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425
수염을 깎다, 여중생을 줍다 (2)
“흠흠흠.”
이른 아침 부르는 상큼한 콧노래.
-사각.
면도칼로 턱에 난 수염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깎았다.
몸이 커지면서 호르몬에도 변화가 생겼는지 확실히 예전보다 수염이 나기는 한다.
‘티가 많이 나는 건 아니지만.’
전전대의 천마나 검성. 그런 괴팍한 노인들의 인상이 되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 젊다.
거울에 비치는 멀끔해진 턱을 본 나는, 손으로 한 번 턱을 쓸어내리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아침 세수를 하고 건물을 나와 내 땅을 밟는다.
폐허 속 광장에는 2주 전쯤에 주워온 노예들이 모여 있었다.
“자.”
건성으로 손을 꺾으며 적당한 바위에 주저앉았다.
일단 왕으로 통하는 만큼, 이 구역에선 공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나다.
밥을 퍼주고, 일을 시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노예들의 눈매엔 경계심이 여전했다.
당연했다.
노예들의 입장에서 나는, 자기들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상인들을 단칼에 죽여버린 새 주인이었으므로.
그래도 짧은 시간이지만 배불리 먹고 자면서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았다면, 만족한다.
신뢰는 나중에 사도 좋은 거니까.
“다 모았어?”
정장 차림의 구슬이 하품을 하며 설렁설렁 걸어왔다.
나에 비하면 꽤 고운 노예들의 시선이 구슬을 향했다.
“비서라는 년이 왕보다 늦게 오냐?”
“…젊은 꼰대.”
이것 봐라.
그래도 그동안 해준 일이 있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인력이 부족한 탓에 당장 노예들을 돌봐준 사람이 바로 구슬이었으니까.
“걔 없던데.”
“뭐, 누구?”
“까만 애.”
내 옆에 선 구슬이 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까만 애라고 하면, 그때 그 아이.
“도망친 거야?”
“그래보이는데. 잡을 거야?”
“일단은 냅둬. 자기 알아서 살겠지.”
까만 애…. 대충 깜둥이라 이름 짓기로 했다.
깜둥이는 2주가 되는 기간 동안 아주 극소량의 식사만을 할 뿐, 나와는 말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푹 패인 볼과 앙상한 두 팔과 두 다리를 보면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이 가지만.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살려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호의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가 뒤통수 맞은 게 한 두번이 아니었겠지.”
구슬의 말이 맞다. 그래서 깜둥이가 도망친 거다.
“…그 깜둥이라는 호칭 좀 그렇지 않아?”
“깜둥이가 뭐 어때서. 귀여운데. 아무튼, 걔 하나 때문에 시간을 쓰기는 너무 아까워.”
손을 들어 박수를 두어번 쳤다.
-짝짝.
주의가 모임과 동시에 노예들이 어깨를 떨었다.
개중에는 나와 말을 섞었던 남자애도 보였고, 단상 위에 올라가 있었던 육감적인 몸을 가진 여성체의 나무도 보였다.
목소리를 키워 저 뒤의 노예들까지 듣도록 소리쳤다.
“주목해라.”
헛숨을 삼키는 노예들.
“너희들이 어떻게, 무슨 연유로 노예가 됐는지는 모른다.”
소통의 오류가 없도록 내 옆에 선 구슬이 각 국의 언어로 통역했다.
대다수는 중국어였지만 드문드문 한국어를 사용하는 녀석도 있었고, 유럽에서 건너온 놈들도 있어 보이니까.
번역기가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우리 형편에는 불가능하다.
돈도 없고, 그만한 신용도 없었다.
나는 우선 이 자리에서의 위치. 왕이라는 존재임을 말함과 동시에 이 근방의 사정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플라워의 여덟 번째 잎새의 세력권은 유렵 일부 지역을 걸쳐, 이곳 중국 남부의 광둥성까지 위치 한다.
중국 내에서 가장 높은 인구 밀도를 자랑하던 이곳은 게이트와 던전의 발발로 폐허가 되었고.
공장은 무너져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개발이 가능한 자원과 던전은 충분하다.’
이곳은 플라워의 세력권임과 동시에 세계수의 세력권에 희미하게 걸쳐져 있다.
세력 다툼이 잦기는 하지만, 내가 직접 통수권을 쥠으로써 교전은 사라졌다.
이 땅을 계륵으로 여긴 세계수나 플라워는 손을 뗀 상태.
이 구역의 빈민 구제에 나선 사람이 나였고.
왕 역시 나였다.
“불우하게 노예가 된 너희들은 당장이라도 고향을 찾아가고 싶겠지만. 불가능하다.”
끽해야 노예로 잠시 여기 머문 녀석들에게 인력을 배치할 여유가 없을뿐더러.
그럴 이유도 없다.
한 번 노예가 되었던 녀석들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나는 손을 모으며 좌중을 눈으로 쓸었다.
무겁게 울린 목소리에 구슬이 잠시 말을 절었다가, 통역했다.
“지금 당장 고향을 찾아 가고 싶다는 녀석이 있다면, 여길 떠나도 좋다.”
단 지원은 할 수 없다.
그 정도의 선택권은 줄 수 있다.
“하지만, 국가가 가라앉은 지금 이 중국에 멀쩡히 고향으로 돌아갈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사실상 노예를 해방하겠다던 내 말에 활짝 얼굴을 핀 녀석들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들었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칠 것 같던 이들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고향에 보내주세요.
그런 염치없는 말을 하는 녀석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전전긍긍하던 걸 유심히 지켜본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남고자 한다면 일을 주마.”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할 수 있다.
도시 계획을 가속화해야한다.
백이 넘는 노예들에게 퍼져나간 내 말이, 좌중을 압도했다.
“불합리한 처우는 없을 거고. 도시가 세워지고 대륙에 규칙이 자리 잡으면. 안전하게 고향에 돌아가게 해주지.”
동기 부여.
내가 직접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화두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마력을 흘려넣지 않아도 된다.
그런 걸 신경 쓸 시절은 지났다.
내 말에는 곧 무게가 담기기 마련이었고.
한 번 추락한 녀석들을 휘감싸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감화는 아닐지라도, 내 말을 알아먹은 노예들은 있었다.
구슬이 마침 다른 부하에게 명령하자, 노예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굳이 직접 나설 필요가 있었어?”
“효과가 다르니까.”
내가 직접 말하지 않았다면 도망칠 녀석들이 있었겠지.
한두명이 도망치는 순간 노예들의 탈출은 급속화될 거다.
“노예는 노예로 다루면 될 텐데.”
신분의 제한은 걸지 않는 편이 좋다.
굴복시키고 따르게 하는 건 분명 쉽다.
그러나 인간과 목인의 차별을 없애자는 작자가 노예를 다룰 수는 없는 법이다.
“반발력이 있을 거야. 처음부터 지킬 건 지켜야지.”
쉬쉬하던 일도 두고 보지 않는다.
싸그리 갈아 엎고, 불안은 없애야 했다.
이 극단적인 방식은 부작용을 부르겠지만. 그렇다고 뜻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힘이 있으니, 힘을 써야했다.
“내 일은 끝났다. 나머진 알아서 해라.”
바위에서 엉덩이를 뗀 뒤, 몸을 풀며 움직일 준비를 했다.
“어디 가?”
따라붙은 구슬이 음흉하게 웃었다.
“깜둥이 찾으러가게?”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본다.
“바쁘다면서.”
“…….”
“프히히히. 지가 알아서 살겠다면서, 걱정됐어? 걱정됐네. 내가 그럴 줄 알-”
신경에 거슬리기에 꼬집었다.
주로 가슴 중앙에 위치한 그쪽 부분을.
“-앗, 악!!!! 떨어져, 떨어진다니까!!”
시비를 걸 때마다 가학심이 드는 건 왜일까.
아카데미 시절에 내가 워낙 많이 당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런 거지.
가슴 한쪽을 쥐고 눈물을 훔치는 구슬을 보며 생각했다.
애는 입이 방정이었다.
* * * * * * * * *
‘하이고 저것 봐라.’
얼마 멀리 가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은 정말 귀신같게도 맞아떨어진다.
‘죽도 제대로 안 먹던데. 뛸 힘이 있을 리가 없지.’
게이트가 터지고 던전이 솟은 바람에 도로에는 가끔씩 마물이 튀어나온다.
어쩌다 운 좋게 마물을 만나지 않더라도, 노예상 내지 헌터를 만나게 되있다.
헌터들도 노예상이나 크게 다를 것 없어, 워낙 근방의 치안이 좋지 않아 여자들은 엄한 꼴을 당하기 일쑤다.
노예들이 고향을 찾아 떠나는 걸 일찌감치 포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헉, 헉, 헉헉!
고블린 몇 마리에 쫓기는 녀석을 보며 나는 손을 풀었다.
-윽!
다리를 넘으려고 해도 그 앞에 누가 쳤는지 모를 바리게이트가 있다.
다리 중앙을 막는 버스와, 넘어가지 못하도록 나무로 만든 방패막들.
당황한 녀석이 텅 빈 버스의 창문을 잡고 뛰어넘으려다, 깨진 유리에 손이 베었다.
콰당.
넘어진 녀석이 떨리는 동공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쫓아오는 마물들.
아픔을 감수하고 기어코 버스 창문을 잡고 넘어서려는데.
상처가 더 심해지면 죽을 거다.
“키이이익!”
쫓아오는 고블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력을 담아 길게 뻗어 나간 검이 뼈와 살을 가르고, 깜둥이의 직전까지 다다랐다 멈추었다.
“킥?”
“켁?!”
한 마리, 두 마리.
차례차례 회 뜨듯 썰어 넘기니, 버스를 넘어가려던 깜둥이가 잔뜩 긴장해선 나를 지켜보았다.
나와 대화를 그렇게 꺼리던 녀석인데, 말을 거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위협을 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접근했다.
가까워질수록 눈에 보이는 상처와, 가느다란 팔 다리.
세상이 얼마나 망가졌으면 이런 애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싶다.
“……”
버스에 바짝 등을 붙이고 나를 경계하던 녀석이, 체력이 다했는지 바닥에 넘어졌다.
쌕쌕거리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다.
나는 발치에 누워있는 아이를 보곤 무릎을 꿇었다.
“괜찮냐? 깜둥아?”
툭 던지며 녀석의 손을 잡았다.
색이 옅은 피가 배어나온다.
치유의 권능을 조금 일으켜 상처부위를 쓰다듬으니, 금새 아물어가는 피부.
일단은 다시 데려갈까.
정신을 잃은 아이를 품에 안은 뒤, 등을 두드려주었다.
* * * * * * * * *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의 감정을 나는 안다.
버티고, 참고, 다잡고.
이를 악물어도 나아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을 때.
마음은 급격히 꺾인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경계심을 풀고 호의를 준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잘못 하면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릴 수도 있고.
차라리 정말로 내버려두는 편이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내 자리에 앉았다.
협탁 옆의 의자는 완전히 내 자리가 되었다.
“…….”
깜둥이는 여전히 경계하는 눈이었다.
슬슬 말이라도 섞어주면 좋으련만.
나는 마법으로 죽을 따뜻하게 데우며 물었다.
“몸은 어때.”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한 건 그럴만한 원인이 있을 테다.
몸은 다 나았다. 권능을 사용했으니 당연하다.
다만 영양적인 문제나, 앙상해진 체형은 관리가 필요했다.
이걸로 거의 한 달.
이불을 덮고 있는 녀석은 여전히 말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있어 봤자,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구슬이 심심하면 먹으라고 놔둔 사과를 하나 꺼내 과도로 깎았다.
“뭐, 문제라도 있냐.”
대답하지 않아도 꾸준히 말을 걸었다.
“…가야 해.”
스치듯 들린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에, 나는 쓰던 칼을 떨어뜨릴 뻔했다.
태연한 척 말을 걸었다.
“어딜.”
“…마을.”
“무슨 마을. 이 근방이야?”
-도리도리.
노예로 잡혀왔으니, 아마 그 마을은 이미 없거나 망가진 상태이겠지.
봐야할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
한 번 떠보니 대답이 없는 게 맞는 말같다.
그래도 대화가 되기 시작하니 마음이 좀 놓인다.
대체 무엇이, 이 아이를 몰아넣었는지는 모르지만.
“멀어?”
-도리도리.
깜둥이는 노예 중에서도 5성급은 되는 노예다.
SSR.
키워놓으면 언젠가 제 몫을 할 녀석.
아까 전에 인력을 배치할 여유가 없다는 말이 이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나는 깎은 사과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데려다줄게.”
“……!”
물론, 돌아갈 품이 있다면 보내줄 생각이다.
“길은 알아?”
녀석은 끄덕이더니 품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도를 꺼냈다.
보아하니 우리 마을에 있던 중국 지도다. 이런 걸 또 어디서 훔쳤는지.
오히려 좋다.
이는 똘똘하다는 증거였으니까.
“안내해. 이름은?”
“…….”
이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슬쩍 떠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참 다가가기 힘든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