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99
199
프롤로그
이성철이 알고 있는 정보는 예상 이상으로 많았다. 그 양과 질에 리센까지 놀라워했다. 정보를 알고 있던 이성철 본인도 놀랐다.
“아니, 왜 네가 놀라는데.”
“내 예상보다 몇 배는 쓸만한 기억이 많아서.”
“그럼 좋은 거잖아?”
물론 좋다. 그러나 회귀를 거듭해온 이성철은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게 아님을 안다. 그는 회귀를 위해 많은 정보를 기억했다. 특히 위원회의 주도 세력에 대해서라면 꿈에서도 나오도록 달달 외웠다. 꿈까지 이용해 외웠다는 게 맞다.
세 번의 죽음과 네 번째 삶. 한 번에 10년을 잡아도 30년이 넘는 세월이다. 그 시간 동안 벌어진 중요한 일들을 모두 외우는 건 범재인 이성철의 머리로는 무리였다. 이성철은 기억과 관련된 기술들을 익힘으로써 부족한 기억력을 채워왔다.
이성철의 머리에는 필수적인 지식과 어디에 사용될지도 모르는 지식이 뒤섞여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의 머리에 있는 기억 중 실제 유용한 기억은 1할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불변하는 기억, 유적이나 이미 일어나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머리에 있는 기억 대부분은 쓰레기다. 위원회의 정보를 모으는 것에 열 올리긴 했지만, 유용한 정보가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었다. 그 어느 때도 말이다.
가슴 어림에서 보글거리는 거품이 찝찝했다.
“흐흥. 락산트랑 데브겔은 무너져줬으면 했는데.”
에이네의 나노 머신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위원회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살피며 프라그하가 흥얼거렸다.
“퍽이나. 전부 무너지면 위원회는 어쩌라고.”
현이 프라그하를 타박했다. 프라그하가 반대로 말했다.
“위원회에 가맹하고 싶어 하는 조직은 널렸어. 대충 몇 개 더 받아들이면 되지. 신입이라 기강 잡기도 좋고 위원회에 새 피도 수혈하고, 일석이조잖아?”
“그리고 십중팔구 그놈들은 위원회에 바친 것 이상으로 얻어가려 하겠지.”
위원회 설립 초기와는 다르다. 당시도 지금도 위원회는 친목집단이며 이익집단이지만, 그때와 지금은 구성원과 풍조가 달랐다.
현과 프라그하가 잡담을 나눌 때 리센은 사방에 펼쳐진 화면에 집중했다. 윌리엄이 잘 사용해줄 거라는 판단으로 그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호르스가 생화학 폭탄을 터뜨리고 돌아올 수 있게 빈틈을 만든 건 윌리엄이다. 윌리엄도 이 일을 통해 취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처음에는 그게 윌리엄과 했던 약속과 관련된 일인 줄 알았다.
윌리엄은 리센과의 약속에 따라 위원회의 감사자(監査者) 역할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윌리엄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꼭 위원회를 완전히 분리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약속이 깨진 것 같지는 않았다. 윌리엄은 그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며 따로 무엇인갈 꾸미고 있다.
그리고 그건 절대 좋은 의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활용하라고 정보를 주긴 했지만, 윌리엄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견제하는 걸 넘어 위원회를 완전히 분열시키고 싶어 하는 그런 의도.
윌리엄은 평화주의자였다. 사람을 죽이는 걸 망설이진 않았지만,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 자체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 윌리엄이다. 그렇기에 리센도 맘 놓고 윌리엄에게 뒤를 맡겼다. 하지만 윌리엄의 심경에 변화가 있었다면?
윌리엄에게 위원회의 감사자 역할을 맡겨도 될지 다시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대화를 할 때가 오겠지.’
리센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윌리엄의 행동은 당장 그레이트 다운타운의 이득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분이 일어났다. 윌리엄은 리센이 보내준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회귀자의 정보는 실로 유용했다. 어떻게 알았나 싶은, 위원회가 작정하고 조사해도 알아내지 못할 자료도 다수 있었다.
배신의 천국에서 그레이트 다운타운은 뒷전이었다.
윌리엄은 배덕감과 쾌감을 함께 맛보았다.
그들의 공통된 적은 한때 리센이었고, 지금은 윌리엄이었다. 검신으로 인해 그 뒤에 있는 윌리엄도 건드리기 껄끄러운 상황이었고, 잠재적 적들의 치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외부의 위협으로 뭉쳤던 위원회는 내부의 이익으로 분리됐다.
타오르는 불길에 장작을 던지듯 윌리엄은 번지는 균열에 새로운 화제를 던졌다. 화제의 출처가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윌리엄은 높은 수준의 정치는 할 줄 몰랐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히 저들보다 뛰어났다.
날조.
회계사였던 그는 기본적인 교양도 있는 편이었고, 탈세를 비롯한 여러 불법이 어떤 식으로 행해지는지 봐왔다. 과학 문명 속에서 발달한 속임수의 역사는 근원 세계 정치의 역사보다 몇 수 위다.
초월자라는 살아 있는 재앙이 존재하는 세계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도 총든 사람을 이길 수 없는 세계. 두 세계의 발전 방향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은 지구의 체제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지만, 그게 오히려 윌리엄에게 파고들 틈이 되었다. 어설프게 섞인 관료주의와 귀족정은 사람을 종이 위의 숫자로 만들었고, 숫자를 다루는 건 회계사의 일이다.
중요도에 따라 정보를 차등 배분하고 그게 관료를 거쳐 상관에게 보고되는 과정, 그 과정을 윌리엄은 손에 잡힌 듯 볼 수 있었다. 아직 그가 리센과 대립각을 세우던 시절 지구의 정치 체제를 참고하고 싶다는 저들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 윌리엄이다.
지배 구조를 극단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윌리엄의 예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윌리엄의 옆을 한 남자가 지나쳐갔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려던 남자는 윌리엄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굳고 말았다. 잠시 뒤 남자는 고개를 흔들어 털고는 주변을 살폈다. 당황한 눈치였다. 남자는 왔던 길을 달려갔다.
-간단한 암시 능력이지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이선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재생됐다. 윌리엄은 이선, 아벨과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바벨 붕괴의 가능성, 그로 인한 전쟁의 필요성. 모든 걸 설명한 이선은 헤어지기 전 윌리엄에게 하나의 능력을 줬다. 머리가 저릿한 감각과 함께 권능은 그에게 들어왔다.
-정신은 정말로 타인에게 권능을 전해줄 수 있는 건가?
-아직은 그렇습니다.
-아직은?
-저 또한 재앙의 신자가 아닙니다. 그 위치를 잠시 빌리고 있을 뿐.
암시는, 이선이 이 상황을 예견하고 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조에 딱 맞는 능력이었다. 정신의 권능으로 보고된 다른 능력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능력은 아니다. 그저 상대의 머리에 정보를 주입하는 것이 전부인 능력.
하지만 그래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정보를 조작할 수 있다.
***
위원회의 분위기는 이 이상 없을 정도로 험악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군법 위반으로 처형당하는 사람이 나왔다. 사유는 종족차별과 영내에서의 파벌 싸움이었다. 죽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더욱 나빠졌다.
“그만해라.”
윌리엄을 찾은 검신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리센이라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알아서 처신할 거다. 이쯤에서 그레이트 다운타운을 없애고 물러나는 게 좋다. 견제가 목적이라면, 충분이 이뤘지 않나?”
“요지를 모르겠는데.”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윌리엄의 아티팩트가, 검신의 검이 날아갔다. 금속 재질의 지팡이가 두 사람의 공격을 튕겨냈다. 얼얼한 손을 뒤로 숨기며 찌란이 클클 웃었다.
윌리엄은 침착했고, 검신은 눈을 크게 떴다.
“둘 다 오랜만이다?”
현이 말했다.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그레이트 다운타운에 있었나?”
“그레이트 다운타운이 망하면 곤란한 사람이 있어서. 그리고 리센이 왔다면 너는 제대로 대화도 안 할 거잖아. 안 그래, 윌리엄?”
“대화할 때가 아니긴 해.”
윌리엄이 주억였다. 현이 검신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도 참 대단하다. 기어이 팔까지 버리는구나.”
“기어이? 무슨 소리야?”
“알 것 없다.”
검신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저게 부끄러워서 나오는 반응임을 현은 알았다. 과학과의 전쟁,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 지옥에서 검신이 술만 마시면 하던 말이 있었다.
정장에 장검은 로망이다. 외팔 검사는 최고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있는 팔을 스스로 잘라가면서까지 멋을 추구할 이유는 없지만, 합당한 이유만 있다면 검신은 자기 팔도 자를 놈이었다. 취한 검신의 말을 빌리자면, 그 사연까지 합쳐져 멋이 완성되는 거라던가.
현이 윌리엄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위원회는 이미 정상적인 싸움을 할 수 없어. 리센이 나선다면, 정면에서 싸워도 위원회는 그레이트 다운타운을 어쩌지 못해.”
위원회는 이미 분단되었다. 통일되지 않은 명령 체계를 가지고 리센이 지휘하는 그레이트 다운타운의 범죄자들을 이길 순 없다. 목숨을 걸고 위원회 침투 동영상을 올리는 또라이가 그레이트 다운타운에는 아직 잔뜩 있다.
일종의 유행처럼 번진 그 행위는 범죄자들을 유쾌하고 잔혹한 방향으로 흥분시키고 있었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의 사기는 최고였다. 세계의 어둠은, 빛이 조금 드리운다고 사라질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못하겠다면?”
“나도 그레이트 다운타운 쪽에서 싸우게 되겠지. 말했듯이, 사정이 있어서 그레이트 다운타운이 사라지면 곤란해. 프라그하가 프로만 리슈타인을 추적할 단서를 가지고 갈 거야. 그걸 가지고 물러나.”
현은 단호했다. 이건 최후통첩이다. 윌리엄이 계속 위원회의 분열을 부추긴다면, 이쪽에서 위원회를 단합되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에서 먼저 위원회를 습격하면, 그리고 그 지휘관이 리센이라면 서로 싸우던 위원회 측도 일단 휴전하고 힘을 합칠 것이다. 리센이 어떤 인물인지는 그들도 잘 아니까.
“역시, 전부 같은 뜻인가.”
윌리엄이 우울하게 말했다. 셀 수도 없는 사선을 함께 넘어왔다. 말하지 않아도 간단한 생각은 서로 읽을 수 있다.
위원회가 사라지는 건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그건 윌리엄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선각자가 말했으며, 드래곤 로드까지 위원회 붕괴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다회차 회귀자가 경험한 미래는 혼돈 그 자체였을 거야. 안 그래?”
“본인 말로는, 그렇다더군.”
거기에 다회차 회귀자의 경험담까지.
운명은 존재한다.
바꿀 수 없는, 절망이 지배하는 운명이 앞에 있다. 그리고 그 운명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윌리엄 리스먼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윌리엄의 얼굴에 드리운 음울함이 진해졌다. 그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늦었어.”
그리고 착잡하고 억눌린 목소리를 토해냈다.
“무슨 뜻이지?”
“뭘 한 거야?”
폭발이 일어났다. 진지 전체가 소음으로 달아올랐다. 뜨거운 외침이 대기를 달궜고, 살기가 넘실거렸다.
현은 이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 이 공기를 알고 있다. 전장의 공기다.
“위원회를 중심으로 전쟁이 일어날 거야. 세계를 집어삼킬 전쟁. 세계 대전이. 돌이키기엔 늦었어.”
선언과도 같은 엄숙한 말. 현은 윌리엄이 낯설어졌다. 윌리엄은 변했다. 뭐가 그를 변하게 했는지는 현도 몰랐다.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최후의 안드로이드에 대한 정보는 숨겨지고 있지만, 다회차 회귀자와 너는 어디서도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
“심상치 않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네.”
찌란이 심각하게 말했다. 현은 찌란의 지팡이에 손을 올렸다. 생소한 마력이 몸을 감쌌다.
“다시 볼 때, 우린 적인가?”
현이 물었다. 윌리엄이 웃었다.
“그때그때 다르겠지. 전쟁이란 게 늘 그렇잖아?”
“그래. 그렇지.”
우는 듯 웃는 윌리엄에게, 현도 마주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