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78
00281 281화
그 후에야 백성현 교수는 하석준 과장에게 다가갔다.
“하도 가르친 게 없어서 고생시켜드리는 제가 더 죄송하지요.”
“무슨 말씀을요. 최 선생과 정 선생 없으면 저희 외과 안 굴러갑니다.”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보다 이른 시간에 어쩐 일로.”
백성현 교수가 계속 되는 인사를 뒤로 하고 본론을 물었다.
하석준 과장도 그게 좋았는지 이렇게 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제가 모셔다 드리려고 합니다.”
“네?”
“가시죠.”
하석준 과장은 직접 차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 모습에 백성현 교수가 당황했다.
“아니,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택시 타면 편하게 가는데요.”
“집 주인이 되어서 손님 대접을 그렇게 하면 욕먹습니다. 오늘은 제가 모실 영광을 주시지요.”
“이거 이러면 제가 더 부담이 큽니다.”
“아닙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편안하게 오르시면 됩니다.”
하석준 과장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 뒤로 옥신각신하며 두 사람은 대립했다.
지켜보는 태수와 정민수, 박성민도 입맛만 다실뿐이었다.
하석준 과장을 만류할 수도 없고, 백성현 교수에게 편안하게 타고가라 이야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세 사람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결론이 났다.
백성현 교수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신세 좀 지겠습니다.”
“당연하신 말씀을. 자, 이쪽으로.”
하석준 과장의 권유에 백성현 교수는 세 사람에게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탁.
문을 닫은 하석준 과장이 태수에게 말했다.
“치프. 회진은 오재욱 선생과 송 선생에게 맡겼으니까 치프랑 정 선생도 쉬어.”
“그래도 이거…….”
“됐어. 더 말하지 말고. 가서 쉬라고.”
다소 딱딱한 명령조의 목소리다.
그만큼 태수와 정민수를 향한 걱정을 보였다.
더 거절하기는 솔직히 너무 피곤했다.
“감사합니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인데 무슨, 그럼 오후에 보자고.”
인사를 마친 하석준 과장은 바로 운전석에 올라 차를 몰고 멀어져 갔다.
부웅.
곧 하석준 과장의 차가 정문에서 사라지자 박성민이 한마디 했다.
“이런 전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저희도 그렇습니다.”
“니들은 좋겠다. 세상에 저런 과장님이 어디 있어?”
“그럼 흉부외과장님에게 한 번 말씀드려 볼까요? 좀 변하시라고요.”
태수의 말에 박성민이 식겁했다.
“하여간 이 새끼는 말을 못해. 하암. 졸립다. SICU 들어갔다가 잘 거니까 나중에 봐.”
박성민은 무슨 말이 또 나올까봐 억지 하품을 하고 얼른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남은 태수와 정민수가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분이야.”
“멋지기도 하고. 그보다 안 들어가냐?”
“먼저 들어가. 곧 들어갈게.”
태수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정민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던가. 먼저 간다.”
그렇게 정민수도 병원으로 쏙 들어갔다.
혼자 남은 태수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야기하는 사이 해가 더욱 떠올랐는지 아침이다.
문득 김덕현을 붙잡고 안도의 울음을 터뜨리던 김수진 간호사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쳤다.
김덕현도 끝까지 딸을 위해 끝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었으리라.
그렇게 부정에 대해 생각하던 태수에게도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에 들어온 후로 거의 얼굴을 못 뵌 게 왠지 가슴을 아려왔다.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야 한다는 걸 태수도 알고 있다.
태수는 더 생각하지 않고 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뚜루루.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다 곧 통화가 연결됐다.
“왜?”
무뚝뚝한 목소리.
아버지였다.
태수는 그 건강한 목소리에 괜스레 마음이 울컥했다.
“그냥요.”
“싱거운 놈.”
서로 오가는 대화가 투박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쉽게 전화를 끊지는 않았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 무뚝뚝했기에 대화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런데 전화를 끊지는 않았다.
그때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밤 샜냐?”
“네.”
“적당히 해라.”
“네.”
그 대답과 동시에 또 침묵이다.
그 후로도 태수와 아버지는 그렇게 간간히 짧게 묻고 대답하며 평소보다 훨씬 오랫동안 통화했다.
***
아침나절에야 잠든 태수는 오후 늦게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태수가 향한 곳은 SICU(흉부외과 중환자실)였다.
보호자 면회가 막 끝난 걸까?
SICU 앞에 여러 보호자가 자리하고 있다.
태수가 그 사이를 지나가려던 중이었다.
“선생님.”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김수진 간호사였다.
그녀는 태수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잰걸음으로 다가와 그대로 태수를 끌어안았다.
와락!
얼마나 강한 힘으로 끌어안는지, 태수의 허리가 저릿할 정도였다.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보호자들이 수군거렸다.
“어머, 둘이 무슨 사이인가 봐.”
“의사하고 간호사면 계속 붙어 있으니까 그럴만도 하지.”
“그래도 여기서 저러는 건 좀 그렇다.”
보호자들의 속삭임에 태수는 당황했다.
“아니, 김수진 간호사.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곤란하다니까 뭐가 고마워요. 좀 놓으라고요.”
태수가 밀어내려 했지만 김수진 간호사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너무 황당한 상황에 갈피를 못 잡던 중이다.
태수의 앞에 김수진 간호사 어머니가 다가와 섰다.
현재 상황은?
태수는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당황했다.
“어머님. 이건 그러니까…….”
태수가 얼른 변명하려는 사이였다.
꾸벅.
김수진 간호사 어머니가 깊게 고개 숙였다.
한참 동안 그렇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든 김수진 간호사 어머니의 눈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갈팡질팡하던 태수도 그제야 차분한 얼굴로 깊게 고개 숙여 보였다.
“예상외로 절제부위가 많았습니다. 앞으로 식사량이 많이 줄어드실겁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살려만 주신 것만 해도……”
김수진 간호사 어머니의 진심어린 인사였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이 흘렀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태수는 SICU에 들어섰다.
다가가자 이미 깨어나 있던 김덕현이 태수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미 착용 중인 인공호흡기로 힘겹게 손을 가져가려 했다.
태수가 바로 만류했다.
“아직 벗으시면 안 됩니다.”
절레절레.
김덕현이 강하게 거부했다.
그렇다고 인공호흡기를 벗길 수는 없었다.
인공심폐기에 오랫동안 의지하고 있었기에 컨디션이 최악일 게 뻔했다.
하지만 기어코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어떤 말인지 짐작한 태수가 선수 쳤다.
“이미 밖에서 많이 인사 받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버님까지 그러시면 저 진짜 그냥 돌아갈 겁니다.”
태수의 말에 김덕현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태수는 얼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중에. 어떤 말도 퇴원하실 때까지는 하지 마세요. 아직 끝난 건 아니니까요.”
태수는 다소 차갑게 말했다.
물론 태수의 말이 옳다.
체력을 충분히 회복한 후 기계판막을 조직판막으로 바꾸는 수술도 해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크론병의 재발과 합병증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 모든 게 끝나기 전까지는 장담할 수 없다.
김덕현도 자신의 상황을 흉부외과장과 하석준 과장을 통해 들었기에 침묵했다.
그러던 김덕현이 태수를 향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손짓이라기보다 까딱거리는 수준이다.
그것도 지금은 힘을 다해야 한다는 걸 태수도 알고 있다.
먼저 입을 막아놨는데도 이렇게 부른다는 건 정말 할 말이 있다는 이야기다.
못 이기는 척 태수가 귀를 인공호흡기 가까이에 댔다.
태수의 귀에 가득 쉬어 있는 김덕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다른 얘기인데요. 아마 수술…… 중이었을 겁니다.”
“혹시 깨어나셨던 겁니까?”
태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마취 중 각성.
awareness during general anesthesia.
의학사전에도 명시되어 있는 증상이다.
가끔 학회에 보고되는 미스터리한 경우들이었다.
마취의의 잘못은 아니다.
환자가 너무도 긴장한 상태로 수술을 받으면 깊은 마취 중에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국내외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경우라 전문가들이 연구를 진행하는 부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태수가 식겁한 얼굴로 바라봤지만 김덕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아닌 거…… 같아요. 그냥 설핏…… 말들이 들려온 거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검사를 요청해 놓겠습니다.”
“그보다…… 그때 뭔가 느껴지더군요.”
“무슨 말을 들으셨길래요.”
태수가 심각한 얼굴로 묻자 김덕현은 힘겹게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 습니다. 소리가 너무 울렸다는…… 거 외에는요. 그런데 한 가지는…… 기억납니다.”
“그게 뭔지요?”
“절대…… 절대 이대로 가면…… 안 되겠구나. 다들 저렇게 노력…… 해 주시는데, 내가 더 힘을 내야겠구나.”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김덕현 목소리에 태수 목이 절로 메었다.
그랬구나.
그 소리를 들었기에 김덕현이 힘을 냈다.
태수 가슴이 뭉클할 무렵 김덕현이 이어서 말했다.
“아마…… 그 소리를 들어서……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래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정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요.”
누워 있는 김덕현의 말에 태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의료진만 필사적인 게 아니었다.
김덕현 또한 죽음의 문턱에서 스스로 의지를 불태웠다.
턱없이 낮은 성공 확률을 뒤집은 건 그 때문이리라.
태수는 이제야 알게 된 김덕현의 속사정에 마음이 찡하니 울렸다.
태수가 얼른 몸을 바르게 세우고 한마디 했다.
“저도 감사합니다. 너무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게…… 무슨.”
“제가 의사로서 이렇게 굳건히 서 있을 수 있게 힘써 주셔서요. 백번 아니, 천번 인사를 드려도 모자랍니다.”
태수는 그 말을 끝으로 깊게 고개 숙였다.
김덕현은 태수의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도 힘든 상황이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그건 좋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의사 정신으로 상태 확인 좀 하겠습니다.”
흉부외과에서 기입해 둔 차트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혹시 추가할 게 있는지도 확실히 살폈다.
태수는 그러면서 생각했다.
병은 그 어떤 사람도 가리지 않는다.
중요한 건 스스로 낫겠다는 의지다.
그걸 김덕현이 보여줬다.
의술이라는 게 꼭 의사의 실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마음을 열고 병을 향해 같이 싸워가는 것.
그게 바로 의술이다.
***
태수의 수술 성공 소식은 이미 병원 전역에 퍼져 있었다.
“성공이라…….”
“이거 기쁘긴 기쁜데…….”
“흐음…….”
반대했던 의사들의 표정이 묘했다.
수술의 성공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수술의 성공을 축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태수다 보니 축하의 마음이 앞서지 못했다.
이번 수술을 성공시킴으로써 태수의 입지가 올라갈 거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서울 유명 병원에서도 거부한 수술을 성공시킨 레지던트.
현재까지는 병원에서 쉬쉬하고 있다지만 이게 언제 어떻게 발산될지를 예측할 수가 없다.
그리고 레지던트보다도 못한 전문의라는 시선이 싫었다.
태수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그 때문이었다.
한편 석정현 이사장과 병원장의 대화 분위기는 좋았다.
“그래. 최 선생이 결국 이렇게 크게 한 건 해줄 줄 알았어.”
“정말 특이한 케이스를 잘 수술했습니다.”
“그나저나 다른 의사 반응은 어떻다고?”
석정현이 이사장이 궁금한 걸 묻자 병원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복잡한 모양입니다. 대놓고 좋아하기에는 너무 격하게 반대했으니까요.”
“혼쭐이 나고 있는 모양이야.”
“어떤 상황으로 번질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최 선생과 부딪치진 않으려고 할 겁니다. 명분이 없으니까요.”
병원장의 말에 석정현 이사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그보다 아까 뭘 따로 준비하라고 했던 거 같던데 말이야.”
“하석준 과장에게 이번 사례에 대해서 최 선생과 정리해서 학회에 보고할 준비를 하라고 오더를 내렸습니다.”
“학회에? 그건 안 돼.”
석정현 이사장이 브레이크를 걸자 병원장이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비상사태 때도 일부러 알리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알리는 게 말이 되나? 우리 쪽으로 완전히 묶어 둔 후에 진행해도 늦지 않아.”
“그래도 이런 케이스는 학회에 발표해야 한국 의료계에도 도움이 됩니다.”
병원장이 의외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