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Rank Supporting Role’s Replay in a Prestigious School RAW novel - Chapter 999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99)
117. 개막 (9)
청호가 가면 너머로 나를 응시하기에 나도 마주 바라봤다.
앞머리를 드러낸 단발인 점을 제외하면 청호에게서 한이를 연상하기 어려웠다.
겉보기에 청호는 성인 여성에 가까워 한이와 체형이 다소 달랐고, 가면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와 머리카락에 푸른 빛이 감돌고 있는 탓에 평범한 인간 같아 보이지 않았다.
가면 아래의 얼굴을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현시점에서 겉모습으로 둘을 엮기는 어려워 보였다.
‘외형으로 알아볼 수 있다면 호랑이들이 진작에 한이를 청호라고 단정 지었겠지.’
한편, 청호의 제자들로 추정되는 이들은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이들은 푸른 염료를 바른 건지, 원래 타고 난 건지 다들 푸른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외적이 청호를 바로 알아보고 노리는 걸 막기 위해 평소에도 저러고 다니는 듯했다.
그래 봤자 청호의 굳센 기운을 흉내 내는 건 불가능할 테니 강적은 바로 청호를 알아볼 테니 큰 의미는 없어 보였다.
청호는 처음 말을 걸었을 때처럼 침착하게 말했다.
“네가 진짜 예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관찰력이 나쁘진 않은 건 확실하네. 초면에 나를 바로 알아봤으니까.”
“초면이 아닐 수도 있어요.”
“예언가라면 내 귀가 좋은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떠보는 듯한 내 말에 청호가 답했다.
순간 소리를 듣지 못해 진동으로 음악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의 감상문을 찾아 읽는 한이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청호가 소리를 사랑하고, 듣는 것에 능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또, 눈앞의 청호는 진짜 청호가 아니라 이계 시뮬레이션이 땅의 기억을 읽어 구현한 잔상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급우인 한이의 모습이 겹쳐져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번 들은 소리를 잊지 않아. 네 음성, 심장의 고동, 발걸음이 남기는 소리…… 너 말고도 용족의 후예와 그 동행의 소리 전부 다 처음 들어. 너희와 나는 처음 만나는 거야.”
청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음성은 그렇다 쳐도 다른 소리로 누군가를 기억하고 구분하는 건 굉장히 어려울 텐데, 청호는 그게 되나 보다.
아마도 강한 담임 임연화가 근육의 형태로 생물을 구분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가 아닐까?
“이런 격전지에서는 용족의 후예보다 예언가의 가치가 높아. 네가 가짜든 진짜든 예언가라고 스스로를 칭한 이상, 위험한 처지에 놓일 거야. 알고 그런 거겠지?”
청호는 날 선 태도를 취하진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온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이는 헛소리를 하는 황지호를 상대로 거침없이 일침을 날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정한 것과 비교되었다.
청호가 이 정도라면 다른 호랑이들은 더 심할 것 같다.
물론, 이미 각오는 되어 있었다.
“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예언가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죠.”
정신이 똑바로 박히지 않은 예언가 우기환은 천익산에서 본인의 정체를 다 떠벌리긴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계속 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정체를 밝히는 게 위험하더라도 천기를 거스르는 게 더욱 무서운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마치 여기에서 나를 쫓아내면 천기를 거스르는 짓이라고 돌려 말하는 꼴이었다.
이 말은 청호를 통해 전달받을 은호를 겨냥하고 한 말이었다.
이 시점의 은호는 천기와 깊게 엮여 있을 테니 내 말을 무시하진 않을 거다.
‘모든 말은 은호의 귀에 들어갈 것을 가정하고 해야 해. 아마 시차 때문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시뮬레이터에 기록될 거라는 점도 고려해야겠지.’
청호의 눈이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반쯤 협박이 섞인 말을 하니 곱게 보일 리가 없긴 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머지않아 하늘이 열리고 천신이 강림할 거예요. 용족의 후예와 그 동행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어야 해요.”
“천신께서?”
청호의 푸른 눈이 크게 열려 광채를 머금었다.
여기에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보다 천신이 강림한다는 말이 더 충격적이었나 보다.
나에게는 예언 따위의 힘은 쥐뿔도 없지만, 개천신화를 그럭저럭 알고 있기에 앞으로 일어날 큼직한 사건은 알고 있다.
백호군이 어둠을 가르고, 호족이 외적 토벌에 성공하고 웅족을 제압하면 열린 하늘에서 천신이 내려와 호랑이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천신이 소원을 이루어 주기 전에 그사이에 큰 전쟁 탓에 사상자가 수도 없이 나오겠지. 하지만 그걸 말해 주면 땅의 기억이 왜곡될 거야.’
공격대원들은 내게 맡기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그리 내키는 기분은 아닐 거다.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곧 죽거나 크게 다칠 이들을 앞에 두고 모르는 척하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다.
플마고에서도 리플레이를 할 때마다 나는 그 기분을 맛봐야 했다.
“너희의 체제 여부는 내가 정할 수 없어.”
“알고 있어요. 결정권을 지닌 분께 저희가 나눈 대화를 전부 전해 주세요. 분명 허락해 주실 거예요.”
“내가 말을 전할 상대는 결코 만만하지 않은데, 잘도 떠드네. 이곳에서 기다려.”
청호가 등을 돌리려 할 때, 나는 예언가가 할 법한 수상한 소리를 입에 담았다.
“신인께서 직접 오시려던 걸 말리고 당신이 오셨죠? 신인의 곁을 너무 오래 비우지 마세요.”
신화대로라면 청호는 신인을 대신해 중상을 입고 제자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이걸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역사를 비틀면 신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유적형 이계 시뮬레이터가 어떤 결과를 산출할지 알 수 없으니 그대로 흘러가게 해야 했다.
청호는 대답하는 대신 순식간에 도약하여 허공 저편으로 사라지고, 청호의 제자들도 감시역을 맡은 자를 제외하고 하나둘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우리는 디바이스를 켜 필담을 나눴다.
청호만큼은 아니어도 호랑이들은 귀가 밝으니 목소리를 낮추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박승현] 이 시대는 한글이 창제되기 전이니까 홀로그램을 안 가려도 되지 않을까요? [독고미로] 그래도 가리는 게 나을걸? [곽경구] 이계 시뮬레이터에서 번역 기능을 활성화한 상태라면 AI가 한글을 인식할 수도 있다. [염준열] 해독, 해석 관련 이능을 지닌 호족이 있다면 한글을 알아볼 수도 있어. 용족 분들 중에서도 이능으로 고어를 해독하는 분이 계셨어.통신은 할 수 없지만, 오프라인 상태의 디바이스 기능은 사용할 수 있었기에 우리는 메모장 기능을 이용해 길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현재까지는 내가 제안한 수대로 상황이 흘러갔으므로 작전 회의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곧 의견 교환은 단순한 잡담으로 바뀌었다.
[독고미로] 부반장, 연기 잘하더라. [박승현] 정말로 그냥 수상한 예언가 같았어!염준열은 내가 예언가 어쩌고 하기 전에도 대화를 잘하지 않았나?
곽경구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메시지로 적어서 지적하긴 귀찮은 건지 대충 물음표로 때웠다.
[독고미로] 이럴 줄 알았으면 개천신화를 좀 공부하고 올 걸 그랬어. 청호라는 호족도 좀 마음에 들거든. 한이가 성인이 되면 저런 분위기일 것 같아. 안 그래?독고미로의 메시지를 읽은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둘의 분위기는 꽤 달랐는데, 친우의 시선에서 볼 때는 비슷하게 느꼈나 보다.
[조의신] 그래? 나중에 비교해 봐야겠다. [박승현] 그 ‘나중’이 년 단위인 것 같네 ㅎㅎ무난하게 대화를 넘겼지만, 독고미로는 가끔 청호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 생각에 잠기곤 했다.
황지호는 한이를 보고 청호를 연상하지 못했는데, 독고미로는 달랐다.
황지호는 수천 년의 시간을 두고 둘을 보았고, 독고미로는 고작 몇 시간 차이를 두고 둘을 봤기에 바로 떠올린 듯했다.
어쩌면 황지호도 청호를 마지막으로 본 후 크게 시간을 두지 않고 한이를 만났다면 뭔가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청호가 마음에 걸려도 우선 유적형 이계 공략에 관해 생각해야 해. 거점은 거의 확보한 거나 다름없지만, 공략의 단서가 너무 없어.’
은호라면 예언가를 죽이거나 내쫓는 대신 적절히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길을 택할 거다.
만약 다른 유력한 호족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게 불가능할지라도 먼저 공격하진 않을 거다.
우리를 경계해 쫓아내더라도 외적을 상대하기에도 벅찬 호족이 후예를 공격해 용족과 적대하는 길을 택할 리가 없다.
잠시 후, 제자 넷을 이끌고 청호가 나타났다.
“처소를 내어줄게. 참고로 신역 외곽에 있는 장소라 외적이 습격해 오면 가장 먼저 파괴될 곳이야. 습격이 발생해도 호족이 너희를 돕진 않을 거라는 걸 명심해. 너희는 호족의 손님이 아니라 이곳의 체류자일 뿐이니, 분별력 있게 행동해.”
청호는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신역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만, 가장 위험한 곳에 둘 곳이며 손님으로도 대접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또한, 죽든 말든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선을 넘으면 호족의 규칙으로 다스리겠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염준열을 보며 말하던 청호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봤다.
“은호는 네가 진정 예언가라면 자신의 몸 하나쯤은 지킬 줄 알 거라고 했어. 잘해 봐.”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닌데, 냉정하게 저 말을 하는 은호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 * *
밤이 되었다.
그사이에 전투는 한 번도 치르지 않았지만, 엉망인 처소를 정비하고 만약을 대비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에 시간과 이능파가 꽤 소요되었다.
식사 시간이 지났지만 손님도 아닌 우리가 대접받을 리도 없으니 우리는 각자 플레이어용 전투 식량으로 뒤늦은 저녁을 먹어야 했다.
그동안 이 세계에 와서 호랑이들한테 불려갈 때마다 좋은 숙소와 식사를 제공받아서 그런지 이런 냉대가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황지호가 이사장으로서 처음 나를 불러냈을 때에도 좋은 곳에서 잘 먹였는데, 그때도 나름 학생이라고 신경 써 준 것 같다.
“밤에 호족 중 누군가가 방문할 수도 있어요. 대비하는 게 좋겠어요.”
“호족 분들이 여길 습격한다는 건 아니지?”
“아뇨, 밤이 됐으니 정찰이나 전투 임무를 마친 호족 중 누군가가 우리 소식을 듣고 올 수도 있어요. 이 시기의 호족은 거칠고 호승심이 넘쳤다고 하니까요.”
내 말에 공격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천신화 속 호족들은 전투 종족 그 자체였다.
외적과 웅족을 부수고 찢고 때려잡는 호족들의 모습을 보고 학을 떼는 다른 진족의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나는 후보를 점쳐 봤다.
‘황지호가 먼저 올까, 백호군이 먼저 올까. 그것도 아니면…….’
황지호라면 재밌을 것 같다며 쳐들어올 것 같고, 백호군은 한번 붙어 보자면서 올 것 같았다.
둘 다 같이 올 가능성도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계십니까. 용족의 후예를 만나러 왔습니다.”
정중한 인사와 함께 적호가 나타났다!
다른 호족이 다 쳐들어와도 적호는 웅녀와 시간을 보내느라 안 올 줄 알았는데 여기에 오다니.
적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염준열은 반가움을 표하려다 후드를 끌어당겨 표정을 숨겼다.
“안녕하세요, 제가 용족의 후예에요.”
“그렇습니까? 저는 적호입니다.”
“네, 홍룡이라고 불러 주세요!”
적호는 가면을 썼지만, 소개하기 전부터 목소리나 체격 등으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적호는 이능파를 깔끔하게 갈무리해 침착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눈앞의 적호는 힘이 넘치는 전사다운 기운을 두르고 있다는 점이 다르긴 했다.
‘그런데 적호가 왜 온 거지? 예언가에게 관심을 가질 것 같지 않은데.’
예상대로 적호는 예언가에게 한 톨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적호는 염준열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촉룡이 후예를 볼 때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비결 같은 건 모릅니까? 뭐가 있다면 쩨쩨하게 숨기지 말고 다 알려주십시오.”
적호는 빨리 김신록을 만나고 싶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