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057
1057화 감히 주도권을 쥐려고 하다니
수상한 남자는 더 이상 진양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길거리 한쪽으로 물러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흑포인을 응시했다.
누군가 길거리에 있다는 걸 느낀 걸까?
흑포인의 손에 들려있던 우산이 핑 돌아가는 듯싶더니 우산살 가장자리에서 붉은 밧줄이 여러 갈래 튀어나왔다.
우산 손잡이 쪽에 달린 방울이 흔들리며 기괴한 소리를 뿜어냈다.
이 기괴한 방울 소리는 금세 텅 빈 거리를 가득 채웠다.
이 층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진양은 방울 소리를 듣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양은 정신을 집중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방울의 효과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우산을 든 흑포인은 수상한 남자는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스치며 지나가 버렸다.
하지만 그가 스쳐 지나가기 무섭게 수상한 남자의 일곱 구멍에서 은은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영혼의 기운은 마치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불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 빛은 흑포인의 뒤로 몰려들었고 다소 굳은 얼굴의 노파의 형상을 이루었다.
반투명색에 은은한 푸른 빛을 뿜어내는 노파는 조용히 흑포인의 뒤를 따라 거리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거리에 남아있던 수상한 남자는 풀썩 쓰러져버렸다.
마치 영혼이 완전히 증발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두 눈은 텅 비어있었다.
이성의 파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창가에서 남자의 모습을 살피고 있던 진양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는 완전히 숨을 거둔 모습이었다.
하지만 분명 몸에서 빠져나온 건 남자의 영혼이 아닌 인간 노파의 영혼이었다.
그렇게 대략 일 다경 정도 지났을 무렵.
남자의 몸에 활력이 돌며 이성의 파동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맺혀있던 서리가 떨어져나왔다.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이 층에 있는 진양을 바라보며 팔을 휘둘렀다.
“진양, 절대 잊지 않겠다! 네 녀석은 절대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게다!”
“볼일 다 봤으면 얼른 떠나기나 하세요. 괜히 시끄럽게 꽥꽥대지 말고요.”
진양은 피식 웃으며 주루 안쪽으로 소리쳤다.
“점소이!”
“손님, 부르셨습니까?”
진양은 품속에서 한 다발의 은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있는 방 전부 다 삼십 일 더 연장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죠?”
“물론입니다.”
여전히 굳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신이 난 듯한 점소이였다.
“손님, 혹시 술 더 필요하십니까? 요리사들은 모두 쉬러 들어가서 지금은 술밖에 없습니다.”
“괜찮아요. 한 주전자 더 주세요.”
“알겠습니다. 곧바로 대령하겠습니다.”
진양은 아래쪽을 힐끔 바라보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단숨에 남아있던 술을 모두 마셔버린 진양은 지난 밤에 묵었던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남는 게 방이니. 내킬 때마다 바꿔도 되겠지.’
* * *
다음 날.
방에서 나와보니 남자가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한가득 음식을 주문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단 한 젓가락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진양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건너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진양, 술과 음식은 내가 이미 모두 시켜두었소. 일단 좀 먹으면서 잠시 얘기를 나눠도 괜찮겠소?”
그의 말투는 지난 밤에 비해 훨씬 완곡해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돌변한 녀석의 태도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아무리 대의를 위해 희생을 하는 경우에도 물러설 때를 구분할 줄 아는 법이다.
하지만 요괴는 그렇지 않다.
지난밤에 그런 일을 겪고도 아침이 되자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나타나다니.
이건 요괴가 아니라 사람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앉아있는 남자에게선 사람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모부터 그가 가진 힘, 기운, 기세까지.
모든 것이 그가 인간이 아닌 요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인간의 땅에 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요괴인 게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진양은 상석이 아닌 다른 자리에 앉았다.
상대 역시 상석은 비워둔 채 진양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부분은 인간이 아니고선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진양, 사실 우린 서로에게 원한을 진 것도 아니잖소. 기껏해야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얘기해 주지 않은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올 필요는 없지 않겠소?
원한다면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겠소. 많은 걸 바라진 않겠소. 그저 방 하나만 나눠주면 충분하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애초에 당신은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제게 말해줘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전 절대로 소심하게 복수를 하는 게 아닙니다.”
진양의 말에선 일말의 가식이나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양은 진심이었다.
절대 녀석이 밤에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얘기해 주지 않았다고 해서 복수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이곳의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면 진양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약속대로 남자의 부탁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목숨을 빚지게 되면 여러모로 손해다.
이런 빚은 쉽게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진양이 쉽게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곤 했지만 그게 어떤 부탁일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부탁을 할지도 모르는 법.
남자는 다소 의외라는 듯 한참 동안 진양을 쳐다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먼저 얘기해 보시오. 어떻게 하면 방을 하나 내어주겠소?”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 준다면 오늘 밤 방 하나를 내어주도록 하죠.”
밤에 묵을 곳 없이 거리를 떠돌게 된다면 영혼을 또다시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밤 남자는 흑포인을 발견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성질머리를 보아 이미 진작 반항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반항하지 않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좋소. 사실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오. 그저…….”
남자는 미련 없이 곧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불려 했다.
그러나 진양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말을 막았다.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닙니다.”
진양은 자신의 잔을 채우며 물었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대답만 하시면 됩니다.”
“일단 성의라도 보이는 차원에서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부터…….”
남자는 끝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얘기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진양은 한층 더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얘기하죠. 지금부터 제가 묻는 것만 대답하면 됩니다. 잘 알아들었습니까?”
남자는 그제서야 단념한 듯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물어보시오.”
진양은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진양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단 한 번도 주도권을 빼앗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진양 앞에서 감히 주도권을 움켜쥐려고 하다니.
아직 제대로 된 질문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보루를 꺼내놓는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다.
모든 걸 단념하고 순순히 부는 것이든지, 아니면 진양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지만 상대는 극도로 신경 쓰는 무언가 있는 것이든지.
더 큰 비밀을 지킬 수 있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은 그것보다 작은 비밀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곳곳에서 자주 발견된다.
가장 큰 예로 오지도와 유령호를 예로 들 수 있다.
누군가 검둥이의 봉인된 왼손을 이용하여 또 다른 비밀을 덮으려 했던 것만 봐도 그렇다.
검둥이의 왼손 정도라면 모든 이들의 시선을 돌리고도 남을 테니까.
상대가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전혀 필요 없는 행동이다.
왠지 사족을 더하는 느낌이랄까.
“당신의 정체가 뭡니까?”
상당히 간단한 질문이었으나 상대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지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많은 이름과 신분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다만 맨 처음에는 이역지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마지막엔 백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소.”
‘이역지, 백령이라…….’
두 이름 모두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사실 이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불과했다.
진양은 애초부터 그를 믿을 생각이 없었다.
“내게 무슨 부탁을 하려고 했던 겁니까?”
백령은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진양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까다롭게 나오는 진양의 모습에 백령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감히 진양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진양은 단순히 간을 보려고 나가는 척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백령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기다려주시오. 대신 다른걸…….”
백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 수 없는 기괴하고도 강한 기운이 나타났다.
주루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괴인들은 전부 하나같이 멈춰 서며 백령을 바라보았다.
백령은 새파랗게 질린 채 비틀거리며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옅은 안개는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하늘엔 마을의 모습이 걸려있었지만, 길거리엔 단 한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비어있는 거리 한가운데 물고기의 머리와 교룡의 꼬리, 그리고 여섯 개나 되는 팔을 가진 괴물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든 채 백령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에 걸린 거꾸로 비춰진 대지 위로 한 줄기의 푸른 벼락이 떨어져 정체불명의 괴물을 강타했다.
머리 위에 벌어지는 상황을 확인한 백령은 빠르게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거꾸로 비춰진 마을에 있던 괴물도 백령처럼 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그러나 번개는 마치 누군가 조종을 하는 것처럼 방향이 꺾이며 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괴물이 번개에 맞는 순간 백령의 장포가 심하게 뜯겨나갔고 온몸에 상처가 났다.
지면에 그대로 꼬꾸라진 백령은 엄청난 고통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두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했으나 목에는 새파란 힘줄이 일어났다.
뒤늦게 주루 밖으로 나온 진양이 본 것은 이러한 광경이었다.
기괴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떤 힘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진양은 백령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고 거꾸로 비춰진 마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백령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괴물이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녀석의 몸에선 검푸른 번개가 번쩍이고 있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