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494
01497 1497화
“아무래도 그건 좀 무리겠죠?”
“좀 무리가 있죠.”
“하긴 그 큰 수술을 하고 쉬시는 건데요.”
정관영이 이해한단 듯이 고개를 끄덕일 때 태수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말씀하시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건데요.”
“네?”
“태수야, 한번 가 봐라. 이러면 되는 거 아닙니까?”
“…….”
“그래서 저에게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태수가 넉살 가득한 얼굴로 전혀 모르겠단 듯이 묻자 정관영이 어이없이 바라봤다.
“참, 팀장님도.”
“그래서 뭐라고 하셨느냐고요.”
“강원도 한번 다녀오시죠.”
“마침 맑은 공기가 마시고 싶었는데, 꼭 다녀오겠습니다.”
태수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정관영도 똑같이 미소 지었다.
다음 날.
태수는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눈을 떴다.
“하암.”
졸린 눈을 비비며 내려왔지만 집엔 혼자뿐이었다.
물을 한 잔 마시니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조금 맑아진 머리로 눈을 굴리던 태수가 아이들을 걱정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음료수를 마시며 대화했었다.
이 시간에 학교에 있을 아이들이 얼마나 피곤할지 생각하니 조금 미안했다.
“자식들. 일찍 들어가서 쉬라니까.”
괜히 투덜거린 태수가 냉장고를 뒤적거릴 때였다.
띠리릭.
휴대폰 벨소리에 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내 본 태수가 반가운 표정으로 변했다. 다름 아닌 충선대 학생회장인 박지석의 전화였다.
“이게 누구야? 학생회장 아니야?”
“선배님,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요즘 백수 신세지.”
“미성이한테 물어보고 혹시나 해서 전화했는데 진짜였네요.”
박지석의 입에서 주미성의 이름을 듣는 순간 태수의 눈이 가자미처럼 변했다.
“너무 친하게 부르는데.”
“오빠, 동생 하기로 했다고 전에 말씀드렸는데요.”
“지석아, 내가 다른 일엔 몰라도 미성이 일에는 아주 날카롭단다.”
“남녀 관계는 모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당찬 박지석의 목소리에 태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이거 봐라?”
“물론 지금 뭐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단 건 아닙니다. 미성이를 노리는 수많은 늑대들에게서 보호해 주고 있는 건 확실하고요.”
“원래 시작은 그렇게들 하더라고.”
“충고 감사합니다.”
“이 자식이. 아침부터 전화해서 이상한 소리나 하고. 학생회장이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충선대가 발전이 되겠냐?”
태수가 투덜거렸지만 박지석의 목소리는 큰 변화가 없었다.
“제가 학생회장에 오른 뒤로 현재까지 역대 최고의 성과를…….”
“헛소리 그만하고. 이 자식이 술 몇 번 먹더니 아주 엉기네? 너 인마, 직속 후배였으면 벌써 나한테 죽었어.”
“저는 경영대가 좋습니다. 그보다 전화를 드린 건 그 때문이 아니고요.”
“그래, 본론이나 얘기해 봐.”
태수가 귀찮단 듯이 말을 내뱉자 박지석이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물어 왔다.
“강의는 언제가 좋으신지 일정 잡으려고요.”
“그건 또 뭔 소리야?”
“의대 애들이 학생회에 자꾸 건의사항을 넣는 실정입니다.”
“알아서 잘 막아.”
“정 그러시면 의대 학장님과 면담을 요청해서…….”
거기까지 들은 태수가 중간에 뚝 끊고 으르렁거렸다.
“너 지금 나 협박하냐?”
“네.”
“이야, 충선대 기강 완전 무너졌네. 어디 학번도 보이지 않는 녀석이 협박이야?”
“미성이 바꿀까요?”
박지석이 강수를 두자 태수가 멈칫했다.
“미성이는 왜?”
“저희 학생회에서 섭외를 담당하고 있으니까요. 잠시만요.”
박지석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곧 주미성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촌!”
“어, 그래. 우리 미성이, 잘 지내고 있어?”
“네. 학교 완전 좋아요. 선배님들도 다 좋으시고, 교수님들도 너무너무 잘해 주시고요.”
“그래야지. 미성이가 학교생활이 좋다니까 나도 참 기분이 좋다.”
태수가 웃으며 대답하자 주미성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삼촌은 언제 학교에 오시는데요?”
“나? 아니, 내가 지금…….”
“요즘 휴직 중이시잖아요. 미국 다녀오시면 또 한 번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미성아, 지금 누가 옆에서 말해 주는 건 아니지?”
태수가 의심하며 물었지만 주미성은 더욱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닌데요. 삼촌, 보고 싶어요.”
“그렇지. 나도 미성이가 보고 싶긴 한데.”
“그럼 언제 오시는 건데요? 다음 주는 초빙 강사가 있어서 좀 힘들고요. 그다음 주는 괜찮을 거 같은데.”
“이 녀석이.”
태수가 으르렁거려도 주미성에겐 소용이 없었다.
“그럼 다다음 주 수요일로 할까요?”
“얘를 괜히 대학에 보냈나?”
“그럼 그렇게 할게요. 시간은 2시부터 4시, 괜찮으시죠?”
“알았다. 내가 졌으니까 일정 잡아서 문자로 다시 넣어 주고, 학생회장 바꿔 봐.”
“네, 삼촌. 사랑해요!”
주미성의 뜬금없는 사랑 고백이었지만 태수는 심드렁했다.
곧 다시 박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선배님.”
“이거 누구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야?”
“무슨…….”
“솔직하게 얘기하자. 의대 학장님이야?”
“…….”
박지석이 대답하지 못하자 태수는 바로 예감을 직감으로 바꿨다.
“도대체 그분은 왜 애들을 시키시냐고.”
“학장님이 전화하시면 절대 안 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하지.”
“그래서 저와 미성이에게 꼭 섭외하라는…….”
박지석의 대답이 끝까지 이어지기 전에 태수가 뚝 잘라 물었다.
“그래서 부수입은 많나?”
“네?”
“나 섭외하면 애들 밥값이라도 주신다고 했냐고. 내가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알아서 술술 불어.”
“그게…… 밥값하고 술값까지…….”
“그럼 그렇지. 그래, 내가 사 주는 건 아니지만 실컷 먹고, 학교 가서 보자.”
태수가 퉁명하게 말하자 박지석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혹시 화나신 건 아니죠?”
“됐어, 인마. 이상한 생각 말고 잘 놀고 있어. 일정 맞춰서 갈게.”
“하하. 선배님, 언제나 존경합니다.”
“제대로 존경 좀 해 봐라. 자식. 그때 보자.”
전화를 끊은 태수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한종대 학장도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태수가 후배들에게 약하단 걸 어느새 파악하고 약점을 찔러 왔다.
그래도 쉴 때 용돈 벌이라도 할 겸 후배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는 걸 나쁘게 생각하진 않았다.
휴대폰을 들고 있던 태수가 잠시 바라봤다.
어제 정관영에게 이명석의 전화번호를 다시 받아 저장했었다.
오늘 찾아갈 예정인데, 태수가 고민하는 건 전화를 할까 말까에 대한 거였다.
좀 더 고민하던 태수는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태수는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뒷좌석엔 의외로 많은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왕 강원도로 가는 김에 초곡리까지 들렀다 올 작정이었다.
물론 이런 스케줄도 어제 아이들에게 말해 놓았기에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본가에 내려갈 땐 사실 조금 피곤한 상태였다. 지금은 피로를 완전히 풀어냈기에 운전대를 잡는 손길부터 달랐다.
“좀 달려 볼까?”
부아앙!
태수는 젊음만큼 힘차게 가속페달을 밟아 이명석에게로 향했다.
한참 달리고 달린 태수는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한 번 왔던 장소라 다시 찾아오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병풍처럼 둘러진 끝내주는 산세는 다시 봐도 역시 장관이었다.
좀 더 차를 몰아간 태수는 방동의원 앞에 멈춰 섰다.
준비한 선물을 들고 차에서 내리려던 태수가 잠시 그대로 방동의원 현관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꾸준히 오가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전에 봤는지 낯이 익었다.
처음 정관영을 찾아 이곳에 왔을 때 파리가 날렸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저 속에 이명석이 있다니.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세상 인연이란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와 찾아온 게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태수가 준비한 선물은 고가의 양주였다.
이명석을 떠올리며 정관영과 헤어지고 부랴부랴 준비한 것이었다.
같이 근무한 시간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태수가 그를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만나서 다시 얘기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사람이 뜸해진 틈을 타 차에서 내린 태수는 방동의원으로 들어갔다.
접수처엔 간호사가 앉아 있었고, 접수실엔 몇몇 마을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집기나 인테리어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변함없는 그 모습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졌다.
예전에 봤던 20대 중반의 간호사는 어느새 30대가 되어 있었다.
태수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서류 정리에 바빴는지 간호사가 형식적으로 쳐다보며 묻다가 깜짝 놀랐다.
“어서 오세……. 최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어, 어, 어떻게…….”
간호사가 놀라자 각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마을 사람들도 그제야 태수를 알아봤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최 선생 아니야?”
“평안하셨습니까??”
“이 나쁜 사람. 정 원장을 빼앗아 가고 말이야. 하하.”
웃으며 타박하는 소리가 너무도 정겨웠다.
태수는 그런 마을 사람에게 머쓱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저 잘한 거죠?”
“그럼, 그럼. 가끔 정 원장이 찾아와서 우리를 봐주고 그런다고. 고생 많이 하는 거 같은데, 전보다 병은 더 잘 알아보더라고.”
“선배님이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계십니다.”
“가끔 찾아와 줘서 고맙긴 한데, 시원섭섭하긴 하지. 아차차! 그보다 이거 최 선생이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다들 부산하게 굴려 하자 태수가 먼저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이명석 선배님 먼저 뵙고 나오면 안 될까요?”
“이 원장도 최 선생 선배야?”
“전 감히 쳐다보지 못할 까마득한 선배님이시죠.”
“이 동네 원장들 이력이 왜 이렇게 화려해? 이런 촌구석에 말이야.”
마을 사람들은 다들 황당한 표정이었다.
빙긋 미소를 지은 태수가 간호사를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간호사가 진료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가셔도 돼요.”
“진료 대기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물리치료받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리고 말씀 나누시느라 시간 늦어지면 같이 진료 봐주시는 거 아닌가요? 전처럼요.”
간호사의 당연하단 목소리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네. 그건 걱정 마시고요. 그럼 먼저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태수는 양해를 구하고 진료실로 다가갔다.
똑똑.
노크한 태수는 살짝 긴장됐다. 카슈미르에 가기 전에 보고 처음이라 미안함도, 설렘도 느껴졌다.
그때였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무심한 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 속 이명석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태수는 더욱 기대 서린 얼굴로 진료실 문을 열었다.
끼익.
안에는 차가운 인상의 이명석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도 태수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 태수?”
“치프, 오랜만입니다!”
태수는 씩씩하게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태수의 인사에도 이명석은 아직 현실로 와 닿지 않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 선생이 여기에는 어떻게…….”
“치프도 참. 당연히 얼굴 뵈러 왔죠. 오랜만에 뵙습니다.”
태수는 가까이 다가가 다시 한 번 넙죽 고개를 숙였다.
이명석은 얼떨떨한 얼굴로 어색하게 마주 고개 숙였다.
“그, 그래. 잘 지냈지?”
“엄청…… 잘 지내지는 못했고요. 이제부터 잘 지낼 예정입니다.”
“거참. 많이 변했네.”
“시간이 흐르긴 했나 봅니다. 그런데 치프…… 손 한번 잡아 주십시오.”
태수가 손을 옷에 문지르며 부탁하자 이명석이 황당한 얼굴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 여기.”
“감사합니다.”
“내 생전에 악수를 이렇게 하는 경우는 처음이네.”
“너무 뵙고 싶었습니다. 여기 계신 줄 알면서도 이제 찾아와 죄송합니다.”
태수의 사과에 이명석은 오히려 어이가 없는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해. 일단 우리 좀 앉자고. 서서 말할 건 아니니까.”
“그 전에…… 진료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기다리시던데요.”
“관영이한테 들은 그대로네. 아직 진료 마감이 두시간은 남은 거 같은데.”
“그럼 여관 아주머니한테 인사하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이명석이 웃으며 보내려 하자 태수는 들고 있던 양주부터 건넸다.
“아차, 이거요. 나중에 좋은 일 있을 때 드시라고 가져온 겁니다.”
“왜 이런 걸 가져와? 사람 불편하게.”
“불편하시면 얼른 드세요. 그럼.”
태수는 주먹을 꽉 쥐어 보인 후, 혹시나 이명석이 선물을 거부할까 봐 부랴부랴 진료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