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265
01268 1268화
아버지의 순간적인 센스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도 겉으로는 투덜거렸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네놈 주사가 아파서.”
“그래도 왕진 가방은 챙겨 왔으니까 이따가 간단히 검사는 해 드릴 겁니다.”
“남들은 의사 아들 오면 좋은 줄 알지. 얼마나 사람 귀찮게 하는지 모르고 말이야. 됐다. 인사는 받았으니까 물러나.”
아버지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아이들의 인사를 빨리 받고 싶단 의미였다.
그걸 알기에 태수와 누나는 군말 없이 일어나서 비켜섰다.
그 빈자리를 아이들과 수현이가 꽉 채웠다.
수현이만 방긋 웃고 있고, 아이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절을 할 타이밍을 잡았다.
그래도 남자라고 주영수가 낮게 말했다.
“인사.”
그 말에 주영수와 주미성, 윤사라가 동시에 절을 올렸다.
학교 예절 교육 시간에 배웠는지 절을 올리는 모습이 제법 정갈하고 예뻤다.
반면, 반걸음 앞에 있던 수현이는 오빠, 언니들을 따라 절을 했지만 거의 엎어지는 수준이었다.
철퍼덕.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고 대견한지 부모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절을 올린 아이들이 무릎을 꿇고 바르게 앉았다.
부모님은 몸을 앞으로 쭉 내민 채 아이들의 얼굴을 한 명씩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아버지가 굵고 짧게 말했다.
“내 손주들, 잘 왔다.”
“…….”
무뚝뚝한 말투 속에 진심이 느껴졌는지 아이들은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버지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야 어머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너희 삼촌과 고모의 부모란다. 너희들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야.”
“네.”
“그리고 여기가 삼촌과 고모가 나고 자란 고향이니까 너희들에게도 고향이고, 이 집이 고향집이란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와도 돼.”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대답했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어머니, 아버지가 진심으로 대하자 아이들 또한 굳었던 어깨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다고 편하게 말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시간이 더 필요한 일이었기에 누구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태수는 언젠가 겪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광경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단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찼다.
인사를 마친 후 아이들은 어머니와 누나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요…….”
“그랬니?”
어머니는 그동안의 일들을 궁금해했고, 아이들은 숨기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의 일을 쭉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겪어 온 아픔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태수를 만난 후 일어난 일들을 들으며 미소 짓기도 했다.
누나 또한 처음 듣는 사연들이 많았는지 귀를 기울이며 간간이 추임새를 넣었다.
“어머, 어떡해.”
태수와 아버지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집 밖으로 나갔다.
태수는 의아한 얼굴로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낫을 들고 대문을 나서 창고 주변에 자란 풀들을 천천히 쳐 내기 시작했다.
태수도 똑같이 낫을 들고 아버지 옆에서 풀을 쳐 냈다.
삭삭.
어려서부터 했던 일이라 그런지 어색한 낫질이 몇 번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부드럽고 익숙하게 변했다.
몇 번 더 낫을 움직이던 태수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나오셨어요?”
“갑자기 나오기는. 할 일이 있으니까 나왔지.”
“아이들 보니까 어떠세요?”
“예쁘지.”
삭삭.
아버지는 대답하면서도 낫질을 쉬지 않았다.
갑자기 나온 이유를 생각해 본 태수는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쑥스러운 것이다.
호탕하고 남자다운 아버지였지만 여러 가지 표현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아이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일부러 나오신 거다.
그 심정을 태수는 알 수 있었다.
태수는 그런 아버지와 나란히 낫질을 이어 갔다.
아버지는 힐끔 쳐다봤지만 태수를 만류하지 않았다.
부자간에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창고 주변에 자란 풀들을 모두 쳐 낸 후였다.
아버지와 태수는 창고 앞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각자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모습이 정말 똑같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 품에 들어온 건 사람이든 짐승이든 먼저 내치는 법은 없어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하긴 네가 저 아이들한테 버림받지 않으려면 잘해야 할 거야.”
“그러게요. 매일 북적 북적거리는 지금이 너무 좋은데, 떠나간다고 하면 많이 아쉬울 거 같습니다.”
태수가 속마음을 이야기하자 아버지가 말했다.
“난 저 아이들이 고마워.”
“고맙다니요?”
“내가 볼 땐 천하의 못난 아들인데 뭐가 좋다고 저리 붙어 있느냔 말이야. 그러니까 고맙지.”
“아버지 아들이 그렇게 못나진 않았습니다.”
울컥하는 태수의 반응이 재밌는지 아버지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계속 놀렸다.
“아는 거라고는 째고 꿰매는 것밖에 없는 녀석이.”
“자랑스럽다면서요.”
“네 엄마가 그랬지.”
“아버지도 그러셨거든요.”
태수가 두 손 걷어붙이고 따지고 들 때였다.
아버지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랬지.”
“갑자기 왜 그러세요? 평소에는 절대 인정 안 하시던 분이.”
“…….”
“아버지?”
뚱하니 앞만 보던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옆에 앉은 아버지를 바라볼 때였다.
아버지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라. 나 잘났다고 콧대 높이지 말고, 나 잘났다고 어깨 넓히지 말고. 그렇게 아픔도 보듬어 주고, 정도 나누며 살라고.”
“…….”
“내 아들이 누군가를 품을 줄 아는 사람이란 게 자랑스럽구나.”
아버지는 그 말을 마치고는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일 먼저 돌아가신 부모를 떠올렸다. 저 하늘로 간 부모에게 아들의 대견한 모습을 자랑하기 바빴다.
‘잘 키웠죠?’
입가에는 아련함과 자부심이 동시에 교차했다.
태수는 아버지의 감상적인 모습에 마음이 살짝 아려 왔다.
해가 지나갈수록 어깨가 좁아지시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노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어도 시간이 흐르는 게 싫었다.
이기적일지 몰라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간은 그냥 이쯤에서 멈추길 바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태수는 그렇게 되길 소원했다.
노을이 질 무렵, 태수와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하하.”
“호호호.”
집 안에서 웃음소리가 가득 울리고 있었다.
아이들도 조금은 풀어진 자세로 어머니와 누나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니의 포용력에 아이들이 홀딱 빠진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푸근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고, 태수는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밌어?”
“삼촌 어렸을 때 얘기 듣고 있었어요.”
“그건 별로 재밌는 스토리가 아닌 거 같은데.”
“재밌어요.”
아이들이 딱 잘라 말하자 태수는 입을 다물었다.
뭐, 너희들이 즐겁다는데.
자신의 흑역사가 좀 까발려지는 게 대수는 아니었다.
태수도 같이 대화에 참여하던 중 매형이 도착했다.
“저 왔습니다. 오늘 파티 한번 제대로 하죠.”
밝은 목소리였다.
얼마후 매형이 양손 가득 사 온 고기로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물론 태수는 중간중간 부모님과 누나, 매형과 수현이의 건강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 날.
식구들은 다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발 준비를 했다.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들을 바리바리 챙겨 줬다.
그동안 아이들이 왔단 걸 알면서도 부담이 될까 챙겨 주지 못했던 음식들인 모양이었다.
엄청난 밑반찬의 양과 종류에 누나가 질투할 정도였다.
“엄마, 뭐 이렇게 많아? 저도 줘요.”
“이놈의 지지배야,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저도 주세요.”
“해 먹어.”
어머니의 단호한 한마디에 누나는 입만 삐죽거릴 뿐이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서 그런지 점심 무렵이 되자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났다.
아이들은 또다시 매형의 차에 올라탔고, 태수만이 홀로 자신의 차에 앉아 있었다.
2대의 차가 나란히 서 있는 상태에서 조수석에 앉은 누나가 태수에게 물었다.
“대전에 내려갔다가 저녁에 올라온다고?”
“오랜만에 시간 냈으니까 잠깐 들렀다가 가려고.”
“그럼 애들은 저녁 먹이고 보낸다.”
“나야 고맙지.”
태수가 한마디 하는 사이 뒤의 차창이 열리더니 주미성이 대표로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이따 집에서 보자.”
“네.”
그때 윤사라와 주영수가 주미성을 옆으로 밀며 얼굴을 보였다.
“삼촌…… 안녕……. 윽!”
“무거워! 비켜!”
“저녁에 봬요!”
아이들의 부산한 인사 속에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 뒤로 아이들은 부모님과 한 차례 더 인사를 한 후에야 떠나갔다.
부모님은 자연스럽게 태수의 차로 다가왔다.
태수가 먼저 말했다.
“들어가세요.”
“가는 거 보고.”
“곧 갈 건데요.”
“그래도. 그리고 태수야, 아이들이 복 받은 게 아니라 네가 복 받은 거 알지?”
어머니의 질문이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태수는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럼요. 저렇게 착한 아이들이 어디 있다고요. 아이들과 보내는 하루가 즐겁고, 또 그 속에서 많이 배웁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리고 혹시 필요한 거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알겠습니다. 그보다 어머니는 췌장 기능이 많이 약해지셨으니까 어제 말씀드린 대로 조금씩 자주 드시고요. 자극적인 음식은 되도록 피하세요.”
태수가 건강을 챙기자 어머니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니까.”
“제가 서울 올라가면 내과 선생님한테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고 또 연락드릴게요.”
“그래그래.”
어머니는 아들의 잔소리가 듣기 좋은지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대화를 마친 태수가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뚱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다. 술도 적게 마시고 담배도 적당히 피우라고. 알고 있다니까.”
“거기에 몸도 덜 움직이시고요.”
“왜, 아주 방에 가둬 놓지 그러냐?”
아버지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태수가 어깨를 들썩였다.
“원하신다면.”
“이 녀석이!”
“하하. 그럼 갑니다.”
태수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출발하려 하자 아버지가 바로 물었다.
“또 언제 오냐?”
“저요?”
“아니, 애들.”
“제가 아니라도 누나가 데리고 올 겁니다.”
“그럼 됐다. 가라.”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돌아섰다.
용건 끝났으니 빨리 가란 의미였다. 참 언제 봐도 한결같으신 모습에 태수는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갈게요.”
“그래. 운전 조심하고.”
끄덕.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아차 싶은 태수가 봉투 2개를 꺼내 부모님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아차차, 그러니까 이거…….”
탁.
태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번개같이 봉투를 낚아채고는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뭐 하냐? 안 가고.”
“하하. 갑니다.”
“그래라.”
아버지는 뚱하니 서 있고, 어머니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수는 환하게 웃으며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배웅하는 부모님은 태수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어머니가 아버지를 슬쩍 째려봤다.
“용돈이 없어서 그걸 받아요?”
“저놈 마음 편하라고.”
“…….”
“나도 내 돈으로 술 사는 것보다 아들놈이 준 용돈으로 술 사는 게 더 좋아. 여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 덤덤한 얼굴로 태수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좀 더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