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863
02867 2867화
그 순간 뜨끔한 태수가 얼른 말했다.
“울었습니다. 펑펑.”
“……끝이에요?”
“아, 내과…… 김아름 선생, 췌장 기능 보조할 약들 투여 시작해. 서 선생님은 마취과장님과 통화 되셨습니까? 그리고…….”
태수가 의과별로 찾아가며 진행할 처치를 알렸다.
그 앞에 선 이선정 간호사는 괜히 소외감 느낀 뚱한 얼굴로 변했다.
그때 태수가 이선정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간호사님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 주셔야 합니다.”
“……뭔지 들어 보고요.”
“정말 중요한 건데요. 제가 진짜 이 일은 이 간호사님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뭐…… 뭔데요?”
이선정 간호사가 삐쭉거리면서도 슬쩍 관심을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태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환자 식사요. 잣죽, 전복죽, 어떤 죽이라도 좋으니까 영양 가득 가득인 걸로 매일 여섯 끼 이상 먹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보고 지금 죽 쑤라고요?”
“아니요. 직접 할 건 아니고요. 저기 시내 가면 죽집 있습니다. 끼니마다 배달해 주시면 됩니다.”
태수가 진지하게 오더했다.
이선정 간호사는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런 그녀에게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자식 중요하죠. 정말 중요한데요…… 난 왜 갑자기 화가 날까요?”
“그러게요. 왤까요?”
“뭐요?”
휙!
이선정 간호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노려보는 눈빛이 예술이었다.
태수의 강심장도 들썩이게 했다.
바로 누나의 눈빛이다.
걸리면 국물도 없을 눈빛에 태수는 얼른 변명부터 했다.
“저, 저기, 진짜 중요한 오더였는데요.”
“그 전에요……. 제가 물었던 말은 다 어디다가 팔아 드셨는데요.”
“여기저기 오더했으니까 당연히…….”
“다 좋은데, 대답 한마디가 어려우셨던 건 아니잖아요. 초등학교 도덕 시간에 분명히 누가 물어보면 대답하라고 배우셨을 텐데요.”
이선정 간호사의 스산한 말투를 곱씹던 태수가 누군가와 오버랩 되자 진짜 움찔거렸다.
“누, 누나다. 똑같다.”
“뭐라고요?”
“아니요. 아닙니다. 앞으로 더 대답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그런데 저기…….”
태수의 말에 이선정 간호사가 더 날카롭게 째려봤다.
“왜요?”
“이따가 죽 사러 가실 때 시간 되시면 빵도 좀 부탁드린다고요. 피자빵은 빼고요.”
“그래요. 빵 사다 드리는 게 뭐가 어렵다고요. 그런데 팀장님…… 죽하고 빵하고 합치면 뭘까요?”
“죽하고 빵이요? 죽……. 윽! 전, 전 바빠서 이만.”
태수가 얼른 돌아서자 이선정 간호사가 주먹을 휘휘 돌리며 으르렁거렸다.
“지금 죽하고 빵이 딱 제 손에 있는데 어디 가세요. 팀장님, 여기 죽하고 빵 있다니까요!”
“나, 나중에 먹을게요!”
타다닥.
태수는 잰걸음으로 저만치 멀어져 갔다.
그런 태수의 반응을 지켜본 모두가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나 참. 하하.”
“뭐야, 어이없는 놈.”
“에휴, 이래서 웃는다, 이래서 웃어.”
“그래, 웃자!”
긴장감 가득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려 갔다.
주먹을 돌리며 위협하던 이선정 간호사도 어느새 다정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어휴, 하여간 우리 팀장님은 내 성질 긁는 데 도사야, 도사.”
매번 도망갈 걸 알면서 속을 긁은 태수가 웃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또 매번 당하고야 놀림 받았단 걸 눈치채는 자신도 신기했다.
다들 웃음이 피어날 때였다.
박성민이 슬쩍 김혁권에게 접근해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나는 치킨, 족발, 떡볶이, 탕수육 좀 부탁합시다.”
“……뭐래.”
“어어? 아저씨, 그냥 가면 어쩌라고……. 아저씨, 좀 서 봐요. 내가 치킨 다리 하나는 드릴게! 진짜 줄게요!”
박성민이 뚱하니 멀어져가는 김혁권의 뒤를 쫓았다.
저만큼 걸어간 두 사람이 끝내 말싸움을 하는 모양이었다.
태수의 뒷모습에 미소 짓던 모두는 어느새 어이없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망친 태수는 그길로 진료실에 들어왔다.
문을 닫기 전에 뒤를 확인하는 건 필수였다.
“후!”
이선정 간호사가 보이지 않은 걸 확인하고야 긴장을 스르륵 풀었다.
의도하는 건 아닌데도 매번 놀리는 게 되어 버리는 상황이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걸 즐기는 건지도.
미소 지으며 창가로 향한 태수가 창밖을 바라봤다.
한층 차분해진 표정으로 변한 태수는 이내 쓴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봉연수는 결국 예상대로 결심했다.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인내심과 독기를 이젠 더 강하게 보여 줄 터였다.
결심을 보인 그녀가 처음으로 한 행동이 아직 눈에 아른거렸다.
배를 내려다보고 또 부드럽게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아가야, 우리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어요.
그때 그녀의 입가에 세상 가장 행복하고 설레는 미소가 저절로 생겨났다.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모든 건 안중에 없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짧게 회상한 태수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정말 뭐가 사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숨을 쉰다고 살아 있음을 정의 내릴 수 없단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
정신이 확 든 태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들어오세요.”
끼익.
문이 열리자 태수는 얼른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이 깨끗해 뒤까지 선명하게 비친 탓이다.
그렇게 누가 들어오는지 힐끔거리던 태수가 멈칫했다.
진료실 문이 반쯤 열리고 김은영의 얼굴이 비치고 있어서였다.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정작 찾아온 김은영이 더 망설임 가득한 얼굴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갸웃거린 태수는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차 한잔할까 해서.”
슬쩍 들어 올린 쟁반에 머그컵 2개가 놓여 있었다.
태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 좋지. 들어와.”
태수의 허락이 떨어지고야 김은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곧 태수와 김은영은 나란히 창문 앞에 머그컵을 들고 서 있었다.
태수가 무심코 차를 한 모금 마시다 눈썹을 가볍게 들썩였다.
“코코아네?”
“머리 아플 텐데, 단 게 좋을 거 같아서.”
김은영의 목소리가 편안하게 흘러나왔다.
공적으로는 존대, 사적으로는 반말.
지금은 사적인 시간이라 편하게 말하는 듯했다.
태수는 수시로 변하는 말투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머리 뽀개질 땐 당분이 최고지. 굿 초이스였어.”
“그렇게 말해 주니까 고맙고.”
“고맙기는……. 그런데 어째 요즘 조용하다?”
태수가 말끝만 올려 묻자 김은영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가?”
“…….”
“나?”
“그럼 누가 있어?”
태수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라고 표현했다.
김은영은 굳이 둘러보진 않았지만 의아함은 여전히 계속됐다.
“조용하다는 건 무슨 뜻이야?”
“그냥 조용하다는 뜻이야.”
“나 원래 조용해.”
그 소리에 태수가 머그컵을 입으로 가져가다 웃음이 훅 치고 올라와 얼른 내렸다.
“풋! 마시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뭐가?”
“……됐다. 그보다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태수는 사례 들리지 않은 자신의 순발력에 감사하며 물었다.
그냥 가벼운 질문이었다.
그런데 김은영은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았다.
곧 창문으로 김은영의 입이 열리는 모습이 비쳤다.
“앞으로도 연수 씨 같은 환자들이 많이 찾아오겠지?”
“아마도.”
“그분들이 원하는 희망이라는 게 뭘까?”
“……그때 가 봐야 알겠지.”
태수의 대답은 조금 무성의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말이 정답이었다.
김은영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나 지금 나름 진지해.”
“나도 건성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왜 그분들의 희망이 궁금해진 건데?”
“그분들 틈에 내 희망 하나 숨겨 둬도 될까 해서.”
잦아드는 목소리에 이번엔 태수가 힐끔 쳐다봤다.
“어떤 희망?”
“내 친구처럼 허망하게 가지 않게, 또 송 선생처럼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되지 않게…… 그렇게 내가 도움이 되게 해 달란 희망.”
“은영아, 민규는…….”
태수가 말하려는 순간 김은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먼저 말했다.
“알아, 나 원망 안 했다는 거. 나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 네가 말해 줬어.”
“……그랬지.”
“그런데 난 그때 아무것도 못한 내가 너무도 한심스러워. 배운 거 다 까먹고, 발만 동동 구른 날 지워 버리고 싶어.”
진심이다.
맹세코 마음에서 우러나온 한마디였다.
김은영의 진심을 들은 태수가 그저 신음만 토해냈다.
“음.”
“고 선생님이 했다던 말대로, 환자가 자신의 의지로 눈을 감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주면서…… 그러면서 조금씩 갚아 가려고. 나 이기적이지?”
김은영이 쓰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태수는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이기적이지 않아. 어디의 누구 씨도 그랬어. 누군가가 누구 씨 앞에서 죽어 가는데…… 심지어 그 사람은 초면인데…… 아무것도 못하고 떠나보냈거든.”
“누구? 민수? 아니면 김 간호사님? 아니면 박 선배?”
“뭐, 대충.”
태수는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음……”
김은영이 계속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태수는 더 해 줄 말이 있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가 하나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있어.”
“어?”
“민규 말이야…….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어. 너도 너 아픈 거 모르고 지혈제 뿌리고 붕대로 감고…… 곁에서 지켜 줬어.”
“…….”
김은영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변했다.
정말 그때 기억이 흐릿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태수가 위로하려 꺼내는 말이 아니라고 믿고 기억을 되짚고 있었다.
그때 태수가 김은영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워.”
“……응?”
“고마워. 그때 네가 응급처치해 줘서 민규랑 인사할 수 있었어.”
“…….”
“인사도 못했다면 글쎄……. 난 아마 수술실로 민규를 호출한 날 평생 원망하고 살았을 거야.”
“……”
그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태수가 한마디 덧붙여 말했다.
“마음이 좀 더 정리되면…… 어머니 한번 찾아가 봐.”
“…….”
“은근히 네 소식도 묻고, 그러면서 기다리시더라. 마음 편할 때 밥 한 끼 먹여 주고 싶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고.”
“……흐음.”
김은영의 어깨가 살짝 떨려 왔다.
태수는 쓰게 미소 지으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희망병원이 환자만을 위한 병원은 아닌 거 같아.”
“……흑.”
“울긴 뭘 울어……. 거참.”
툴툴거린 태수는 못 이기는 척 어깨를 내밀었다. 그러자 눈물을 훔치던 김은영이 태수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소리 죽여 울었다.
“흐윽…… 흑.”
“다 큰 애가……. 아니지. 어른이……. 쯧.”
그 마음이 어떤지 태수도 알기에 안쓰러워했다.
태수의 시선은 어느새 창밖으로 향했다.
그냥 저 멀리에 시선을 둔 채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그날부터 희망병원의 불은 24시간 꺼지지 않았다.
긴급 소집으로 모였지만 환자를 마주한 순간부터 개원이라 여겼다.
-1명의 환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
희망병원의 근본이 되는 말이다.
그저 보기 좋은 문구가 아니었다.
모두의 마음이 담긴 결심이고, 그걸 행동으로 증명해 보였다.
우선 의료진들은 최대한 외출을 자제했다.
음주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리한 모든 의사들은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 낮밤 가리지 않고 노력했다.
전문 분야가 아니란 핑계로 선을 긋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익히고 배워 온 경험을 토대로 도움이 될 방법을 연구했다.
그런 모습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변화도 있었다.
바로 휴대폰으로 타국의 의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부분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등 국적과 병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했다.
전에 없던 교류가 활성화 된 건 역시 NGO 심포지엄의 역할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