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84
284
이곳에선 아무 일도 없었다.
현이 쓴 몇 장의 보고서와 함께, 검신과 무신은 위원회로 귀환했다. 옆에서 에이네가 현에게 물었다.
“진짜 직접 안 해도 돼?”
“타인의 존재로 자신을 완성하는 놈들이 세상에는 몇 있어.”
그 사람의 관심, 그 사람의 눈빛, 그 사람의 반응. 그 모든 것을 동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인생을 놀이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프로만은 전형적인 그런 유형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아니, 두려워하는 게 무관심이다.
목표의 무관심, 삶의 이유가 되는 사람의 무관심. 현이 프로만의 목을 옥죄고, 직접 그를 죽이러 가면 그는 기뻐할 것이다. 반대로 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명을 달리하는 것이야말로, 현의 무관심 속에 죽어가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최악의 죽음일 것이다.
현이라고 프로만을 직접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이 손으로 직접 끝내주고 싶은 마음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건 프로만이 오히려 바라는 바일뿐더러, 현에게는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현은 아키아가 있던 자리를 보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질기다면 질긴 악연의 주인은, 현이 그간 있었던 일을 듣는 사이에 가버렸다. 한 달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현이 잠시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게 잘못이었다.
“남은 건, 무신의 성인과 죽음의 성인인가.”
그 둘만 정리하면, 이번 전쟁의 주축은 대강 정리되는 것과 같다. 우두머리가 없는 재앙은 한낱 오합지졸이다. 그들이 한뜻으로 움직이는 건 성인의 뜻이지 그들 개개인의 의지는 아니니까.
성인이 사라지면 의견 취합이 안 될 테고, 뭉치지 못한 재앙은 위원회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아?”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나?”
“그딴 건 바라지도 않아.”
엘로렌이 새침하게 말했다. 강한 의지가 담긴 눈이 현을 향했다.
“그 괴물을, 마력을 조종하는 열다섯 번째를 죽이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으니까.”
밈이 원하는 세계는 계승되는 정신이 단절된 세계. 그리고 그 단절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 밈 스스로의 단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해, 밈은 문명이 자멸하길 원한다.
밈이 바라는 미래에 열다섯 번째 재앙의 난입 같은 건 들어가 있지 않다. 같은 재앙이지만, 밈은 다른 모든 재앙의 적이다.
현은 엘로렌과 같은 세상, 밈과 인지도로 이루어진 세상을 보았다.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할까. 총천연색? 부족하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의 스펙트럼을 넘어섰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색의 향연이고 예술이다.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력을 상대하기에 가장 좋은 재앙이긴 해.”
밈의 성인이 그리 말했다.
***
어령과 우라누스는 천마의 명으로 전쟁을 끝낼 의무를 지게 되었다. 위원회도 재앙도 상관 없다. 승자는 김우현, 김우현 한 사람만 멀쩡하면 된다.
우라누스는 세계를 돌며 마족을 지배했다. 재앙에 합류한 마족의 숫자는 상당했다.
‘진지하게 마족의 멸종을 고려해야겠어.’
마신의 신자들이 앞장서 마족을 세뇌하니 대륙에 마족이 남아나지 않았다. 레벨이 낮은… 시스템이 사라졌으니 이제 ‘낮았었던’이라는 말을 써야하는, 그런 마족들도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마족은 종족에 따라 특별한 재능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발록의 포악함과 육신의 단단함은 오우거에 비할 바가 아니고, 임프의 간악함은 고블린도 한 수 접어준다.
마족을 만들며 마신은 즉각 전력이 될 수 있는 종족을 원했고, 그건 마족의 성향에 그대로 나타났다.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 수준의 번식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개개의 잠재력은 마족이 한 수 위다.
우라누스는 지배한 마족들에게 평소와 같이 행동하라는 명령을 내려뒀다. 그가 원하면, 마족들은 일제히 움직일 것이다.
“마족은 끝났다. 그쪽은 어때?”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어요. 곧 시작될 거예요.”
어령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렸다.
어령의, 서큐버스의 능력은 상대의 꿈에 간섭한다. 상대의 본체가 어디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대상이 살아 있으며 꿈을 꾼다면, 서큐버스는 꿈에 들어가 정보를 빼 올 수 있다.
어령은 클론의 꿈에 들어가 정보를 빼냈다. 클론을 조종하는 자들의 정체와 중요 거점 몇 군데의 위치, 그리고 그들의 통신 방식까지. 어령은 그 동안 뽑아낸 정보를 가지고 위원회를 찾아갔다.
위원회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우라누스와 어령을 따르는 마족들과 위원회의 일시적인 동맹이 성사되었다.
“두 성인은 어떻게 하기로 했지?”
“죽음은 위원회에서. 그리고 투신의 성인은…….”
“내가 한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어령과 우라누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복했다. 그들 앞에 새롭게 태어난 마신의 화신. 별명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천마신이 서 있었다.
천마의 검은 무복이 바람에 휘날렸다. 허리까지 기른 그녀의 머리도 바람에 휘날렸다.
“계획의 진척도는?”
“과학은 이미 등을 돌렸습니다. 죽음과 투신만… 아니, 죽음만이 남았습니다.”
천마의 왼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프로만 리슈타인이라는 벌레는? 분명 주의하라고 했을 텐데.”
“그 또한 위원회에서 처리하기로 했나이다.”
“위원회가?”
어령의 말에 천마가 관심을 보였다.
“풍문으로는, 위원회에서 직접 나온 작전이 아니라 그 김우현이 발의한 작전이라 합니다.”
프로만의 일이라면 위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사안이다. 일시적 동맹이라지만 어령에게 그런 정보까지 제공되지는 않았다. 어령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모두 그녀의 능력이었다. 전직 하오문 출신 서큐버스의 능력.
“그래?”
혀가 앵두 같은 입술을 훑었다. 천마가 입맛을 다셨다. 열다섯 번째를 처리하면, 이번에는 김우현 한 사람이 아닌 다른 한 명까지 끼어서 놀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실수는 곧 죽음이다. 예정대로 간다.”
“본부를 따르겠나이다.”
“모두 뜻대로 될 것입니다.”
우라누스와 어령이 땅에 머리를 박았고, 천마는 길을 떠났다. 꼭꼭 숨어 있지만 변환의, 마신의 화신인 그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천마에게는 저 멀리 있는 투신의 화신의 존재감이 똑똑히 느껴졌다.
‘더 강해졌겠지.’
우주의 힘을 담은 공격. 그 공격이 어디까지 닿을지 그녀도 궁금했다.
***
그레이트 다운타운과 위원회, 리센과 윌리엄은 한 집단의 대표로서 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도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200년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본능의 성인이 그 상대였다.
반쯤 타의로 이 자리에 있는 아즈란이 수염을 쫑긋거렸다. 그녀의 감각은 두 사람의 신경망에 돌아다니는 전기 신호까지 잡아냈다. 그녀가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나보고 도와 달라?”
“재앙이 세계를 점령하면, 당신도 곤란하지 않습니까?”
“나와 만났을 때의 반응으로 봐선,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그럼 굳이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을 건데.”
“그럴지도 모르죠.”
과학의 탐지조차 피해 가는 본능의 성인이다. 반지름 1만KM의 탐지능력과 그 스텔스 능력, 그리고 종류를 가리지 않는 학문의 조예. 도망치는 그녀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밈 정도가 가능성이 있을까.’
하지만 그 밈의 신자는 본능의 성인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았다. 어령이 가져온 기억에서 본 자료였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위쪽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하늘이라면, 과학?”
“아뇨. 그보다 더 위. 진리입니다.”
로드의 마법으로 현재 광기는 조용하다. 그러나 그게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광기의 화신이 돼야 했을 힘. 그 힘의 목적은 드래곤을 광기에 물들이는 것이다. 드래곤을 지켜주던 바벨이 사라졌으니 언제 광기가 다시 움직일지 모른다. 당장 내일 광기가 움직이기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다.
“재앙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세계와 진리의 수호자가 사라진 다음 광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당신의 작업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주제가 옆으로 빠지는데. 과학도 잡지 못한 나를, 미친 드래곤 따위가 어쩔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네가 하고 있는 연구에는 차질이 생기겠지.”
리센의 말에 아즈란의 수염이 약하게 떨렸다. 리센이 말을 이었다.
“몬스터가 광기의 산물이라면, 광기가 변하면 몬스터는 어떻게 변할까.”
“학자에게 연구를 인질로 잡겠다?”
“뻔하지만 언제나 통하는 협박이지.”
리센은 협박이라고 단언했다. 조건만 보면 본능의 성인은 아쉬울 게 없다. 딱히 어디 소속된 것도 아니며 정보에 따르면 그녀는 200년간 혼자였다.
세계가 망해도, 이 행성이 사라져도 아마 그녀는 살아남을 것이고, 살고 싶은 만큼 살고 죽고 싶을 때 죽을 것이다. 불로불사 같은 술법은, 그녀의 경지에선 사소한 잡기에 불과했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선 그녀가 집착하는 단 한 가지를 물고 늘어져야 한다.
“뭐, 좋아. 막 가닥이 잡히기 시작한 연구가 뭉개져도 기분 나쁠 테니까.”
아즈란은 선뜻 대답했다. 위원회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적당히 때를 봐서 그녀가 위원회를 찾아갈 작정이었다. 진리 이야기는 처음 알았지만, 세계가 재앙의 손에 넘어가면 불편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나도 조건을 제시해야겠어.”
“조건 없는 호의가 가장 위험하지.”
사소한 몇 가지 거래가 오갔고, 아즈란의 위원회 협력이 결정되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리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
클론의 조종 원리는 간단하다. 프로만과 유티안 휘하 과학의 신자와 역병의 신자가 뇌충으로 복수의 언데드를 조종한다.
뇌충으로 생물을 조종하는 것에는 여러 제약이 있다. 수백 개의 클론을 배양해 적합한 신체 하나를 얻을 정도로 초기에는 프로만도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러나 언데드에는 그게 필요 없었다.
인공 영혼을 가진 언데드는 한 세트의 뇌충만 있으면 누구든 역량껏 조종할 수 있었다.
세계에 깔린 뇌충 네트워크. 그리고 환계의 문과 뇌충을 응용해 세계 어디서든 등장할 수 있는 클론 부대.
이 두 가지로 재앙은 과학이 빠진 전장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둘의 중심에는 뇌충이 있었다. 프로만과 유티안은 자신들의 최고 걸작으로 뇌충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추적당하지 않는 통신 수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벌레가 세계 대전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었다.
하나의 뇌충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뇌충과 연결되어 있다. 그건 뇌충의 존재의의와도 같다.
“과연, 끝이 보이지 않는 그물망 같은 연결이군.”
뇌충 네트워크의 허브 하나를 차지한 유정이 입을 열었다. 그는 깊은 지하에 마련된 공간에서, 수백 개의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이 그를 보았고, 그가 화면을 보았다.
광기의 신자가 권능을 사용할 조건은, 그것으로 충족되었다.
“하면 되나?”
물음에 답해야 할 사람은 수염을 꺼내놓고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천생 학자인 아즈란이 이 흥미로운 공격을 그냥 넘어가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자 단위의 관찰과 분석을 위해 준비 중이었다.
준비가 끝난 아즈란이 말했다.
“해버려.”
무정이 권능을 사용해 유정의 광기를 억눌렀고, 유정이 광기의 권능을 사용했다.
광기의 권능이 뇌충 네트워크를 타고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