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 * *
호란이 단을 보고 걱정했다.
“단, 괜찮아? 머리 아프지 않아?”
“괜찮아….”
단은 대답하고 한숨을 쉬었다. 또 말투를 실수했다.
자기가 더 여기 앉아 있어 봐야 얻을 게 없었다.
단은 자리에서 일어서 대청으로 나왔다.
시현이 있는 방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그 방에 붙은 작은 방으로 향했다.
호란이 따라오면서 물었다.
“쉴래? 잘 거 아니면 내가 같이 있을까?”
“아니. 좀 혼자 있을게…. 넌 저 자식이나 지켜보고 있어.”
“물은? 먹을 거는?”
“지금은 됐어.”
“아프면 꼭 말해. 내가 좀 있다 와볼게.”
호란은 끝까지 걱정하는 말을 하고 원래 방으로 돌아갔다.
작은 방에 들어간 단은 방문을 닫고 서서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아직 새벽이라 방 안은 침침했다.
감정 상하면 몸에 좋지 않다고 했지. 가진 건 몸뚱이뿐인데 몸이라도 사려야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단은 벽을 짚고 허리를 구부렸다. 소리는 죽였어도 끝도 없이 웃음이 새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 미친. 주인 복. 주인 복을 누린단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완씨 시문 밑에서 총애를 받고 주인 복을 누린다고.
이제 와 그딴 걸 누리려고 그동안 이 지랄 같은 목숨을 붙여 놓고 있었다.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큰방과 이어지는 장지문이 열렸다.
하필이면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 왜 혼자 그러고 있느냐. 아직 새벽인데 더 쉬지 않고.”
문간에 시현이 서 있었다. 그새 번듯하게 의복 갖춰 입은 꼴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단은 가슴을 누르며 얼굴을 피했다.
“단?”
장지를 닫은 시현이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며 몇 걸음을 딛었다.
단은 내버려 두고 가라고 말하려고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말이 목구멍에서 콱 걸렸다.
대신에 속에서 뭐가 열화같이 치받았다.
묵은 분노들이 순식간에 끌려올라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핏발 선 단의 눈과 시선이 마주친 시현이 퍼뜩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가 장지문에 등을 대고 긴장한 소리로 말했다.
“안 된다. 때리지 마라.”
누가 때린대?! 단은 고함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팔자 좋은 애새끼가, 그거 툭 건드린 걸 아직까지 징징대고 자빠졌어. 언제 적 일을 갖고.
화가 끝도 없이 밀고 올라왔다. 단은 혈압이 올라 핑 도는 머리를 싸쥐고 벽에 기댔다.
입을 열면 악을 쓰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속으로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눈치 좀 보고 알아서 꺼져줘. 한 번만이라도 제발.
물론 그게 되면 우리 시문 나리가 아니었다.
기척이 곁으로 다가왔다.
“단, 지금 넌 제 상태가 아니다. 의법술로 급히 회복한 후유증으로 머리에 혈기가 뻗친 거다. 흥분할수록 몸이 상한다. 마음을 가라앉혀라.”
바로 곁에서 시현이 말했다.
침착을 꾸며낸 목소리에 담긴 두려움, 염려, 다정이 차례로 단의 속을 할퀴었다.
“윽.”
단은 허덕이며 신음했다. 두통으로 눈앞이 점멸했다.
그는 눈을 꽉 감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타일렀다.
아니야. 내가 화낼 상대는 쟤가 아니야. 내가 미워하는 건 쟤가 아니야. 쟤는… 그냥 애새끼잖아.
그것도 아주 착한 애새끼지. 나 같은 것도 똑같은 사람 목숨이라고 소중하게 주워담아 주시는.
하지만 감정을 다스리려 할수록 안에서는 다른 소리가 치밀어올랐다.
정말로? 정말로 미워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다 놓고 다 포기하고, 미워하는 것까지 그만두면 나한테 뭐가 남는데?
여정이 길어질수록, 함께 지낸 시간이 쌓여갈수록 단은 시현을 계속 미워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미워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완씨 시문은 그냥 땅인 한 명이 아니었다.
그는 힘의 유무로 위아래를 가르는 신분 질서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땅인들은 완씨 시문 한 명에게 머리 숙이고 복종함으로써 다른 모두를 짓밟을 명분을 굳혔다.
시현을 모두의 위로 떠받드는 바로 그 손이 단을 밑바닥으로 처박았다.
시현이 경배받고 군림하는 바로 그 논리로 단은 가진 것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빼앗겼다.
시현의 곁에 머무르는 매일 매 순간, 반민 하늘인은 물론이고 그 유세부리는 땅인들이 시현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꼴을 볼 때마다 단은 그것을 뼈에 에는 것처럼 느꼈다.
미워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이 인간은 어찌나 악질인지 그걸 그냥 미워하게 놔두지조차 않았다.
시현이 순전한 선의로 단에게 해준 일들, 그를 존중하려는 노력, 조용히 보내오는 호의. 그렇게 쌓여가는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단은 갑갑하고 속이 막혔다.
그건 전부 채무였다. 단의 주제로는 상환할 가망도 없었다.
차라리 손발을 묶어서 가둬주는 쪽이 고마울 것 같았다.
“단, 정신 차려라!”
더 못 버티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단을 시현의 두 손이 부축해왔다.
걱정으로 황급해진 목소리에 속이 콱 뒤틀렸다. 단은 팔을 휘둘러 뿌리쳤다.
거친 서슬에 거의 얻어맞을 뻔한 시현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호란이… 호란이 불러줘….”
꽉 막히는 목을 움켜쥐며 단이 겨우 말했다.
이대로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칠 것 같았다.
시현은 몸을 돌려 달려나갔다. 곧 호란과 열이 뛰어왔다.
* * *
단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훤했다. 오전도 중간이었다.
“단! 괜찮아?”
눈 뜨자마자 붙어 앉은 호란과 눈이 마주친 단은 허탈하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너는 내 옆이 아니라 나리님 곁에를 붙어 있으라고….”
“단은 아프잖아. 시문 님도 단 옆에 있어주랬어. 물 마실래?”
단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까와는 달리 머릿속이 깨끗하고 맑았다.
주체가 안 되게 들끓던 울화도 간 데가 없었다.
의식에서 장막이 치워진 기분이었다.
그가 물잔을 받아들며 호란에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됐었어?”
“머리 아프다는 말만 계속 하다가 기절했었어. 숨도 제대로 못 쉬었어. 진짜 깜짝 놀랐어….”
“지금은 아주 괜찮은데. 머리도 전혀 안 아프고.”
호란이 밝은 얼굴을 했다.
“침 맞은 게 효과 있나 보다. 다행이야. 열이가 의원 불러줬었거든. 잘 하는 사람 같더라.”
의원까지 왔다 갔냐. 시문은 그걸 또 불러오라고 놔뒀고?
단은 실소했다. 세상에 속 좋은 인간들밖에 없고 저만 독하고 저만 날선 놈이었다.
그는 베개맡에서 안경을 집어 걸치며 어제 일들을 더듬었다.
머리가 맑아지니 그제야 좀 상황이 보였다.
괜히 새벽에 일어나서 헛소리 하고 성질 부리고 다닌 생각을 하니 좀 탈출하고 싶었다. 수면부족이 이렇게 무서웠다.
내가 시문한테 뭐 이상한 소리 안 했지? 눈만 조금 부라린 거 맞지?
기억을 점검한 단은 자리를 걷고 일어났다.
그가 방을 나서려 하자 호란이 졸졸 따라오며 말했다.
“열이한테 내가 진짜 많이 화냈어. 열이가 사과한댔어.”
방 밖에서는 아까부터 금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문을 여니 열이 넓은 대청에 앉아 반주 없이 금을 뜯고 있었다.
단을 본 그가 무릎에서 악기를 치우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열의 얼굴은 평소대로 차분할 뿐 이렇다 할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읽을 것도 없기는 했다. 진짜로 별 감정이 없을 테니까.
단이 툭 말을 던졌다.
“그래서, 뭐 보고할 만한 건 건졌습니까?”
“예?”
열이 모르는 척을 했다. 단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새벽에 그거, 시문 나리님이 왜 그렇게까지 날 싸고돌았는지 알려던 거잖아요.
나를 깎아내리면서 성질 끝까지 긁어 놓으면, 나든 호란이든 둘 중 하나는 내가 진짜로 무슨 역할 하는 사람인지 흘리겠다 싶었겠지. 호란이가 뭐라던가요? 이거다 싶은 거는 없었을 텐데.”
열은 얼굴의 미소를 깊게 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단이 마주 웃었다.
“댁 뒤에 있는 어르신이 총치신지 다른 뉘신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그런 걸 궁금해 하는 걸 보면 다짜고짜 사람 목 따고 싶어 하는 부류는 아닐 거 같네요. 나리님의 약점을 캐고 싶어 한다 해도 최소한 5년보다는 뒤까지 생각하는 거겠지요. 간밤에도 아무 일 없었고.
알겠습니다. 당장은 믿겠습니다. 그리고 뭐 먹을 거라도 주세요. 아침 때를 놓쳤더니 속이 휑하네.”
열이 곱고 사근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쪽이 믿어주는 게 뭐라고 그렇게 대단하신 얼굴로 말하는지? 알아서 찾아 먹어요. 부엌에 뭐 있겠지.”
단은 납득하고 대청을 내려섰다.
과연 예인으로 유명한 하유관에서도 으뜸가는 절기셨다.
대화를 듣던 호란이 뒤에서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그런 거였어…. 그냥 물어봐도 말해줄 텐데, 왜….”
단이 신을 꿰며 핀잔했다.
“넌 지금 세작 앞에서 세작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말을 하고 있어. 그리고 물어본다고 아무거나 대답하면 안 돼.”
“나도 아무거나 말하진 않아! 하지만 단이 대단한 사람인 건 비밀이 아니잖아? 조금만 보면 누구든지 알아, 그런 거!”
열이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았다. 단은 서둘러 부엌으로 탈출했다.
열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부엌에 가보니 한 사람 몫 밥상이 잘 차려진 채 보자기에 덮여 있었다.
식사하고 씻기를 마친 단은 도로 대청에 갔다.
열은 여전히 금을 타고 있었고 호란은 대청 끝에 앉아서 행복한 얼굴로 소리를 듣는 중이었다.
단이 물었다.
“왜 이렇게 팔자가 좋아? 나리님은?”
“시문 님은 계속 책상 앞에 있어. 단 아픈 거 아니면 방해하지 말랬어.”
“아직도?”
단은 미간을 좁히고 닫힌 방문을 보았다.
지금 상황에 서신 몇 장 써서 해결될 일이 있나. 격문 같은 걸 돌릴 것도 아니고.
정말 설마라고는 생각하지만 혹시 책을 읽고 있다면 죽이고 도망가는 것밖에 수가 없었다.
“밖에 있느냐. 다들 들어오너라. 열도 오거라.”
단의 속을 읽은 것처럼 방 안에서 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들어가니 시현은 서안을 옆으로 밀어두고 정면을 향해 앉아 있었다.
쓰던 것을 다 마무리한 듯 두터운 봉서가 앞에 놓여 있었다.
시현이 단을 보고 물었다.
“좀 괜찮아졌느냐.”
“네. 두통이 깨끗이 가셨습니다. 의원 덕을 봤나 봅니다.”
“그럴 것이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왔던 이가 겉보기는 반민 의원처럼 꾸몄지만 내기를 읽어내는 것을 보니 격에 달한 양생법사였다. 정성 들여 기혈을 가다듬어준 것 같으니 앞으로는 괜찮을 것이다.”
단과 호란이 열을 쳐다보았다.
열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시현이 열에게 물었다.
“너를 이 일에 쓰고 있는 이는 휘무겠지.”
“그것은 감히 제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열이 조용하게 답했다. 시현이 다시 말했다.
“휘무라면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도 내가 너를 믿길 원할 것이다.”
“저는 손발입니다. 감히 주인의 뜻을 짐작할 수 없습니다.”
열은 완고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신세 의탁한 사람으로서 부탁을 하나 하겠다.”
시현이 제 앞에 둔 봉서를 두 손으로 열 앞에 밀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