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75
01878 1878화
심장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다른 게 두 눈에 보였다.
ECG에 표시된 그래프도 역시 좋지 않았다.
물론 아직 맥박과 혈압이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추가적으로 어떤 정보를 알아 낼 순 없었다.
그게 기계의 한계였다.
그런 반면 사람의 눈은 미묘한 차이도 구분해 낼 수 있었다.
분명 심장이다.
푸아드의 심장, 혹은 주변에 문제가 잠재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언젠가 심장 기능에 이상이 생길 만한 문제였다.
머리로 백날 생각하는 건 의미가 없다.
태수는 지체할 것 없이 청진기를 잡아챘다. 그리고 청진판으로 심장 구석구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폐의 굳어진 겉면을 처치하던 이기준과 도성민이 힐끔 쳐다봤지만 어떤 말을 하진 않았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수술을 온전하게 마무리 짓는 일에만 집중했다.
반면 심장과 대동맥궁까지 신중하게 확인하던 태수가 어느 부분에서 멈췄다.
동시에 태수의 눈빛이 가늘게 변했다.
‘여기다.’
태수는 확신했다.
지금 청진판을 대고 있는 건 관상동맥이었다.
그동안 투여된 항응고제가 응고된 혈액을 녹이고, 또 새로 유입된 혈액들이 해독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좌관상동맥의 일부는 꽉 막혀 있었다.
계속 수술이 이어지며 자극을 주는 중이라 ECG로 찾아낼 수 없는 문제였다.
찾아낼 수 없었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수술에 완벽하게 성공하고 해독까지 안전한 수준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관상동맥부전으로 인한 급성협심증으로 심장이 멈출 수도 있다.
아직 그 정도까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견된 건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태수의 관찰력이 빛난 순간이었다.
태수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왜 관상동맥이 막혔냐는 점이다.
그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굳어졌던 피가 자잘하게 부서져 혈관을 따라 이동하던 중 관상동맥에 도달했고, 급속도로 혈관이 좁아지다 보니 막힌 게 분명했다.
결론을 내리던 태수가 순간 멈칫했다.
이게 바로 심실세동의 원인이었다. 일시적으로 협심증이 찾아와 심장이 가늘고 빠르게 뛰게 된 것이다.
억지로 심장을 원상태로 돌렸지만 언제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할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태수가 바로 좌우로 고개를 털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여기가 문제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그 이후로는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던 태수의 눈빛이 가볍게 반짝였다. 그리고 이 수술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지체할 이유가 없기에 태수는 바로 문제가 없는 다리 쪽으로 향하며 낮게 소리쳤다.
“그래프트 채취합니다!”
느닷없는 소리에 다들 멈칫했다.
“갑자기 그래프트?”
“관상동맥우회술을 하겠다고?”
“그럼 관상동맥이 막혀야 하는 거잖아.”
의아한 목소리가 오갈 때였다.
태수가 낮고 빠른 목소리로 재촉했다.
“둘 다 떠들지 말고 얼른 마무리 지어. CABG가 마지막이니까!”
“마지막? 확실해?”
“확실해.”
태수가 굳은 목소리로 말하자 조금 지쳐 가던 이기준과 도성민의 얼굴에 희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수술이 끝나면 환자에게 위험이 없다는 소식만큼 기쁜 건 없었다.
거기에는 물론 개인적인 욕심도 담겨 있었다.
“얼른 끝내고 쉬자!”
“제대로 끝내고 쉬어야지.”
“누가 대충 한다고 했어?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진행하자고. 뭐 해? 이 선생, 왜 손이 멈춰 있어?”
같이 흥을 내던 도성민이 돌변해 재촉하자 이기준이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이기준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보다 훨씬 힘차고 빠른 손놀림이었다.
어시스던트하는 도성민도 그렇고, 김혁권도 보조하는 손길에 힘이 느껴졌다.
태수는 세 사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보조도 없이 홀로 그래프트 채취에 들어갔다.
그 손놀림이 너무도 경쾌했다.
느려졌던 시간은 또다시 빠르게 흘러갔다.
자정이 막 지난 시각.
모든 수술이 끝나고 태수가 마지막으로 확인을 마친 후 흉부를 봉합하고 있었다.
척.
봉합을 마친 태수가 봉합사를 끊자마자 서영우를 쳐다봤다.
“선생님.”
“그래……. 그래! 이거야.”
“네?”
“좋다고. 이 정도면 고비는 넘었다고 봐야지. 아니, 확실히 넘겼어!”
서영우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모두에게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그 순간 태수와 김혁권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수술하면서 성공했단 걸 이미 직감했다. 하지만 그걸 직접 귀로 들으니 와 닿는 감회가 너무도 달랐다.
눈빛이 거칠게 흔들리던 김혁권이 혹시 몰라 재차 물었다.
“닥터 서,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하는 거 아니죠? 진짜 고비를 넘긴 거 맞느냔 말입니다.”
“맞다니까요. 이 수치를 보세요. 그래프를 보시라고요.”
“진짜…….”
김혁권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살렸다.
비슷한 증상의 케이스를 이번에는 이겨 냈다.
이 아이는 푸아드지만 사비이기도 했다.
그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사비를 이번에는 붙잡았다.
언제나 묵직했던 가슴 한쪽이 서서히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건 김혁권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태수는 크게 동요하는 김혁권에게 다가가 강하게 어깨를 쥐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코끝이 벌겋게 변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너무나도 벅차오를 뿐이었다.
끄덕.
태수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김혁권도 따라 했다.
이제 됐다.
이젠 과거에서 벗어나자는 의미였다.
그렇게 감격 가득한 얼굴로 태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고생…… 잘 버텼어.”
김혁권의 어깨에서 손을 내린 태수가 수술대를 향해 깊이 고개 숙였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개운한 목소리였다.
수술은 끝났지만 태수는 쉽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오히려 서영우까지 내보내며 쉬었다 오라고 권했다.
혼자 남은 태수는 환자와 ECG가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띡, 띡.
ECG의 소리가 안정적으로 울렸다.
그래프와 수치 모두 그 소리만큼이나 안정적이었다.
한참을 지켜봤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중간중간 미미한 변화가 있었지만 약간의 투약으로 곧 안정을 되찾았다.
ECG에서 시선을 뗀 태수는 푸아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순간 태수가 멈칫했다.
푸아드의 얼굴이 마치 사비처럼 보인 탓이다.
퍼렇게 중독되어 환하게 웃던 마지막 모습이 아닌, 말끔한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잠든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태수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요즘은 사비를 떠올리면 슬프기보다는 아련했다.
지금은 그냥 마음이 평화로웠다.
스스로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이 그만큼 많이 덜어졌단 의미였다.
이젠 사비를 떠올려도 슬픔을 지우기 위한 미소가 아니라 진심으로 밝게 웃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번이 끝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 많은 사비가 존재한다.
태수에겐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그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가 사비였다.
이후로도 또 다른 사비를 만들지 않을 거다.
자신의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환자를 떠나보내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 한 번 더 다짐했다.
그런 무기력함은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의 속죄가 아닌, 평생의 다짐을 안고 살아갈 터였다.
“그럼 또 웃어 주겠지.”
먼 훗날 다시 만날 사비에게 당당하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태수는 졸다 깨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졸다가도 번뜩 눈을 뜨고 ECG를 확인한 뒤 푸아드의 숨소리를 체크했다.
아무리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아직 독이 완전히 빠지지 않았기에 꾸준히 살펴보는 게 중요했다.
날이 서서히 밝아 올 시간이었지만 태수는 졸고 깨는 걸 반복하느라 그걸 인지할 틈도 없었다.
그렇게 좀 더 시간이 지날 때였다.
펄럭.
천막이 들춰지더니 서영우가 들어왔다.
그 자그마한 소리에 졸던 태수가 번뜩 눈을 떴다. 새벽에 헤어질 때보다 한결 안색이 좋아진 서영우를 보며 태수가 눈을 비볐다.
“누……. 흐음, 서 선생님.”
“얼굴이 완전히 맛이 갔네. 그러게 내가 본다니까.”
“괜찮습니다. 시간이……. 빨리 오셨네요.”
“더 놔뒀다가는 팀장을 수술해야 할 거 같아서. 그보다 이 사람들은 왜 안 들어와?”
서영우가 의미 모를 말을 하더니 들어온 입구를 한 번 더 펄럭거렸다.
“뭐 해?”
“갑니다.”
천막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두 사람이 나란히 들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앞선 사람은 정민수였고, 이선정 간호사가 뒤를 따라왔다.
두 사람도 밤을 새웠는지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들고 온 들것에는 어제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 아디언이 실려 있었다.
그 뒤를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김혁권이 접힌 테이블을 들고 들어왔다.
탁탁.
김혁권이 테이블을 빠르게 펴자 정민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아디언을 그 위에 올렸다.
준비된 ECG와 인공호흡기는 1대뿐이었기에 아디언의 몫은 없었다.
다행히 그런 의료기기는 필요 없었는지 정민수는 청진기로 간단하게 소리를 들었다.
태수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이선정 간호사가 다가왔다.
“한 곳에서 보는 게 저희도 그렇고, 아이들도 좋을 거 같아서요.”
“아, 그런 의미라면.”
“그리고…… 고생했어요.”
이선정 간호사는 따스한 얼굴로 다가와 태수를 가볍게 안았다.
그 포옹 속에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이선정 간호사가 사비의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오간 대화 중에 그 일이 빠졌단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태수를 포옹하며 위로하고 또 격려해 줬다.
그녀의 품은 따뜻했고, 또 포근했다.
태수도 이젠 부드럽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이선정 간호사와 긴 포옹을 마친 후였다.
어느새 청진을 마친 정민수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민수는 태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양팔을 벌렸다.
“이번에는 여기야.”
“뭐?”
“이리 와. 형이 한번 진하게 안아 줄게. 자식, 내 품이 후끈하니 좋다고.”
“…….”
정민수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자 가만히 바라보던 태수가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정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야지. 우리 태…….”
정민수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가까이 다가간 태수는 손부터 뻗었다.
퍽.
옆구리를 가볍게 후려치자 정민수의 얼굴이 진하게 일그러졌다.
“크윽! 야 인마.”
“때려 달라는 거 아니었어? 양팔 벌린 거 보고 샌드백 해 주는 줄 알았지.”
“너…… 너 나중에 두고 보자.”
“마음대로 하고. 아디언은 어때?”
태수가 중요한 문제로 넘어가자 정민수는 불만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똑같이 위기는 넘겼어. 그런데 새끼손가락이 좀 덜 움직일 거 같아.”
“그래?”
“그 정도면 진짜 양호한 거라고. 독이 손목 쪽으로 번져서 엄청 고생했다니까.”
“그랬겠지. 나도 봤으니까.”
태수의 인정에 정민수가 머쓱한 표정을 지우며 물었다.
“푸아드? 좌우간 얘는 어때?”
“일어나 봐야 알겠지만 재활이 문제지, 그 외에는 문제없어.”
“됐네. 그럼 됐어.”
정민수가 고개를 끄덕일 때 서영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감동적이긴 한데, 여긴 환자들 있으니까 나가서 하지그래? 지금부터는 내가 있을 거니까 나가라고.”
“제가 있겠습니다.”
“정 선생, 이상한 소리 말고 이 애들 부족으로 가서 보호자나 데려와.”
서영우가 가볍게 핀잔 주자 정민수가 멋쩍은 표정으로 변했다.
“진짜 제가 있으려고 했다니까요.”
“됐다니까. 다들 아주 얼굴이 떼꾼하니 보기 좋네. 자자, 어서 나가서 씻고 쉬세요.”
서영우는 재촉하다 못해 아예 손짓하며 밀어냈다.
그의 성화에 다들 쫓겨나듯이 수술 텐트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