”
“무슨 인사가 그렇게 살벌합니까?”
“또 연락 안 와서 무슨 일 있나 했죠.”
“이러실까 봐 얼른 전화한 거 아닙니까?”
태수가 바로 맞장구치자 김혁권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변했다.
“이번에는 빨리 전화하셨으니까 봐 드리지요.”
“무지하게 감사드립니다. 그보다 한국 생활은 어떠십니까?”
“백수 됐어요.”
“백수…… 라니요?”
태수가 황당한 목소리로 묻자 김혁권의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하 팀장님이 그러던데요. 당장 필요 없으니까 여행이나 다니면서 쉬라고요.”
“필요 없다니요? 최고의 수술실 간호사를 그렇게 홀대하신단 말입니까?”
“나 대신 좀 따져 주렵니까? 미국에서 열심히 벌어 온 돈 까먹고 있거든.”
“당연하죠. 일단 전화부터 끊겠습니다.”
태수가 바로 행동에 옮기려 하자 다급한 김혁권의 목소리가 울렸다.
“잠깐, 정지!”
“왜요?”
“진짜 전화하시게?”
“그럼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태수는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
이건 말도 안되는 상황인 탓이다.
김혁권의 순발력은 태수도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처음부터 다른 의사들과 바로 호흡이 척척 맞진 않겠지만, 몇 번 수술해 보면 금방 서로에게 적응할 터였다.
이건 김혁권의 생활에 대한 문제뿐만이 아니라 신속대응센터 입장에서도 절대적 손해였다.
그런 일에 모른 척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김혁권의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거 아니니까 너무 오버하지 맙시다. 사람 민망하게.”
“백수라면서요.”
“정확하게는 휴가지요. 그것도 유급휴가.”
“유급휴가요?”
“그동안 고생했다고 한 달 정도 쉬랍니다. 물론 쉬고 난 후에는 아주 미친 듯이 일해야 한다고 협박도 받았고요.”
김혁권의 말을 끝까지 들은 태수가 안도했다.
“깜짝 놀랐잖습니까.”
“나도 놀랐습니다. 취직하자마자 유급휴가까지 주는 병원은 나도 처음이니까.”
“팀장님이시라면 충분히 그럴 분이시죠. 그보다 다들 제 소식을 궁금해하진 않습니까?”
“왜 안 궁금해합니까? 하나같이 왜 같이 안 들어왔냐고 얼마나 뭐라고 하는데요. 현미는 둘째 치고 함 간호사, 김 간호사, 조 간호사들까지 나만 들들 볶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까?”
태수가 나지막이 묻자 김혁권의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미국에 수술 횟수 채우러 갔다고 핑계 댔습니다. 뭐, 사실이기도 할 거고.”
“그렇죠. 미국 전문의 합격 조건으로 연 5회씩 수술해 주기로 했으니까요. 여기서 보건의 한다고 밀린 것까지 다 채우고 가려고요.”
“진짜 수술하시려고? 어디에서?”
“UCLA입니다. 여기 센터장하고 아는 사이잖습니까.”
태수가 대략적인 상황을 알리고야 이해한다는 김혁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내가 그쪽을 깜빡했네.”
“좌우간 이쪽 상황은 그렇습니다. 그보다 선배님은 어떠십니까?”
“닥터 박? 그분 때문에 또 난리였지.”
“또 왜요?”
태수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전혀 의외였다.
“인턴보다 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전문의 봤습니까?”
“네?”
“내가 진짜 그렇게 발 빠른 전문의는 처음 보는 거 같아요. 닥터 박이 하도 설치니까 레지던트들하고 인턴들이 죽어나고 있어요.”
“도대체 왜 그러신답니까?”
태수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런데 김혁권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비행기 타기 전에 닥터 최한테 리마인드하자고 했잖아.”
“그거 때문에요?”
“그렇답니다. 선배로서 먼저 제안한 말을 어기면 어쩌냐고 하면서 병원 곳곳을 아주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
태수의 표정이 바로 진중하게 변했다.
역시 박성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그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자극도 되었다.
생각하는 사이 김혁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요즘 술도 거의 안 마시고, 여자 만나러 다니지도 않아요. 그리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병원에서 먹고 자고 한다니까.”
“리마인드가 그런 의미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요.”
“그 정도 마음가짐도 없으면 닥터 최에게 지는 거랍니다.”
“이거 저도 팍팍 자극이 되네요.”
“당연히 그러셔야지. 그런데 언제 들어오시나?”
김혁권이 분위기를 바꾸자 태수도 그에 맞게 응대했다.
“아직 계획은 없습니다.”
“이쪽은 슬슬 계획이 진행 중인 거 같던데. 서울 신속대응센터 말입니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태수의 빠른 질문에 김혁권이 살짝 당황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몰랐는데.”
“기대가 없겠습니까.”
“그런 분이 미국에서……. 에이, 그건 뭐, 다른 문제니까 넘어가고.”
“그래요. 서로 복잡한 건 넘어가고요.”
태수가 가볍게 대답을 넘기자 김혁권도 바로 알아본 걸 이야기했다.
“좌우간 앞으로 삼사 개월 후면 완공될 거라네요. 동성건설의 모든 인력이 그쪽에 투입됐다나 뭐라나.”
“이사장님이 정말 작정을 하셨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조감도도 나왔는데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이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동이라니요. 그 배포엔 아주 질렸다니까.”
김혁권은 정말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은 태수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보다 삼사 개월이라면 저도 언제쯤 들어가야 할지 감이 잡힐 거 같습니다.”
“언제?”
“반년 후에요.”
“먼저 들어오는 게 아니라?”
“저번에 대전 신속대응센터 오픈할 때 엄청 고생했거든요. 두 번은 싫습니다.”
태수의 말에 김혁권의 목소리가 대뜸 커졌다.
“그럼 우리는?”
“수고하십시오.”
“닥터 최! 이건 아니지. 그건 배신이지.”
“많이 배우고, 또 많이 정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그거 핑계지. 솔직히 말해. 그냥 들어오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잖아.”
김혁권이 따지듯이 말하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선배님 말투인데.”
“뭐라고요?”
“지금 하신 말씀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더 와 닿으실 거 같은데요.”
“……젠장. 나쁜 물 들어 버렸네. 더 통화할 기분 아니니까 일단 끊읍시다.”
김혁권의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태수도 휴대폰을 내렸다.
둘이 오래 붙어 있는 만큼 대화법도 닮아 간 모양이다.
이 일로 서로 지지고 볶을 상황이 눈에 훤히 그려졌지만 태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서울 신속대응센터 오픈이 그리 멀지 않았단 소식은 의외였다.
석정현 이사장의 추진력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예상을 뒤엎고 보란 듯이 추진하고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태수의 생각이 좀 더 이어졌다.
자신과 별개로 일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던 중 석정현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의사가 환자를 어떻게 제대로 볼 수 있느냐 말이야.
정답이다.
이 상황에서 태수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는 걸로 끝나서는 안 된다. 더 발전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렇게까지 시간을 허락받은 호의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래. 다시 시작이야.”
박성민과 함께했던 인턴 때의 그 마음으로.
진료를 함에 있어서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그 시절로 돌아갈 터였다.
그리고 당당하게 귀국할 자신을 그렸다.
그 생각이 끝나자 태수는 바로 침대에 길게 누웠다.
오늘이 빨리 지나가고 내일이 찾아오길 기대하는 모습이다.
혼잡한 마음?
이젠 없었다.
목표가 확실해진 이 순간, 혼란은 사라졌다.
다음 날.
출근하는 태수의 얼굴이 어제보다 더 밝았다.
며칠 동안 LA 곳곳을 전전하면서도 안정되지 않았던 지난날과는 많이 달랐다.
태수도 자신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었다.
마음가짐 하나가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UCLA병원에 들어선 태수는 빠르게 움직였다.
특별히 누군가의 안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치프 시절 USMLE을 취득한 후 이곳에서 잠시 일을 했었다. 그때 기억이 있기에 원하는 장소를 찾아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태수는 우선 외과 탈의실로 향했다.
꼭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가는 건 아니다.
가운도 받아야 했고, 개인 사물함에 수술 도구 등 자신의 짐을 가져다 놓으러 가는 길이었다.
반년이라는 시간을 마음속으로 정해 놓았으니 그에 맞게 움직일 생각이다.
그렇기에 배정받은 캐비닛에 수술 도구와 약간의 개인 용품을 넣어 두는 건 당연했다.
태수는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바로 탈의실에 도착했다.
문 앞에 선 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직 기억력 괜찮네.’
스스로를 칭찬하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는 이미 도착한 몇몇 의사들이 가운을 걸치거나 수술복으로 갈아입는 등 분주한 모습이었다.
모두 낯선 의사들이다.
백인과 흑인이 주를 이루고, 종종 황인종들도 보였다.
그런데 모두가 전문의라고 보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생각하던 태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레지던트 생활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오프를 마치고 출근한 레지던트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때였다.
마른 체격의 백인 남자가 태수에게 다가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입니다.”
“여기 외과 탈의실 아닙니까?”
“맞긴 맞는데…….”
그가 멈칫하자 다른 의사들이 수군거렸다.
“누구야?”
“오늘 누가 온다고 했었어?”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만.”
외과 탈의실이라 서로서로 안면이 있을 터였다.
낯선 태수의 모습에 모두 의아한 시선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탈의실의 어색한 분위기를 직감했는지 바로 물었다.
“왓? 분위기가 아침부터 왜 이래?”
“어?”
태수의 귀가 쫑긋거려졌다. 익숙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