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89
00292 292화
그 중심은 정민수에게 두면서도 교묘하게 하석준 과장과 태수까지 싸잡아 욕하는 분위기로 몰아갔다.
정민수는 더는 그 비난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은 옳다.
그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외과 전체가 싸잡아 욕먹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특히나 태수가 욕먹는 건 그 무엇보다 싫었다.
‘내가 한 번 숙이자.’
그러면 된다.
자신은 징계를 받을지라도 태수와 외과는 이 소나기를 피해갈 수 있다.
마음속으로 결정을 굳힌 정민수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꽈악.
태수의 손이 정민수 손을 꽉 잡았다.
움찔한 정민수가 힐끔 태수를 쳐다봤다.
태수의 두 눈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또한 태수는 눈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그 시선의 끝은 단연 하석준 과장이었다.
태수의 눈짓대로 하석준 과장의 표정을 확인한 정민수의 눈빛이 살짝 떨려왔다.
하석준 과장 또한 태수와 마찬가지도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태수가 정민수의 허벅지를 툭 건드렸다.
“……!”
정민수는 태수가 원하는 걸 바로 알아챘다.
‘네 생각대로 해.’
이젠 태수도 이런 반복되는 상황에 질린 모양이다.
가끔 둘이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런 시스템이 가끔은 질려.’
‘우리가 너무 밖에 오래 있었나?’
‘그게 무슨 잘못은 아니잖아. 진짜 한 번 더 수틀리면 그땐 내질러 버리자.’
그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친 순간이었다.
정민수의 흔들리던 눈빛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야 하는 건 정확한 상황 설명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그들에게 제대로 된 정황을 알려주고 싶었다.
스스로 떳떳하다.
그렇기에 고개 숙일 이유도 없었다.
어느새 굳어진 정민수는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왜? 무슨 할 말 있나?”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다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정민수의 차분한 물음에 산부인과 과장의 눈빛이 살짝 굳어졌다.
곧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그래, 변명이라도 실컷 해봐.”
“사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 산모가 병원에 실려 온…….”
정민수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 뒤로 정민수는 더하고 빼는 거 없이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산부인과 과장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산부인과 치프에게 따로 들었던 이야기와 똑같았던 탓이다.
그래도 절차상 정민수가 잘못했단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산부인과 과장이 다시 마음을 다잡는 사이 정민수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병원장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정 선생.”
“네, 병원장님.”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스스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내 생각이 맞나?”
“네.”
정민수가 딱 잘라 대답하자 병원장은 이어서 물었다.
“만약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때도 그렇게 할 건가?”
어딘지 무심한 듯한 병원장의 표정은 묘한 위화감을 형성했다.
그러나 정민수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렇게 할 겁니다.”
“그게 병원의 기강을 뒤흔드는 일이라도?”
“환자의 생명보다 중요한 병원 기강은 없습니다.”
정민수는 자기 생각에 확신을 보였다.
병원장이 잠시 생각할 때였다.
태수가 그런 병원장을 조용히 불렀다.
“병원장님.”
“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태수의 질문에 병원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봐.”
“먼저 과장님들께 여쭙겠습니다. 환자가 죽었습니까? 아니면 태아가 죽었습니까?”
“…….”
병원장뿐이 아니라 다른 의과장들도 침묵했다.
태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 걸 눈치채고 이어서 말했다.
“만약 정 선생이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죽었을 겁니다.”
“그건 결과론 아닌가? 막상 검사를 하고 난 후에 수술을 해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내과장의 반박하자 태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결과론에 대해서 이야기하신다면, 그 결과는 이제 곧 보고받으실 겁니다.”
“…….”
“저희가 무턱대고 수술실로 밀고 들어간 건 아닙니다. 외국에서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이었고, 그때 안타까운 일도 경험해 봤습니다.”
“그래서?”
내과장 눈빛은 싸늘했지만 태수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지금 이런 자리도 산모와 태아가 무사하기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음.”
“만약 저와 정 선생이 잘못한 게 있다면 좀 더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1분이라도 더 빠르게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상입니다.”
태수는 마지막까지 차분하게 할 말을 마쳤다.
이렇게 되니 상황이 묘하게 변했다.
당장 정민수에게 어떤 징계를 내리기가 모호해졌다.
이 상황이 병원 외부로 알려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넘어가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과장들은 계속 불쾌한 시선들이다.
하나 더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침묵으로 이젠 따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판단한 병원장이 말했다.
“일단 두 사람은 돌아가도록 해.”
태수와 정민수는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회의실을 나갔다.
텅.
회의실 문이 닫힌 순간이었다.
복도에 선 태수가 정민수를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
정민수도 똑같이 웃으며 주먹을 마주쳤다.
턱!
그리고 어깨동무를 한 두 친구는 나란히 의국으로 향했다.
태수와 정민수를 내보낸 후 과장 회의는 다시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그 상황을 방치하는 게 옳았다는 겁니까?”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모두 문제가 없는 데 왜 우리만 문제가 되어야 합니까. 과정이 과격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다급한 상황에 설득할 정신이 있는 게 더 이상합니다.”
하석준 과장과 박완용 과장, 거기에 흉부외과장도 지원에 나섰다.
흉부외과장은 침착한 성격이다.
그래서 태수와 정민수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일부러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당사자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하석준 과장을 도와 지원사격에 나섰다.
반면 내과장과 산부인과 과장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건 두 과장뿐이 아니라, 정형외과나 비뇨기과 등 대부분의 과장이 함께 힘을 더해줬다.
거의 모든 의과가 정민수의 문책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결과가 쉽게 나오진 않았다.
아침까지 길게 이어진 회의는 끝을 맺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그리고 병원장은 숨길 수 없는 문제였기에 바로 석정현 이사장에게 보고했다.
석정현 이사장은 모든 정황을 들어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정말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뭐가 문제지?”
“…….”
“사람이 죽어 가는데 각종 검사를 꼭 해야 하나?”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정민수 선생이 조희성 선생의 멱살을 잡았다는 겁니다.”
병원장이 요점을 다시 이야기했지만 석정현 이사장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다.
“조희성 선생이 먼저 잡았다며?”
“네.”
“전문의는 레지던트 멱살 먼저 잡아도 되나?”
“그건……”
병원장이 쩔쩔매자 석정현 이사장 목소리에 살짝 분노가 걸렸다.
“환자를 가족과 같이. 그 말은 그냥 액자에 걸어놓으라는 말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말에 빗대어 보면 정민수 선생은 환자를 가족과 같이 대한 거 아닌가? 오히려 조희성 선생이 남같이 대한 거 같은데 말이야.”
“그건…….”
병원장은 쉽게 말하지 못했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입장을 분명히 하기에 스스로도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던 탓이다.
병원장의 침묵에 석정현 이사장은 소파에 깊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얼마나 많은 의사를 다시 채용해야 하나.”
“…….”
“스카우트 비용 최대한 확보해 줄테니 마음껏 해보게나.”
석정현 이사장은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그런 석정현 이사장의 입장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병원장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반면 각 의과의 과장은 이번 일을 결코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건 레지던트가 전문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이다.
그동안 외과에서 다양한 성과를 낸 건 그들도 좋았다.
외과가 유명해지면 덩달아 병원도 유명세를 탄다. 그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다른 질환 환자들도 늘게 마련이었다.
그로 이해 다른 의과들도 좋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건 그거와 전혀 다른 문제다.
또 그 이야기를 들은 전문의들도 같은 생각이다.
각 의과 과장은 생각을 같이하는 전문의들에게 오더를 내렸다.
“외과가 먼저 고개 숙일 때까지 먼저 다가가지 마라.”
전문의들은 당연히 환영했다.
이번 기회에 기고만장한 외과의 콧대를 꺾자는 생각들로 똘똘 뭉쳤다.
막상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인 태수와 정민수는 주변에서 돌아가는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두 사람뿐이 아니라 외과 전체가 같은 생각이었다.
이미 태수와 정민수에게 물들어버린 외과 전문의들과 레지던트들은 그 행동들을 옹호했다.
외과는 주변 의과 반응과 상관없이 단합했다.
다만 아직도 변화한 외과에 적응하지 못한 박수철은 돌아가는 상황을 방관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외과를 지지하는 전문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박완용 과장, 흉부외과장, 박성민, 그리고 서영우.
그 외에 몇몇 전문의, 그리고 피가 끓는 레지던트들과 인턴들이다.
그런 반면 간호사들은 대부분 외과의 편이었다.
특히나 외과 간호사들과 응급실 간호사들, 수술실 간호사들은 절대적이었다.
그 외에 타 의과 간호사들도 표현하진 않았지만 은연중 외과를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동성종합병원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두 세력은 겉으로 내보이지 않지만 속으로는 끊임없는 경계를 이어갔다.
두 세력 간에 묘한 대치가 이어지던 중이다.
병원의 옥상에 두 사람이 자리했다.
평소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박성민과 김혁권이 그 주인공이었다.
김혁권이 먼저 박성민에게 물었다.
“뭐 예쁜 얼굴이라고 옥상까지 불러냈습니까?”
“아저씨 얼굴 예뻐서 보자고 생각했어요? 나 참. 이거 어이가 하늘을 찌르네.”
“그럼 왜 불렀냐고.”
김혁권이 툴툴거리자 박성민은 삐쭉거렸다.
“내 후배들 걱정돼서 얼굴 좀 보자고 했수다. 왜, 불만이야?”
“후.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김혁권이 말을 끊자 박성민이 물었다.
“뭐요?”
“이 병원 의사들 말이야. 다 정신 상태가 썩어 빠졌어. 특히 당신!”
“나? 난 왜? 지금 내가 내 후배들 걱정돼서 당신 부른 거라니까.”
“이렇게 우리 둘이 대가리 맞대고 있다고 뭐가 달라져? 그것도 지금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냐고.”
김혁권이 가차 없이 쏘아붙이자 박성민도 울컥했다.
“이 아저씨야. 그러니까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고 부른 거잖아.”
“뭐 생각한 건 있어?”
“내가 돈을 좀 모아놓은 게 있어. 진짜 쥐뿔도 안 되는데, 시골에 자그마한 의원하나 차릴 정도는 돼.”
박성민의 말에 김혁권은 어이없이 바라봤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수틀리면 다 같이 짐 싸들고 내려가자고.”
“나도?”
“그래, 아저씨도. 내가 아저씨는 진짜 얼굴도 보기 싫은데, 태수하고 민수가 좋아하니까 데려가겠다고. 당신도 돈 벌어야 한다며.”
울컥한 박성민이 소리쳤지만 김혁권은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됐으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때려치워요.”
“뭐요? 아, 진짜 이 아저씨가 성깔 나오게 하네. 그래도 미운 정이라도 생겨서 좀 도와주려고 했더니.”
“박 선생.”
김혁권이 툭하니 말을 던지자 박성민이 발끈했다.
“아, 왜 불러!”
“지금 닥터 최하고 닥터 정이 외국행 비행기만 타도 한 달에 당신 반년 수입보다 많이 벌 겁니다.”
“…….”
“나 참, 그것도 생각이라고 하고 있으니. 쯧쯧.”
김혁권이 혀를 차자 민망해진 박성민이 자그맣게 툴툴거렸다.
“그럼 지는 뭐 생각이나 있나, 먼 산 바라보면서.”
“난 어떻게든 결판이 났으면 하고 지켜보는 거요. 빨리 결판이 나면 우리야 자유의 몸이 되겠지만.”
“그런데 김 씨 아저씨.”
“왜요? 박 씨 선생.”
김혁권이 퉁명하게 받아치자 박성민은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