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72
72
재앙 연합
상대적으로 덜 지친 이성철이 휘헌을 짊어졌고,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돌아갔다. 발을 움직이며 이성철이 현에게 물었다.
“종족의 언이 없다는 말. 진짜인가?”
“왜, 관심 있어?”
“당연하다. 그런 게 정말 있다면, 나에겐 사용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그렇겠지. 근데 없어.”
“뭐?”
“아까 말했잖아. 그런 게 있으면 강제 징집으로 진작 써먹었을 거라고. 왜 위원회가 피 흘려가며 마신을 잡아야 하는데, 엘프랑 요정을 갈아 넣고 말지.”
이성철이 미심쩍은 눈으로 현을 보았으나, 이내 관심을 껐다.
현은 이성철을 무시하고 달리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종족의 언이 있느냐고? 당연히 있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종족신이 왜 종족신일까.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 자연적인 신비한 종족 같은 성가신 이름까지 붙여가며 서로 다른 종족들을 하나로 묶었을까.
간단하다. 그들을 묶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묶어서 불러야만 했었던 시대가 있으니까.
종족신은 다른 재앙과는 다르다. 과학이 부릴 수 있는 건 과학의 신자들이고, 그들은 종을 가리지 않는다. 시간이 부릴 수 있는 건 시간의 신자들이고, 마찬가지로 그들은 종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종족이 신자가 될 수 있으며, 그들은 더 직급 높은 신자의 명령을 받는다.
그래서 보통 재앙은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다. 과학과 마신 때도 그랬다. 적은 재앙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그 구성원은 제각각이었다.
투신과 조율의 신은 다르다. 두 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자는 오직 그들 종족에 속한 사람뿐이다. 전의가 피에 흐르는 자들만이 투신의 신자가 될 수 있고, 자연적인 신비한 종족만이 조율의 신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만으로는 재앙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단일 종족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그 종족이 가지는 약점을 그대로 가진다. 권능으로 가려보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이성철이 요정살의 검으로 요정을 썰어버렸던 것처럼.
그래서 종족신은 물량을 택했다. 일곱 번째 재앙 투신은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을 부렸고, 열두 번째 재앙 조율은 자연적인 신비한 종족을 부렸다.
일곱 번째와 열두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는 각자 한 묶음의 종족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 지배의 힘을 언어의 형태로 치환한 것이 종족을 지배하는 언어, 종족의 언이었다.
죽은 조율의 신자의 말대로 현은 엘프의 종족의 언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은 한 번도 종족의 언을 사용한 적이 없다. 종족의 언의 존재는 논란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일전에 현이 불러낸 외물은, 소환 주문을 읊는 것만으로 재액으로 취급될 만큼 위험한 존재지만 막을 방법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종족의 언은 쓰기에 따라 한 종족의 존망이 달라지는 위험한 주문이다. 종족의 언은 있지만 있어서 안 되고, 있지만 쓰여서도 안 된다.
애초에 종족의 언은 화신의 힘 중 하나였고, 화신이 사라지며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당대 조율의 성인이 너무 뛰어난 탓이었다. 지나치게 뛰어난 그녀의 자질이 있어선 안 될 언어, 종족의 언을 그녀의 머리에 불러들였다.
조율의 영혼과 함께 그녀의 머리에 들어온 지식은 지울 수도 없었다. 그녀는 종족의 언이 유출됐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그녀는 대비책으로 현을 선택했다.
뤼필은 자신이 고문당해 종족의 언이 유출 됐을 때를 대비해 현에게 종족의 언을 알려주었다.
현은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인선이었다. 현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종족의 언을 악용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지나친 악행, 악업을 쌓으면 그게 그대로 돌아와 자신의 목을 조를 테니까.
그렇게 현은 종족의 언을 알게 되었다.
***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호르스는 이미 싸움을 끝낸 뒤였다. 싸움의 흔적은 장렬했다. 시체들의 흔적에서 현은 호르스가 도망가려는 자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인 걸 알았다.
싸움터 반대 방향으로 기어가다 시체의 손톱 밑에 낀 진흙과 긁힌 땅의 흔적에서 목 없는 시체의 간절함이 보였다.
“놓친 건 없나?”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처리했습니다.”
깔끔한 호르스의 양복은 학살을 벌인 사람으로는 도저히 안 보였다.
“휘헌 양은 무사히 되찾은 것 같군요. 그쪽은 어땠습니까?”
“깔끔하게 처리했다.”
“한 명쯤 남겨 두시지 않고.”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조금 있다 질리도록 볼 텐데.”
“뭐, 그냥 해본 소리였습니다. 휘헌 양은 이쪽으로 주시죠. 두 분이 사자대에 휘헌 양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에이네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의사라는 명목으로 휘헌과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얼굴이 알려진 두 사람은 달랐다.
현과 이성철의 존재를 아는 건 호르스와 휘헌이 전부였다.
휘헌을 어깨에 걸친 호르스가 말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지금도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려대고 있어서요.”
호르스가 빠르게 사라졌고, 그가 지난 길을 천천히 현과 이성철이 뒤따랐다.
“저쪽도 끝났겠지.”
현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양자폰을 꺼내기 무섭게 벨이 울렸다. 이 시점에 전화를 걸 사람은 에이네밖에 없었다.
-헌이는! 헌이는 무사한 거지?!
“헌이라니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
-닥치고 대답이나 해!
“지금 호르스가 데리고 가고 있으니까 직접 확인해. 역병과 과학이 또 무슨 수를 썼을지 모르니까 정밀 검사도 해보고.”
-그건 당연한 거고. 아, 저기 온다.
에이네가 호르스를 발견했는지 전화가 끊어졌다. 소박맞은 현은 이성철을 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군.”
“처음으로 동성 친구라 부를만한 사람이 생긴 거니 좋기도 하겠지. 너도 소환 초기에는 비슷했잖아?”
“그렇지.”
소환 초기, 지구의 기억을, 그것도 인간관계에 관한 기억만 잃고 떨어진 세계는 사무치게 외롭다. 혼자 숲에 떨어진 현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인들과 튜토리얼부터 시작한 이성철도 밤마다 찾아오는 외로움에 몸서리친 기억이 있었다. 사람과 함께한다지만, 생판 타인과 가족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기억의 빈자리를, 그 빈 온기를 채워주지 못했다.
차라리 모든 기억을 잃었으면 싶을 정도로 텅 빈 혈액을 운반하는 심장은 시렸다.
에이네의 사정도 소환자들과 흡사했다. 방대한 지식,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있지만 에이네에게는 관계가 없었다. 에이네의 대화 상대는 이때까지 현과 이성철이 전부였다. 휘헌은 에이네에게 생긴 첫 동성 지인, 첫 동성 친구였다.
“처음 사귄 친구가 죽었을 때의 심정은 끔찍하지.”
“그건 잘 모르겠군. 나는 배신만 당해봐서.”
둘은 서로의 운명이 기구하다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
납치당했던 휘헌의 몸에 이상은 없었다. 에이네는 그녀의 몸에 있는 작은 흠결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유전자 단위의 신체검사를 실시했다. 휘헌의 몸은 납치당하기 전과 그대로였다.
그걸로도 성에 안 차는지 에이네는 현에게 조르고 졸라 건강 기원의 주술까지 휘헌에게 걸어주고 나서야 만족했다.
“어디 아픈 덴 없어?”
“지금 당장이라도 훨훨 날아갈 것 같은데요.”
극성맞은 에이네의 태도에 휘헌이 쓰게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네는 다시 한번 휘헌의 몸을 검사했다. 방심하고 있었더라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에이네는 휘헌을 지키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고, 방심은 없었다.
그게 에이네의 가슴에 상처로 남았다. 지켜야 하는데 지키지 못했다.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리프턴에서 현에게 시험받으며 느꼈던 것이 분함이라면, 이건 자책이었다. 자신 때문에 하마터면 휘헌이 죽거나, 그보다 더 끔찍한 꼴을 당할 뻔했다.
휘헌이 없다는 걸 확인했을 때는 심장이 철렁했다. 다시는 느끼기 싫은 감각이었다.
-그렇게 과보호해서야 본진을 칠 수나 있겠어?
떨어진 곳에서 현이 말을 걸어왔다. 현재 현과 이성철은 저택에서 쫓겨나 있었다.
휘헌이 납치당했다. 비록 무탈하게 끝나긴 했지만 사자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들은 휘헌의 밀착 호위를 시작했다.
침실 바로 밖에서 지키고 있는 사자대의 눈을 속이며 저택을 드나드는 건 전 지구최강과 다회차 회귀자에게도 어려웠다.
두 사람은 현재 저택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저택 전체를 감시하고 있었다.
-누가 안 간대. 갈 거야.
호르스가 억지를 부리면 사자대를 물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은 에이네의 기술보다 사자대의 호위가 더 필요했다.
현과 이성철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근원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 도주술과 추적술은 필수였고, 당연하게도 셋은 추적술을 상당한 수준으로 익히고 있었다.
대규모로 움직인 적의 동선을 역추적하는 것도 못 하면 모략이 난무하는 근원 세계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다.
현재 습격자들이 왔던 길을 역추적하는 건 거의 끝났고, 그들의 본거지까지 추측이 끝나 있었다. 남은 건 하나.
반격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 인원으로 괜찮겠습니까? 숨겨둔 패가 몇 개씩 있다고 해도 상대는 재앙 세 개 입니다.”
“재앙끼리의 협력, 기술 제휴는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겠지. 그 가능성이 어떤지 봐두지 않으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죽을 뿐이야.”
적의 본진을 찾고 현이 내린 판단은 소수 정예의 습격이었다. 숫자는 일행 셋에 호르스를 포함한 넷. 그게 전부였다. 호르스의 말대로 적의 규모를 생각하면 무모한 감이 있다. 그래도 현은 의견을 꺾지 않았다.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과학의 변화는 시작이라는 걸.”
“그 위험성 때문에 의견을 드리는 겁니다. 지구 최강 김우현이 고작 잔챙이들에게 죽으리란 생각은 안 들지만, 만약 김우현 님이 죽으면 위원회의 막대한 손실입니다.”
“리센의 손실이겠지.”
“같은 말 아니겠습니까.”
에이네를 제외한 셋은 이번 사태에서 과학에 집중했다. 조율은 현을 쫓아 왔다가 우연히 곁다리를 걸친 거니 큰 비중은 없다. 중요한 건 과학과 역병, 그중에서도 과학이다.
역병과 과학은 사이가 나빴다. 과학 기술 앞에 역병의 권능이 모두 무력화되니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과학의 얼굴은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 만능 백신을 만들고 만능 살충제를 만들 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했다.
그걸 보여준 것이 휘헌이 중독된 독이었다. 분자 단위로 제거해야 하며 유전자 변형까지 일으키는 극악한 독.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역병과의 제휴만이 아니다. 시간, 조율, 죽음, 투신. 과학은 모든 재앙과 적대할 수도, 협력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열세 번째 재앙 과학이 가진 신자들에 대한 절대 지배권은 과학의 화신이 죽으며 사라졌다. 근원 세계 각지에 떨어진 과학의 신자들에게 자율성이 생겼고, 신자들은 자기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과학의 기술과 다른 재앙이 합쳐졌을 때, 마법의 영역에 달한 기술과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권능이 합쳐졌을 때 탄생할 산물이 뭔지는 과학이면서 마력과 가장 가까이 있는 에이네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번 일은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시도할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았다. 단 한 명, 에이네는 순수한 복수가 목적이었지만.
사자대에게 휘헌을 맡기고 넷은 적의 본거지로 향했다. 추적술을 통해 밝혀낸 장소는 도시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의 지하였다.
“이 아래란 말이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마력 아껴라.”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내 손으로 모조리 때려잡고 싶으니까. 그럼 간다.”
현의 말에 대꾸하며 에이네가 주먹에 검은 강기를 둘렀다. 한 방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 하나로 최초의 일격은 에이네가 맡게 되었다.
에이네가 격파를 하듯 땅에 주먹을 댔다가 들어 올렸다. 현은 바람의 정령으로 몸을 띄웠고 이성철은 자세를 낮췄다. 호르스의 몸도 땅에서 살짝 떠올랐다.
당겨졌던 에이네의 주먹이 땅에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