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25
225
죽음 재래.
마녀사냥까지 가지 않더라도, 제물과 희생은 강한 효과를 가진 주술로 대대로 사용되어 왔다. 살아 있는 생물에게 희생이라는 건 어떻게든 고결한 형태를 띠게 마련이다. 그 의사가 비록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제물로 선택된 이상 죽거나 희생하지 않으면 주술이 발동하지 않지만, 엘로렌이라면 그 법칙을 시원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주술에 필요한 건 형식과 의지. 엘로렌이라면 두 가지 모두를 속일 수 있다.
주술사들은 평소 섣불리 시행할 수 없는 최상급 풍요 주술을 엘로렌을 매개로 망설임 없이 사용했다. 그들은 피곤한 듯하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희생이 필요한 주술을 마음껏 사용할 기회는 좀처럼 없겠지. 그런 주술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사람은 해가 지는 늪에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제물이 된 엘로렌은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수십 개의 주술에 간섭하는 일이니 모르긴 몰라도 쉽진 않을 것이다.
현은 로한, 젭크와 함께 구석에서 그 장면을 구경했다. 로한은 하품을 쩍쩍하고 있었고, 젭크는 관심 있게 보고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현도 다르지 않았다.
현도 주술 몇 개를 쓸 수는 있지만, 저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평생을 주술에 투자한 사람들이다. 끼어들어봤자 짐밖에 안 됐다.
48시간이 지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주술사들이 모두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로포르도 피곤한 기색이 만연했다.
“마녀의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건가?”
현이 지친 로포르에게 물었다. 마녀의 나라의 사정은 농담으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일정의 주술을 항시 펼치고 있어야 한다면, 상당히 부담될 것이다. 국방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그쪽 사정이 안 좋은 건 나도 알고 있네. 걱정하지 말게. 마녀의 나라가 가지는 상징성을 빌리는 게 주 작업이니 규모가 큰 것도 아니야. 피곤하니 좀 자겠네.”
“다음 작업은 언제지?”
“10시간 후.”
“강행군이군.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재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 일주일 정도면 다 떨어지겠군.”
열세 번째 재앙과 싸울 때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던 해가 지는 늪의 창고가 텅 비다니, 세상도 참 큰일이야. 라며 로포르가 능청스레 말했다.
“주술이 끝나면, 지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가.”
“바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걸세. 주술의 영향이 다 될 때까지는 조용할 거야.”
“그건 언제?”
“일주일 정도 예상했지만, 저 아가씨가 있다면 한 달, 어쩌면 그 이상. 권능이라는 건 참 모를 것이야. 주술을 무효화한다기에 늪 전체에 비상이 걸렸던 게 엊그제인데 이제 다른 의미로 비상이 걸릴 것 같으니.”
산제물이 필요한 주문을 산제물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이것만 해도 굉장한 일이다. 제물을 사용할 정도의 주술이라면, 제물의 선정도 까다로운 것이 많다. 제물 없이 제물 의식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제물에 그치지 않고 주술에 사용되는 다른 물건들도 대체할 수 있다면, 사용할 수 있는 주술이 대폭 늘어난다.
경우에 따라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정신을 배척할 때 주술사들만 정신을 포용하는 일이 올지도 몰랐다. 그때는 양쪽 모두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기초적인 주술사도 자신의 목숨을 매개로 상대를 저주하는 주술은 사용할 수 있으니까.
사용한다기보다는, 원래 존재하는 원한을 주술의 형태로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에 가깝지만.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는 아래에 집중하느라, 위에 대한 방비가 안 돼 있어.”
“운석 말인가.”
현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에이네의 말에 따르면 떨어지는 운석의 양과 운석이 떨어지는 시간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거라고 했다. 여긴 아직 운석이 떨어질 기미는 안 보였다.
“첫 낙하는 일주일 후.”
“딱 주술이 끝날 시점이군.”
“드래곤들이 알려주긴 했지만, 그쪽도 할 일이 많아 도와주진 못한다더군. 세상이 엉망은 엉망인 모양이야. 하루만 여유가 있었으면 우리끼리 막아봤을 건데, 그건 도저히 무리라는 계산이네.”
“알리시아는?”
“물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운석을 막을 거네.”
“하는 데까지는 해보지.”
로포르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다른 주술사들은 주어진 시간이 끝나자마자 모두 뻗어 깨어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해가 지는 늪과 마녀의 나라가 연계한 대주술. 대전 때도 본 적 없는 규모의 주술이다. 주술사들이 느끼는 피로도 보통은 아닐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주술사들이 뻗었다고 엘로렌이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주술사들이 한 무리 나타나 겨우 제물에서 벗어난 엘로렌을 끌고 갔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 누구세요?”
“아직 괜찮으신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엘로렌을 다시 제물용 의자에 앉힌 주술사들이 바람의 길을 만들어 의자를 그 위에 올렸고, 엘로렌은 해가 지는 늪 어딘가로 배달되었다.
“한 달이라는 건 일주일 동안 엘로렌을 혹사해서 나오는 수치였나. 그런데 너는 의외로 안 말리는군.”
현이 로한에게 물었다. 젭크라면 몰라도 엘로렌을 과보호하는 로한이라면 주술사들과 한바탕할 줄 알았는데, 그는 엘로렌이 끌려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
“상대가 가진 살기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엘로렌이 고생하는 데 왜 내가 말려야 하지?”
현은 저 비슷한 관계를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남매관계라는 거였던가.
***
일주일이 빠르게 지났다. 주술사들과 같은 수준의 스케줄을 소화한 엘로렌은 퀭한 눈으로 나무에 걸터앉아 있었고, 엘로렌과 비슷한 상태의 주술사들이 늪 근처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현은 하늘을 보았다. 별이라기엔 지나치게 밝은 빛이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운석을 깨부수는 게 얼마 만이더라.’
현은 운석을 상대하는 게 처음이 아니었다. 죽음의 사도가 떨어뜨리는 운석을 몇 번인가 부숴봤고, 과학과의 싸움은 기본이 사거리 싸움이었다. 우주에서 무기를 운석처럼 쏘아대는 건 과학의 공격 중에서도 기초적인 부류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은 질리도록 떨어뜨려 봤다.
“예정대로 우리 둘은 빠지겠다.”
젭크가 엘로렌, 로한을 데리고 사라졌다. 로한과 젭크의 실력이라면 발목을 잡지는 않겠지만, 그 이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운석에 신경 쓰다 엘로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해가 지는 늪이 사라지는 것 이상으로 낭패다.
주술사는 대체할 수 있지만, 엘로렌은 대체할 수 없다. 아벨에게 대항할 수 있는 건 세상에 그녀 하나다.
“준비는 끝나셨나요?”
“그쪽은?”
“이미 끝났죠.”
미모의 엘프가 현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수십의 정령을 몸에 감고 있는 알리시아는 초월자이며 로포르의 아내이자 프라그하의 어머니이자 해가 지는 늪이 방어를 책임지는 책임자이기도 했다.
정면 싸움에 약한 주술사들을 외침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그녀 휘하의 경비병들이었다. 주로 주술사의 혈연으로 구성된 경비병들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알리시아는 혼자서도 능히 군대라 불려 손색없는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현이 나타나기 전까지 당대 최고의 정령사 자리를 꿰차고 있던 게 그녀였다.
“여기서 싸우실 건가요?”
“아니. 위쪽에서.”
“그럼 저는 아래를 맡아야겠네요.”
현과 알리시아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현과 알리시아의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그녀가 계약한 정령들과 현이 사이가 나빴다. 정령사로 초월자가 된 알리시아가 계약한 정령들은 하나같이 이름 있는 정령들이고, 그런 정령들은 열에 아홉은 현과 크고 작은 마찰이 있다.
마주치는 것만으로 정령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리케아나식 정령술은 자아가 강한 상위 정령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다.
“집을 지키는 건 안주인의 의무지.”
현이 쓰러져 자고 있는 로포르에게 눈길을 주었다. 전장에서 잠시도 손에서 떼지 않던 지팡이까지 내려놓고 퍼질러 자고 있는 트롤이 보였다.
“집 보기를 할 수 있을 때 여자는 한 사람의 숙녀가 되는 거죠.”
“그럼 프라그하가 숙녀가 되는 날은 영원히 안 오겠군.”
“그 아이는 예전에 포기했답니다. 대체 누굴 닮아 저러는지.”
한숨 섞인 알리시아의 한탄에 현은 정말 모르냐는 눈빛을 보냈다. 알리시아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로포르와 결혼하기 전 그녀의 화려한 전적은 마녀의 나라에까지 전해져 전전대 여왕의 수기에도 적혀 있었다.
운석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이 이상 내려오게 놔두면, 격추해도 격추한 게 아니게 된다.
“저희 식구들을 잘 부탁드릴게요.”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알리시아의 배웅을 받으며 현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금부터 할 작업은 마력이 적은 현에게는 버거운 작업이다. 한 푼의 마력이라도 아껴야 하기에, 강기를 밟고 뛰는 것보다 조금 느려도 바람의 정령의 힘을 빌려 비행하는 걸 택했다.
날아가며 현은 연신 손목에 찬 시계의 내용을 확인했다. 과학이 같은 편이면 이게 편하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현은 에이네에게 운석의 숫자와 경로에 대한 자료를 받았고, 어떻게 해야 가장 넓은 범위를 지킬 수 있을지도 에이네가 계산해주었다.
예정 고도에 도달하자 시계에서 알림이 울리며 신호를 주었다. 현은 허공에 멈춰, 앞으로 손을 뻗었다.
현은 허공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붉게 달아오른 운석이 점점 가까워져, 옆을 지나쳐갔다. 현의 손이 번개처럼 튀어 나갔다.
흰색 장갑에서 수백 개의 실이 날아가 운석에 닿았다. 현은 정령술을 사용해 노우라의 힘을 빌렸다. 양손이 타올랐고, 불길은 장갑과 이어진 실을 타고 운석까지 옮겨붙었다.
노우라는 불과 땅의 정령. 그리고 떨어지는 운석은 불타는 광물이다. 노우라의 힘이 운석을 지배했다. 현이 운석과 연결된 팔을 휘둘렀다. 떨어지던 운석이 궤도를 바꿔, 옆에 있는 운석을 때렸다.
두 개의 운석이 조각나며 파편이 흩어졌다.
현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파편이 옆에 있던 운석에 가서 박혔고, 파편에 연결된 실을 통해 전달된 노우라의 힘이 다시 운석을 움직였다.
운석으로 치는 당구였다. 운석이 옆 운석을 때리면, 부서지며 날아간 파편이 힘의 매개가 되어 다시 운석을 움직여 다른 운석을 때린다. 허공에서 운석이 연쇄적으로 부서졌다.
실에서 실이 자라났고, 실은 다시 운석 파편과 연결되어 다른 운석을 때렸다. 나무처럼 한 갈래의 실에서 수십 개의 실이 뻗어나가 운석과 연결되었다.
현을 뿌리로 하는 불꽃 나무가 하늘에 자라났다. 거꾸로 자라난 가지들이 쾅쾅 소리를 내며 불똥을 튀겼다.
에이네가 제시한 건 현이 가진 마력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운석을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얼마나 운석을 제거할 수 있을지는 현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 자라난 거대한 불꽃의 나무가 현이 보여준 결과였다.
불꽃 나무는 해가 지는 늪 전역에서 볼 수 있었다. 알리시아 또한 현이 만들어낸 거대한 줄기를 보았다.
‘하여간, 대단한 사람이야.’
저런 모습을 보여주고 제 실력을 못 내니 정령사를 포기했다니, 세상 모든 정령사가 목매달 일이었다.
알리시아는 바람과 물의 정령왕을 소환했다.
“노우라… 그리고 김우현인가.”
“힘의 제어는 여전하군.”
김우현이라는 이름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두 정령왕도 저 솜씨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감탄하고 계실 때인가요? 자신 없으신 건 아니죠?”
알리시아가 두 정령왕을 독촉했다. 김우현의 활약은 눈부셨지만, 아직 떨어지는 운석이 많았다. 자격지심을 느낀 두 정령왕의 힘이 해가 지는 늪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