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361
02364 2364화
아무리 예전에 감각이 있다고 해도 오랜만에 논일이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결국 넘어졌다.
퍽!
“으…….”
아픔은 없다.
다만 흙물이 전신에 튀어 찝찝했다.
이제 시작했는데 벌써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태수는 의기를 다지며 다시 걸었다.
푹.
“윽.”
퍽!
“아으!”
그렇게 몇 번이나 넘어지고야 태수는 겨우 논에서 걷는 방법을 다시 체득할 수 있었다.
걷는 게 익숙해진 태수는 바로 피를 뽑기 시작했다.
피란 벼에 영양분을 빼앗아 먹고 자라는 억센 풀을 의미했다.
잡초라서 생명력이 강해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
문제는 뿌리가 상당히 깊게 박혀 있단 점이었다.
“젠장. 오나가나 피 때문에 난리네.”
절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다행인 건 벼와 피를 구분할 눈은 있었다.
이 벼가 잘 자라야 맛있는 햅쌀을 먹을 수 있다.
그 생각으로 태수는 피를 뽑아 가며 전진했다.
뽑고 또 뽑고.
…….
“앗, 이건 벼……. 흠흠.”
가끔 실수하는 건 슬쩍 주변 눈치를 보며 다시 심고 모르는 척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두 번 손이 닿지 않게 피를 뿌리까지 뽑아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피를 뽑는 일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가 더 괴로웠다.
피를 뽑아내려 씨름을 하던 중이었다.
“윽!”
갑작스런 따끔한 통증에 얼른 손을 뺀 태수는 꺼먼 괴 생명체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거머리였다.
친환경적인 농법의 증거로 훌륭했다.
하지만 지금 태수에겐 자신의 피를 뽑아먹는 불청객일 뿐이었다.
“이 새끼……. 더럽게 안 떨어지네.”
철썩 달라붙은 거머리를 떼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게 태수의 전진을 막을 순 없었다.
거머리보다 무서운 건 아버지의 눈빛이다.
그 눈빛에서 자유롭기 위해선 거머리와 또 피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렇게 피를 뽑고 거머리를 떼어내며 논의 끝과 끝을 오갔다.
그사이 태수의 머릿속은 점점 하얗게 변해 갔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계속 허리를 구부려 등과 허리, 허벅지 뒤까지 당겨 왔다. 피를 뽑는 게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라 옥신각신해야 했다.
거기다 한 번씩 달라붙는 거머리를 떼어내기까지 했다.
겉에서 보기엔 한가로워 보일지 몰라도 논 속에선 태수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할 새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지,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지도 몰랐다.
그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했다.
한참 태수가 논 속에서 홀로 전쟁을 치를 때였다.
논두렁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저거 논 다 상하겠네.”
“피를 뽑으면서 왜 멀쩡한 벼를 밟아.”
“도시 촌놈이 왜 일한다고 들어가서 논을 망치냐고.”
익숙한 빈정거림들에 태수가 허리를 펴고 그쪽을 바라봤다.
역시나 이동훈과 송준호였다.
이동훈은 건들거리는 자세로 뚱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송준호는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고향을 지키고 발전에 이바지하는 친구들이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태수의 입에선 거친 소리부터 터져 나왔다.
“감시하러 왔냐?”
“아니. 놀러 왔는데.”
“이 자식들이. 형님 허리하고 다리 아프다. 냉큼 들어와서 좀 거들어.”
“싫은데.”
이동훈이 재밌단 얼굴로 삐쭉거렸다.
그 모습에 태수의 얼굴이 슬슬 벌겋게 달아올랐다.
“힘드니까 빨리 들어오라고.”
“싫다고.”
이동훈이 계속 놀리자 송준호가 순박한 얼굴로 얼른 끼어들었다.
“그만해. 태수야, 나와. 새참 먹어.”
“……막걸리 있냐?”
“필수지.”
“바로 갈게.”
풍덩, 풍덩.
태수는 새참이란 소리에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에 친구들이 걱정을 보였다.
“야야, 벼 밟지 말고!”
“옆으로 돌아오면 더 빨라.”
친구들이 계속 재밌단 얼굴로 훈수를 두자 태수가 버럭 소리쳤다.
“시끄러워!”
성질을 버럭 낸 태수가 마음 급하게 걸어가다 결국 넘어졌다.
철퍼덕!
“하하!”
“웃지 마!”
“하하하!”
태수가 넘어진 모습에 친구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곧 태수는 친구들과 논두렁에 둘러앉았다.
새참은 두부김치에 막걸리였다.
이동훈이 대접에 막걸리를 채워 주며 핀잔을 건넸다.
“맨날 피 막다가 피 뽑으려니 죽겠지?”
“내 말이. 내가 내 손으로 피를 뽑을 줄이야.”
“인생사 내일을 모르는 법.”
“개똥철학 넣어 두고 마시기나 해.”
턱.
태수가 가볍게 대접을 부딪치고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목으로 넘어가는 시원한 막걸리의 느낌이 속에서부터 찌릿하게 올라왔다.
“크아! 죽인다.”
“술 세다고 그렇게 마시다가 훅 간다.”
“안주도 먹을 거라고. 그런데 나 여기 있는 건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냐?”
“아니. 너 온 거 다 알아.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
마을에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병원은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그만큼 모두 오순도순 지내는 모양이었다.
태수가 당당하게 빈 대접을 내밀자 송준호가 막걸리를 채워 주며 물었다.
“갑자기 어떻게 내려온 거야?”
“잠깐 시간이 됐어. 오랜만에 쉬는데, 오랜만에 이러고 있다.”
“아버지 좀 도와 드리는 게 어때서.”
“다 좋은데 그냥 편하게 농작물 관리하며 사시라니까…….”
태수는 못내 앓는 소리를 삼켰다.
젊은 자신도 힘든 일인데 아버지는 오죽하실까 싶은 걱정이었다.
그때 이동훈이 흘겨보며 핀잔을 했다.
“너 그렇게 말하는 거 아냐.”
“뭘?”
“아는데, 우리 아버지들 연세에 일까지 놓으면 금방 늙어. 의사란 놈이 그것도 모르는 건 아닐 거고.”
이동훈의 말이 맞았다.
그래도 태수가 슬쩍 다른 불만을 토해 냈다.
“거머리는 또 뭐냐고, 요즘 시대에.”
“다 이 형님이 친환경 농법을 전파해 드려서 그런 거 아니냐. 이 논에도 생태계가 돌고 돌아야 벼가 건강하게 자라는 법이지.”
“그러다가 논문 쓰시겠다.”
“안 그래도 이번에 특허 출원도 했고, 농경대학에 가끔 강사로도 나가는데 학위나 하나 딸까 생각 중이야.”
이동훈의 말에 태수가 눈을 크게 떴다.
“강사?”
“동훈이가 개발한 친환경 농약이 인기야. 내 논도 생산량이 계속 늘고 있고.”
송준호가 덧붙여 말했다.
태수는 그런 설명을 들으며 이동훈을 향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이열, 우리 동훈이 잘나가네?”
“너만큼 잘나갈까.”
“그럼. 이 형님이 좀 잘나가시지.”
“띄워 준다고 바로 헬렐레 해서는. 저놈은 저래서 안 된다니까.”
이동훈이 시비를 걸자 태수가 바로 응수했다.
“어쭈? 오랜만에 한판 해?”
“어디서 형님한테 주먹질할 생각을. 이래뵈도 내가 너 학교 다닐 때 다 뒤 봐줬던 사람이야.”
“석기시대 얘기 하냐? 이 주먹이 그냥 주먹이 아니라 원 펀치 쓰리 강냉이는 기본인 주먹이야.”
태수가 주먹을 까딱거리며 농담을 건넸다.
고향 친구들과 함께라서 그런지 태수의 기분이 하늘 높이 붕 떠올라 있었다.
그런 태수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친구들 또한 수더분하게 받아쳤다.
“웃기고 있네.”
“이게 진짜 안 믿네. 기다려 봐. 한 잔 더 마시고…….”
“야야, 준호야, 막걸리 뺏어라. 너 더 마시면 뻗어, 인마.”
“나도 아는데 한 잔만 더 마시자. 야, 준호야, 한 잔만 더 하자고.”
태수가 부탁했지만 송준호는 사수한 막걸리를 내놓지 않았다.
“태수야, 더 마시면 안 돼.”
“……한 잔인데.”
“안 된다니까.”
송준호가 순수한 눈빛으로 걱정을 보이자 태수는 억지를 부리지 못했다.
“알았어. 그만 마셔.”
“자, 그럼 일어나자.”
“도와주나?”
태수가 기대를 가득 보인 순간 친구들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도 할 일 해야지.”
강경한 친구들의 반응에 태수의 기대가 푹 꺼졌다.
“그래. 가라, 이 매정한 놈들아.”
“실망하는 척하지 말고. 해 지기 전에 끝내자.”
반전 어린 이동훈의 말에 태수의 눈빛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정말?”
“너 하는 꼴을 보니까 올해 너네 집 햅쌀 못 먹을 거 같아서 돕는 거니까 나중에 이자 쳐서 갚아.”
“그럼요, 형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논까지 카펫이라도 깔까요?”
태수의 넉살에 한껏 물이 올랐다.
그만큼 기분 좋아진 마음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친구들끼리 매번 하는 장난이라 스스럼도 없었다.
물론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좀 깔아 보든가.”
“뭘 또 깔라고 하냐. 어서 들어가자.”
“저 자식은 하여간……. 준호야, 가자.”
“응. 가.”
이동훈에 이어 송준호도 바로 태수의 뒤를 따라 논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피 뽑기를 하는데 그 속도는 태수 혼자 할 때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역시 프로는 프로들이었다.
슥. 슥.
그냥 걸어가다 허리 한 번 숙였다가 펴는데 피가 뿌리까지 뽑혀 올라왔다.
태수가 실수로 넘어뜨린 벼도 빳빳하게 일으켜 세웠다.
지금도 가끔 휘청거리는 태수와 달리 안방을 걷듯 걸음걸이도 자연스러웠다.
태수는 엄지를 내밀어 감탄했다.
“대박.”
“니네 집 논이거든요. 빨리하시죠, 최 팀장님.”
“알았다고. 잔소리는.”
태수는 친구들과 달리 어설프게 손을 놀렸다.
피만 뽑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 흠뻑 빠진 태수는 어느새 걸음도 안정되고 피를 뽑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렇게 예전 감각을 되찾아갔지만, 정작 태수는 대화에 정신이 팔려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어렸을 땐 이것도 놀이였다.
하교하고 서로의 논에 쪼르르 들어가 누가 더 피를 많이 뽑나 내기한 적도 많았다.
세 친구들은 그때 그 시절처럼 웃고 떠들며 즐겁게 일을 이어 갔다.
그런 태수와 친구들을 멀리서 바라보던 아버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껌껌해진 밤.
태수는 농업용수를 받아 놓은 저수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낚싯대가 드리워져 있고 그 옆엔 아버지가 함께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낚싯대를 바라보다 태수를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왜 똥 씹은 얼굴이야?”
“저 진짜 낚시 좋아하는데 오늘은 아닙니다. 삭신이 쑤신다고요.”
“젊은 놈이 그거 하고 앓는 소리를 하냐.”
“하던 일이 아니니까요. 안 쓰던 근육만 써서 온몸이 아우성칩니다.”
“그럼 이번 기회에 쓰는 거지. 네놈이 떠드니까 안 잡히잖아.”
아버지의 타박에 태수는 뚱한 얼굴로 반박했다.
“여기서 뭘 잡으신다고.”
“어허.”
“…….”
침묵만이 태수가 무사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내 태수도 불만을 삼키며 낚싯대를 바라봤다.
고향에 돌아와 한껏 들떴던 마음이 이제야 좀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태수는 꼭 바다낚시만 선호하는 건 아니었다.
이런 한적한 시간을 더 좋아했다.
거기에 아버지와 함께하는 낚시라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힐끔, 힐끔.
태수가 곁눈질하자 그 시선을 느꼈는지 아버지가 물었다.
“왜 또?”
“아버지랑 이렇게 같이 낚싯대 드리울 줄은 몰랐어서요. 낚시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네놈 어려선 여유가 없었지.”
“그런 거 보면 참 신기하네요. 전 제가 낚시를 왜 좋아하는지 몰랐거든요.”
태수의 반격을 아버지가 가볍게 제압했다.
“거 녀석. 조용히 좀 하라니까.”
“…….”
아버지의 타박에 태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투정도 잠시였다.
정말 마음 놓고 낚시에만 몰두했다.
밤이 더 깊어져 가던 중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낚시만 이어 가던 태수는 머릿속에 다시 산재한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번 머리를 비워서 그런지 뭔가 정리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