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826
00829 829화
태수와 정관영, 그리고 고석범과 그의 아내까지.
그렇게 네 사람은 정관영의 차에 올라 대전으로 향했다.
강원도 인제에서 대전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바로 수술에 들어갈 걸 감안해서 태수와 정관영은 교대로 운전했다.
그래도 이동 시간은 3시간이 넘었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질 때 즈음에야 정관영의 차가 신속대응센터에 들어섰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태수가 모두에게 인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이고, 삭신이야.”
다들 앓는 소리를 내자 태수는 웃어 보였다.
솔직히 너무 먼 거리였다.
그렇게 차에서 내린 순간이었다.
에에엥!
사이렌 소리가 울리더니 구급차 한 대가 쏜살같이 응급실 앞으로 향했다.
그에 맞춰 응급실에서 의료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위치 잡아!”
“교통사고라니까 바로 확인하고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해.”
의료진들은 태수에게도 익숙한 얼굴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충 들려오는 소리만 들어봐도 환자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근무 교대가 되었는지 중환자 전담 5팀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곧 구급차에서 환자가 실린 스트레쳐카가 내려졌다.
몇 가지 확인을 마친 의료진들이 크게 소리쳤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
“IV, 인공호흡기 준비하고, 수술실 연락해.”
“어서 가자!”
드르륵.
스트레쳐카와 의료진들이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가고 응급실 입구는 다시 한산해졌다.
오랜만에 열정적인 의사들의 모습을 보자 태수도 피가 끓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태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관영에게로 향했다.
정관영 또한 그들에게 온통 시선이 빼앗긴 모습이다.
가쁜 호흡.
제자리를 찾아온 듯한 정관영의 모습에 태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태수는 정관영과 고석범과 아내를 응급실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가시죠.”
“그러자고.”
수술을 받게 될 고석범이 오히려 거침없이 걸어갔다.
오히려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는 정관영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가득했다.
태수는 신경 쓰지 않고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 환자들이 치료와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사이를 의료진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태수는 익숙한 풍경 속을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주변에 아는 의료진들이 보이면 먼저 인사했다.
“저 왔습니다.”
태수의 인사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머, 최 선생님!”
“최 선생이 왔다고?”
그 소리에 환자를 보고 있지 않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앞다투어 주위에 몰려들었다.
“언제 왔어?”
“무슨 일이야?”
정겨운 목소리들에 태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병원에 의사가 왜 옵니까? 환자가 있어서 왔습니다.”
“이젠 원정 환자도 데리고 다녀?”
허물없는 농담에 태수가 그저 웃었다.
반면, 정관영은 응급실에 들어오자 무언가 또 한 번 감회가 새로운 표정이었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우선 경상자 전담팀 쪽에 있는 빈 병상에 멈춰 서며 고석범에게 말했다.
“여기 누우시면 됩니다.”
“잠시만요!”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드르륵!
스트레쳐카 소리까지.
태수가 시선을 돌려 보자 홍진만이 달려오고 있었다.
“거기 누우면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홍 선생.”
태수가 멈칫하는 사이 어느새 홍진만이 다가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강선호와 조현정 간호사도 다가왔다.
홍진만은 태수를 바라보고 인사하려다 정관영을 발견하고 크게 움찔했다.
“정관영 선배님?”
홍진만뿐만이 아니라 강선호와 조현정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이상해질 조짐을 보이자 태수는 서둘러 목소리를 높였다.
“홍 선생, 뭐가 우선이지?”
태수의 따가운 목소리에 홍진만이 바로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환자분은…….”
“남자분. 여기 진료 기록.”
“인계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고석범 환자분, 이쪽으로 누우시면 됩니다.”
홍진만은 정관영의 등장에 얼마나 놀랐는지 특유의 깐족거림도 사라진 모습이었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고석범에게 말했다.
“여기 누우시면 진짜 환자가 되는 겁니다. 아셨죠, 환자분?”
“나 참. 알았다니까.”
“기본적인 조치를 하고 안정을 취하신 후에 수술 들어갈 겁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태수는 고석범을 홍진만에게 인계했다.
“그럼 잘 부탁해.”
“걱정 마십시오. 그런데……. 아닙니다.”
“그보다 퇴근 안 했어?”
“마지막 수술이 아직 안 끝나서요. 선배님 오신다는 말씀도 있어서 응급실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건 땡큐. 그럼 나중에 봐.”
홍진만은 고석범을 스트레쳐카에 뉘이고 강선호, 조현정 간호사와 함께 멀어져 갔다. 물론 보호자도 함께였다.
태수는 정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쟤들이라면 확실하게 수술 준비를 할 겁니다. 우리는 우선 팀장님께 인사부터 드려야 순서인 거 같아서요.”
“그건 그렇지.”
“그럼 가시죠.”
태수가 미련 없이 돌아서서 걸어가자 정관영은 발걸음이 무거운지 천천히 뒤를 따랐다.
이상하게 정관영의 걸음걸이가 자꾸만 뒤로 처졌다. 반갑게 만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태수도 정관영의 갈등하는 마음을 알지만 재촉하거나 멈춰서진 않았다.
그렇게 팀장 진료실 앞에 도착했다.
그 옆에 있는 간호사실에서 수간호사가 쌜쭉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주 오신다더니, 너무 얼굴 안 보여 주시는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호호. 최 선생님이라면 그러실 만도 하죠. 그런데 옆에……. 어머.”
수간호사가 정관영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관영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대충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못난 사람.”
“…….”
“선생님은…… 진짜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정관영을 바라보는 수간호사의 눈빛이 처연했다.
역시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지만 태수는 묻지 않고 그저 지켜봤다.
정관영은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저 죄송합니다.”
“이제 다시 돌아오시는 거예요?”
“아뇨. 제 환자 수술 때문에 왔습니다.”
“……알았어요. 기별 넣을 테니까 들어가세요.”
수간호사는 애써 덤덤하게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미미하게 떨리는 손길까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태수는 더욱 궁금해졌다.
아마 하석준 팀장과 만나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수간호사가 태수에게 말했다.
“들어오시래요. 그런데 팀장님은 모르시는 거 같던데요. 최 선생님이 데려온 어시스던트도 같이 왔냐고 물으셨어요.”
“깜짝 선물인데, 좋아하실까 모르겠습니다.”
“그건 들어가시면 아시겠죠.”
“그러네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선배님, 들어가시죠.”
태수가 안내하자 정관영은 거의 떠밀리다시피 진료실 문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진료실 문을 연 태수가 먼저 들어갔다.
이미 소식을 들은 하석준 팀장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언제나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그때 하석준 팀장이 의아하게 물었다.
“우리 이야기는 좀 미루고, 같이 온 어시스던트는 어디 있나?”
“아직도 안 들어오셨네요. 선배님.”
태수가 뒤를 돌아보며 말하자 하석준 팀장은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열린 문틈으로 정관영이 쭈뼛거리며 들어온 순간 하석준 팀장의 눈이 더없이 크게 떠졌다.
“정…… 관영 선생?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저에게 먼저 연락 주셨습니다.”
태수가 대답했지만 하석준 팀장은 들리지 않는지 터벅터벅 정관영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말했다.
“이 사람.”
“죄송합니다, 과장…… 아니 팀장님.”
정관영이 사과하는 사이였다.
덥석.
하석준 팀장이 정관영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렇게 얼굴 봤으니까 됐어. 됐다고.”
“흐으윽.”
“나이가 몇인데 눈물 짜고 있어. 참 못났다, 못났어.”
타박하면서도 하석준 팀장은 정관영의 등을 연신 다독였다.
뭔가 있다.
분명히 있다.
태수는 눈빛을 살짝 빛냈다.
몇 년 만에 이뤄진 재회를 지켜보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짠했다.
잠시 후, 하석준 팀장과 태수, 정관영이 응접 소파에 자리했다.
하석준 팀장의 시선은 정관영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반면 정관영은 죄인이라도 된 듯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석준 팀장은 이내 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정은 들었나?”
“아니요.”
“안 물어봤어?”
“언젠가 알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태수는 그러면서도 끝까지 묻지 않았다. 그런 진중한 태수의 모습에 하석준 팀장은 더욱 그를 신뢰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더니 하석준 팀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하긴 지난 일 이야기해서 뭐해. 좌우간 최 선생이 이렇게 데려왔으니까 된 거야. 최 선생이 수고했어.”
“아닙니다. 마침 환자가 있어서 기회가 좋았던 거죠.”
“아, 그래. 환자가 있다고 했지?”
“홍 선생이 기본 검사 하고 있을 겁니다.”
태수의 대답에 하석준 팀장은 정관영을 눈짓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놀랐겠어.”
“그런 거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환자 상태는?”
하석준 팀장도 환자에 대한 걱정을 우선시했다.
태수도 마찬가지였기에 바로 환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섰다.
“liver hemangioma(간혈관종)입니다.”
“그건 아까 말했잖아. 위치와 크기는 어떻지?”
“대략적으로…….”
태수는 직접 검사하고 MRI로 파악한 부분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하석준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시스던트는 정 선생이 들어간다고?”
“그렇습니다.”
“그 정도야 가뿐하게 해내겠지.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수술 후에 하고, 이제 일어나라고. 좀 쉬었다가 수술해야지.”
“네, 준비하겠습니다.”
태수가 일어나자 정관영도 같이 일어났다.
바로 돌아서는 태수와 달리 정관영은 머뭇거리더니 하석준 팀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하석준 팀장은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어제도 오늘도 근무했던 것처럼 정관영을 편안하게 대했다.
그런 수더분한 모습이 하석준 팀장의 최고 장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정관영도 한결 표정이 가벼워졌다.
팀장실을 나선 태수와 정관영은 그길로 수술 대기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가면서도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했다.
“최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저야 물론. 그런데 간호사님은 얼굴이 더 좋아지신 거 같습니다.”
“살쪘다고요?”
“어떻게 그렇게 들으십니까? 좋아지셨다고요.”
정관영을 모르는 의료진과의 대화는 태수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런 의료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정관영을 알고 있는 의료진을 만나기도 했다.
“어, 정관영 선생?”
“안녕하십니까.”
“그래. 어…… 안녕.”
어색한 인사가 오간 후, 인사한 의사 시선이 태수에게로 향했다.
그동안 사연을 전혀 모르는 태수 입장에선 대답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웃기만 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후에야 태수와 정관영은 수술 대기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으며 태수가 먼저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뭐가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벌인 일이잖아.”
“또 제가 잘못한 겁니까?”
“계속 네가 잘못했어.”
정관영은 태수를 타박했다.
그렇다고 그를 원망하는 건 아닌 눈치였다. 어쩌면 용기를 내지 못한 자신을 이렇게 이끌어 준 태수를 고맙게 여기는 듯했다.
다만 고맙다는 말을 직접 하지 못해 더욱 퉁명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태수도 눈치를 챘기에 억울함은 없었다.
“일단 좀 쉬시죠.”
“그래야지.”
꽈악.
정관영은 말과 달리 양손을 깍지 끼며 힘을 줬다. 오랜만에 들어가게 될 수술에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망가진 않았다.
태수는 그런 정관영을 뒤로하고 잠깐 눈을 감았다.
언제 부를지 몰라도 일단 좀 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