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98
198
프롤로그
윌리엄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검신이 팔을 잘랐다. 그 사실이 모든 주제를 압살했다.
흐지부지 회의가 끝났다. 임원들의 머리에 회의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뒹구는 목과 덩그러니 놓인 검신의 팔이 모두의 정신을 빼앗았다.
회의를 빠져나온 윌리엄은 바로 검신을 찾아가 따졌다. 그의 머리에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윌리엄이 검신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깨의 피는 이미 지혈되어 있었다.
휑한 어깨를 보는 윌리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검은 신체에 구애되는 경지를 벗어났다. 팔 같은 건 없어도 된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도!”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현장 요원들 평가하는 내 명성은 임원들 사이에서 최고다.”
“대가도 없이 꾸준히 사건을 해결하는 초월자가 너 정도밖에 없으니까.”
“그런 내가 스스로 팔을 잘랐다. 낙하산 지휘관들의 목이 잘린 것 정도는 가십거리도 못 된다. 여론은 우리 편이다.”
검신은 담담했다. 수십 년 동안 검을 휘두른 팔을 완전히 잃었는데도 동요하나 없었다. 윌리엄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당사자가 가만있는데 자기만 화를 내는 것도 바보 같았다.
그래도 감정의 동요가 가라앉진 않았다. 윌리엄이 이마를 감쌌다.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어.”
인사 개편 중에 일부러 틈을 보였다. 리센이 아직 도망치지 않았다면, 리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혹해서 한 번쯤 공격을 시도해볼 만한 틈이었다.
그 뒤에 할 일도 모두 계산되어 있었다. 검신의 팔은 쓸모없는 희생이었다.
“그랬다간 위원회에서의 우리 입지가 줄어들겠지. 지구인에 대해 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도 모르진 않겠지?”
“그래.”
윌리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구인의 성장 속도는 비정상적이다. 마력이 없는 지구의 특수성 때문이라는 게 밝혀진지 오래였지만, 그걸 고려해도 지구인 출신 초월자의 숫자는 상식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지구인의 피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그런 소문이 돈 지도 꽤 되었다. 지구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없다면, 현재 소환되고 있는 지구인들은 모두 노예나 종마가 되거나, 그보다 심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
높은 마력 적성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강해지는 지구인이지만, 그들도 소환된 직후에는 나약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우리가 만든 평화가 되도록 오래 유지되는 것. 그럼.”
검신이 발을 내디뎠다. 보법을 담은 걸음으로 한 번에 수십 미터를 움직였다.
윌리엄이 검신의 뒷모습을 우울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평화는 깨어져야 해.’
말이 되지 못한 중얼거림이 응어리가 되어 윌리엄의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
위원회가 정지했다. 이중적 표현이었다. 위원회가 좁혀오던 포위망이 정지했으며, 위원회의 기능이 정지했다.
가장 먼저 소식을 접한 건 발로 뛰며 정보를 모으던 찌란이었다. 그의 전설에 관한 일화 중 하나는 자는 초월자의 무기를 훔쳤다는 것이다. 위원회 침투 따위 가소로운 일이었다.
“테러의 책임으로 검신이 자신의 팔을 잘랐다고 하네.”
리센만이 미리 보고를 받은 듯 태연했고 나머지는, 현마저도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호르스가 행한 테러는 위원회의 위신에 상처를 내기에는 충분했으나, 그게 검신의 팔과 연결되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검신은 위원회 무력의 상징이다.
변덕적인, 이기적인 초월자들 중에서 검신만이 꾸준히 위원회를 위해 움직였고, 검신의 검은 어느샌가 위원회를 상징하는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찌란에게 미리 소식을 들은, 그래서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리센이 말했다.
“놀랄 것 없다. 전부 검신이 노리던 것일 테니까. 지금쯤 위원회 놈들은 서로 물어뜯고 있겠지?”
사람들이 우직하게 일만 하는 검신의 모습을 보고 착각하는 것이 있다. 검신이 싸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것이다. 리센이 보기에 웃기는 소리였다.
검신은 출세했다. 그건 출세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어떤 식으로든 치웠다는 뜻이다. 검신이라는 이름과 그의 무력에 가려져 사람들은 그걸 보지 못한다.
검신이 한창 추격조로 활동하던 시절, 리센은 잠깐이지만 검신과 함께 활동했던 적이 있었다. 현도 없이 리센과 검신, 그리고 지금은 죽고 없는 몇이 함께였다.
현이라는 희대의 미친개에 가려졌지만, 리센이 기억하는 검신도 만만찮게 미쳐 있었다. 당시에도 유명하던 김우현과 조를 짜 다니는 인간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그렇네. 다양한 이유로 다양하게들 싸우고 있지. 끌끌, 위원회가 이런 오합지졸인 줄 알았다면 위원회 창고나 한번 털어보고 은퇴하는 거였는데.”
흥미와 실망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높으신 분들의 추한 싸움을 구경하는 건 재미있었지만, 저들이 세계의 꼭대기에서 근원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떠올리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제법 좋았지. 왔으면 바로 죽었을걸.”
“전쟁 직후였으니까.”
현의 말에 프라그하가 동조했다. 프라그하가 아련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그때가 좋았어. 그때가.”
초창기 위원회는 이렇지 않았다. 과학과의 대전에서 살아남은 자들치고 멍청한 놈은 없었고, 그들은 위원회라는 조직의 유용성을 인정했다. 설립은 쉽지 않았지만, 설립된 위원회는 세계 정부라는 말이 어울리는 힘과 조직력과 정치력을 가진 조직이었다.
멍청한 놈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멍청한 놈들의 삽질을 메우고도 남을 유능함이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10년 남짓한 짧은 시간이다. 연이은 사고에 정의감 넘치고 유능한 사람들이 차례대로 떠났고,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 다음으로 떠났다. 용감한 자들의 휘광을 등에 업은 욕심 많은 것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남은 건 괴짜와 운이 좋은 사람들. 무신이 죽고 김우현이 죽었다. 그밖에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던 놈들이 손발을 다 사용해 헤아려도 셀 수 없을 만큼 죽었다.
그녀의 생존은 실력의 산물이 아니라 운의 산물이었다.
현도, 리센도 프라그하의 기분을 알았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현재가 훨씬 살기 좋고 풍요롭다. 그러나 그때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고, 희망은 차근차근 현실이 되었다. 내 손으로 이룩하는 평화. 그건 퍽 보람찬 일이었다. 손에 묻힌 피가 아깝지 않았다.
과거에는 평화가 없었지만, 희망이 있었다. 현재에는 풍요가 있지만, 희망이 없다.
뭐가 더 나은 삶일까. 현은 전자라고 생각했다. 희망이 없는 곳에 의지는 꽃피지 않는다. 배부른 짐승은 자기 정신이 죽어감을 모른다.
추억에서 벗어난 리센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미화된 추억이 반대로 그를 차갑게 식혔다.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나?”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쟁을 한 눈에 파악하는 건 이 늙은이도 힘들다네.”
“내가 알아.”
에이네의 말이었다.
“위원회 진지 전체를 염탐하는 네트워크를 방금 완성했어. 뭐가 궁금한데?”
“나도 조금 도울 수 있을 것 같군. 위원회는 내 인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현시점에선 알려지지 않은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들도 알고 있다. 몇 개는 써먹을 수 있겠지.”
범죄자들의 지배자, 최후의 안드로이드, 다회차 회귀자가 세계 최고의 권력 기구에 대항해 힘을 합쳤다.
***
윌리엄은 보이지 않는 손을 느꼈다. 손은 거대하고 치밀했고, 또 은밀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내부에서부터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분열이 분열을 낳고, 분란이 분란을 조장했다.
총의로 모였지만, 위원회가 단결된 건 아니었다. 위원회는 과거와 달랐다. 한 목적을 위해 힘을 합치던 자들은 사라지고, 목적을 수단으로 힘을 구하게 되었다.
위원회는 뭉쳐 있었지만, 하나는 아니었다.
하나인 척 꾸민 다수는 서로에게 벽을 치며 하나조차 아니게 되었다. 하나로 보이게끔 위장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하 관리를 어떻게 했으면 그 중요한 사안을 보고도 하지 않는 거요?”
“검신의 모함입니다. 언데드가 된 그들에게 확인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 쪽 지휘관의 발언을 무시하는 겐가? 이미 마법으로 검증도 마쳤지 않나!”
“모두 수작일 뿐이오. 검신 하나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말이외다.”
진실은 언쟁에 묻혀 떠내려갔다. 검신이 어쩌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검신이 팔을 버렸다. 그건 신이 내린 면죄부와 같아 누구도 검신을 책할 엄두를 못 냈다.
검신은 간단하며 고약한 함정을 파놓았다. 지휘관들은 모두 각 세력에서 영향력 있는 직책에 있는 인물이었다. 정식 간부는 아니지만 위원회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자리에 무명소졸을 세워놓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떼로 죽으며 간과할 수 없는 전력 손실이 발생했다. 그건 위원회의 손실이 아닌 위원회의 이름 아래 모인 세력들의 손실이었다.
여기 모인 임원들은 멍청하지 않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이 풍전등화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윌리엄의 인사이동에 찬성했다.
위원회에는 여유가 있다. 적어도 당사자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외부의 적에 대한 여유는, 내부의 적에 대한 견제로 이어졌다. 그들은 서로에게 다양한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죽은 지휘관들이 좋은 소재였다. 세력을 대표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이용하기 편하다는 것을 안다.
시체 하나를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족속이 바로 정치인이란 것들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적을 물어뜯는다는 점에서 여기 모인 임원들은 유능했다.
윌리엄이 저 멀리 보이는 그레이트 다운타운을 감싼 장벽을 보았다. 높고 우람한 장벽이 그 안에 있는 것들을 감췄다. 저 장벽처럼, 그레이트 다운타운의 실체는 가려져 있다.
도시 안에 도사리는 인물이 리센이라는 것을, 단신으로 그들 세력을 몇 년이나 막아온 인물이 마지막 선물을 준비해놨다는 걸 저들은 알까.
‘모르겠지.’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유능하기에 위원회의 저력을 알고, 유능하기에 위원회가 그레이트 다운타운을 밀어버릴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리석음에서 나온 유능이 그들의 살을 파먹었다.
전화가 울렸다. 윌리엄은 전화의 주인을 보고는 조용히 화면을 옆으로 밀어 전화를 껐다. 리센의 전화였다. 리센과 연락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경계를 소홀히 하진 않았지만, 감시하는 누군가가 없으리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살기 없는 감시라면 윌리엄도 감지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기에 리센과의 연락 자체를 끊어왔다. 리센도 그걸 아는지 딱히 연락해오지 않았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을 버리고 도망친다고 한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연락이 왔다는 건 무언가 있다는 뜻이었다.
‘해? 말아?’
윌리엄이 고민하는 사이, 전화 대신 문자가 도착했다. 지구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작성된 장문의 문자였다. 문자의 내용을 본 윌리엄이 눈을 크게 떴다.
“너도 거기 있었구나.”
이토록 정확한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알기로 한 명밖에 없다.
다회차 회귀자.
그리고 그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누군지는 뻔했다.
윌리엄은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스마트폰의 스크롤을 내렸다.
미래의 일과 미래에 밝혀진 비밀을 차근차근 읽어가며 윌리엄은 문득 생각했다.
‘이 또한 미래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건가?’
그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닥쳐올 전쟁이 슬픈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