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304
01307 1307화
태수와 김혁권, 박성민은 먼저 의국을 나와 탈의실로 향했다.
입이 튀어나온 김혁권이 박성민을 째려보더니 날카롭게 물었다.
“야근하셔야 할 분이 왜 따라옵니까?”
“가시기 전에 커피나 한잔 사 드릴까 하고.”
“나도 그거 마실 돈은 있어요.”
“그러지 말고, 송 간호사도 같이 불러서 우리 오붓하게 차 한잔 마시자니까요. 내가 그때 너무 기뻐서 회까닥한 거라고.”
박성민은 자신의 행동이 미안했는지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때 태수가 슬쩍 도움을 줬다.
“혁권 씨, 선배가 정말 미안해하고 있잖습니까.”
“난 말입니다, 남자가 그렇게 막 끌어안고 그러는 거 정말 싫어한다고.”
“선배도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냐고. 아무리 기뻐도 그렇지.”
김혁권은 짜증을 내고 있지만 목소리가 전처럼 우악스럽진 않았다.
화가 많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걸 오래 같이 일하며 바로 알아챈 박성민이 얼른 나섰다.
“그러니까 내가 커피 산다니까요. 돈이 없어서 사 주는 게 아니라 기분 푸시라고 사 드린다고.”
“……커피 말고.”
“그럼 뭐? 생과일주스? 아니면 아이스크림? 내가 다 사 드릴게. 야간 근무라서 나가진 못해도 안에서는 다 사 드린다니까.”
“가서 메뉴판 좀 보고 결정하자고. 그보다 이거 현미한테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 둘 다 평생 놀림감 돼요.”
김혁권의 말에 박성민의 표정이 바로 딱딱하게 돌변했다.
“내가 절대 송 간호사한테는 입 다물 겁니다. 미안하다는 내색도 하지 않을 거라고요.”
“절대 조심해요. 진짜 우리 둘 다 평생 잡혀 살지도 몰라.”
“이미 잡혀 사…….”
“뭐요?”
김혁권이 째려보자 박성민이 얼른 말을 돌렸다.
“잡혀 사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항상 이기고 있단 걸 알고 있는데, 그 주도권을 어떻게든 지켜 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렇지. 잘 봤네.”
“내가 김씨 아저씨에 대한 일은 다 알고 있잖아.”
“그거야 뭐. 나도 박씨 선생에 대해서 모르는 게 별로 없으니까.”
“가십시다. 우리 아주 입 꽉 다물고 차만 마시자고.”
박성민이 한 번 더 구슬리자 김혁권도 더 이상 눈을 가자미처럼 뜨지 않았다.
지켜보던 태수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건 언제 싸웠냐는 듯이 일치단결한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란히 걸어갈 뿐이다.
띠리릭.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며 태수의 가운 주머니가 번쩍거렸다.
태수는 바로 휴대폰을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외과장님이시네요.”
그 말에 박성민과 김혁권이 동시에 째려봤다.
“하여간 바빠.”
“도대체 저놈이 뭐가 좋다고 자꾸 찾는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
“내 말이요. 보나마나 우리끼리 마시고 헤어지겠네.”
“갑시다. 버려, 버려.”
휙휙.
박성민은 아예 대놓고 손짓하고는 김혁권과 나란히 앞서 걸어갔다.
태수는 어이없어 하기도 귀찮았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과장님.”
“이 시간에 전화하면 뻔한 거 아닌가?”
“올라갈까요?”
“아니. 현관에서 만나지.”
“그럼 10분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옷은 갈아입고 나가야죠.”
태수가 서글서글하게 말하자 박남일 외과장의 화답이 들려왔다.
“그 정도 시간은 줄 수 있으니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그럼 현관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태수는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박성민과 김혁권이 먼저 움직였기에 태수는 개의치 않고 탈의실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잠시 후, 태수는 편안한 차림으로 현관 앞으로 나갔다.
계단 아래쪽에 박남일 외과장의 차가 대기 중이었다.
태수는 얼른 계단을 내려가 조수석을 열고 인사했다.
“좀 늦었습니다.”
“얼른 타.”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태수가 바로 차에 오르자 박남일 외과장이 한 소리 했다.
“타라니까 냉큼 조수석에 타다니. 말이라도 최 팀장이 운전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개인 차량은 주인이 바뀌면 안 됩니다. 민감한 차들은 조금만 다르게 운전해도 스타일이 달라져 버리거든요.”
“그건 또 어디서 나온 말이야?”
“카센터 하시는 매형이 알려 준 팁입니다.”
태수의 막힘없는 대답에 박남일 외과장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최 팀장이 이렇습니다.”
그러자 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하루 이틀이 아니잖습니까.”
“제가 교육을 잘못시켰네요.”
그 소리에 태수는 얼른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백성현 흉부외과장과 이정민 교수가 나란히 뒤에 앉아 있던 탓이다.
태수는 불편한 자세라는 것도 잊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 으윽.”
“조심 좀 하지. 허리 괜찮나?”
“아니요. 신속대응센터에 입원시켜 주세요.”
태수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농담을 건네자 다들 크게 웃었다.
“하하하.”
“좌우간 최 팀장 재밌는 건 알아 줘야 한다니까.”
“자자, 진짜 환자 한다고 드러눕기 전에 출발하겠습니다.”
부웅.
박남일 외과장이 차를 출발시키자 태수는 얼른 안전벨트부터 맸다.
아직 욱신거리는 허리에 손을 대고 있지만 찡그린 얼굴은 미소로 바뀌었다.
여기 자리한 모든 분들에겐 한없이 어리고 작은 의사이고 싶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네 사람은 병원에서 조금 먼 한식집에 앉아 있었다.
전통 한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소라 뭔가 마음이 푸근하고 여유로워졌다.
앞에 차려진 음식은 석정현 이사장과 먹었던 한정식만큼이나 호화찬란했다.
박남일 외과장이 태수에게 말했다.
“이건 흉부외과장이 사 주시는 거니까 부담 없이 먹어도 돼.”
“흉부외과장님께서요? 감사합니다. 아주 그릇까지 박박 긁어 먹겠습니다.”
태수가 넉살을 부리며 말하면서도 예의를 갖춰 깊게 고개 숙여 인사하자 백성현 흉부외과장이 소리 내 웃었다.
“하하. 사람 참. 입맛에 맞으려나 몰라.”
“딱 봐도 제 스타일입니다.”
“그럼 다행이고. 먹지.”
“먼저 수저 드셔야죠.”
태수가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못 말리겠단 듯이 고개를 한 번 저은 백성현 흉부외과장이 이정민 교수와 박남일 외과장에게 말했다.
“식사 시작하시지요.”
“그럼 최 팀장 덕분에 좋은 음식 맛 좀 보겠습니다.”
서로서로 화답하며 수저를 들자 태수도 식사를 시작했다.
정말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았다.
음식 하나하나 고유의 맛이 제대로 느껴졌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조미료 맛이 없어서 조금 심심한 듯했지만, 오히려 깔끔함과 맛의 깊이가 입맛을 자극했다.
게다가 시장이 반찬이라고, 오늘 하루도 정신없이 보내 배가 고팠던 태수는 집요할 정도로 수저를 놓지 않았다.
그런 천진난만한 태수의 모습을 보며 세 사람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더 먹어.”
“감사합니다.”
“여기 이거 맛있던데.”
“하하. 오늘 제 생일 같습니다.”
태수는 챙겨 주는 걸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야무지게 먹었다.
세 사람이 무심한 얼굴로 챙겨 주는 모습이 마치 조카를 대하는 듯이 자연스러웠다.
식사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는지 상이 한 번 바뀌고 술상이 준비되었다.
태수는 배가 불러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는 경험을 했다.
“으으…… 진짜 배 터지겠습니다.”
“밥을 세 공기나 먹었으니 그렇지. 반찬을 몇 번이나 추가했는지 기억하나?”
“너무 맛있는 걸 어떻게 합니까.”
태수가 합당한 이유를 대자 다들 미소를 지었다.
곧 박남일 외과장이 술 주전자를 들며 태수에게 말했다.
“이거 첫 잔은 내가 따라 줘야겠는데.”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먼저 술을 받습니까?”
태수가 얼른 손을 뻗었지만 박남일 외과장은 슬쩍 뒤로 빼며 말했다.
“내 친구 대신해서 따라 주는 거야.”
“네?”
“이국종 센터장 말이야. 인터뷰에서 자기 이름 불러 준 죄로 술 한 잔은 따라 주라고 했어.”
박남일 외과장이 그렇게 말하자 태수도 거절할 명분이 서지 않았다.
“이거 참.”
“팔 떨어져.”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태수가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잔을 들었다.
배가 아무리 불러도 어른이 따라 주는 잔은 예의를 갖춰 받으라고 아버지께 배웠다.
그런 태수의 모습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박남일 외과장이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같이 술 한잔하자고 말만 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최 팀장 덕분에 중증외상센터가 많이 바빠져서 시간이 안 나는 거니까 안타까워하지 말고.”
“그게 왜 저 때문입니까? 훨씬 전부터 인망 높으신 분이었는데요.”
“그래도 그 친구는 그게 아닌가 봐. 그래도 옆에 있는 나한테 꼭 술 한 잔 따라 주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둬.”
“이렇게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그 친구 보고 싶진 않고?”
박남일 외과장이 슬쩍 묻자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항상 생각합니다. 만날 사람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만나진다고요.”
“그게 정답인 거 같은데.”
“그때까지 제 일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언제든지 당당하게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래, 그거야.”
“이제 제가 따르겠습니다.”
술잔을 내려놓은 태수가 양손을 조심히 내밀자 박남일 외과장도 주저 없이 술 주전자를 건넸다.
태수는 가장 연장자인 백성현 흉부외과장을 먼저 바라봤다.
그가 잔을 내밀자 태수가 공손히 따르며 말했다.
“항상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더 잘할 겁니다.”
“그래. 그런 자세가 중요하지.”
백성현 흉부외과장은 술이 잔에 차오르는 순간에도 태수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다음에는 이정민 교수였다.
태수는 술을 따르려다가 멈칫하며 말했다.
“교수님은 제가 따로 모시려고 했는데요.”
“뭘 또 따로 보나?”
“그때…….”
태수가 말하려 하자 이정민 교수가 선수를 쳤다.
“그 일은 이제 과거가 되었는데 무슨 할 말이 많아. 어제는 머릿속에 담아 두고, 오늘을 살아야지.”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습니다. 그 아이 수술이 무사히 끝날 수 있었던 건 교수님 덕분입니다.”
“최 팀장이 다 해 놓고 나한테 떠넘기는 건 무슨 경우인가?”
“사실을 말씀드리는 건데요.”
“그럼 술 한 잔 따르는 걸로 퉁 쳐.”
이정민 교수는 어떤 사심도 없는 순수한 눈빛으로 말했다.
태수를 위한 일이 아니란 걸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태수 또한 더 이상 이정민 교수를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이 한 잔을 채우는 데 감사함과 존경함을 담뿍 담았다.
태수의 표정과 자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이정민 교수의 표정은 어느새 부드럽게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남일 외과장의 잔을 채우며 태수가 말했다.
“저 때문에 항상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러게 말이야. 사고도 적당히 쳐야 수습이 되지. 다음 주에 내 수술만 몇 건 추가됐는지 아직 집계가 안 돼.”
“사실이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부끄럽습니다.”
“왜 부끄럽나? 웃으며 당당하게 맞대응해야지.”
박남일 외과장이 짓궂게 말하며 찡긋거렸다.
그의 성품은 태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국종 센터장과 죽마고우라고 알려졌을 정도로 성격과 행동이 비슷했다.
그리고 환자를 우선시하고 자기 걸 얼마든지 베푸는 것도 알고 있었다.
태수가 그를 존경하는 건 자신에게 잘해 줘서가 아니다.
말과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인품으로 인해 자연히 이뤄진 것이다.
그렇게 모두 잔을 채운 후 백성현 흉부외과장이 대표로 말했다.
“우리를 바쁘게 만들어서 집사람에게 눈총 받게 한 최 팀장을 위해.”
“아니, 흉부외과장님.”
태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정민 교수와 박남일 교수가 술잔을 위로 올렸다.
“위하여.”
쭈욱!
그들이 술을 단번에 들이켜자 태수는 어떤 핑계도 대지 못한 채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주 작정하고 모인 것 같은데 그 분위기에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