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075
1075화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를 완벽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일부 강자들에게 죽음이란 일종의 생(生)과 대치하는 상태에 불과하다.
이런 녀석들은 그동안 꽤 많이 봤었다.
그러므로 백귀를 완전히 처치하기 전에는 결코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괜히 방심했다간 기대했던 것과는 정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첫 번째 검증은 끝났다.
하얀 초롱이 습득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건 곧 그것이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귀의 이성이 완전하게 소멸했다고 볼 순 없었다.
습득 가능 상태는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물건의 주인의 이성이 소멸되며 물건이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둘째, 물건의 주인이 자발적으로 물건의 소유권을 포기했을 때.
두 번째의 경우 자발적으로 진양에게 소유권을 양도했을 때도 포함된다.
단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반드시 직접 마주 보며 소유권을 넘겨야 하고, 진양도 소유권을 넘겨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한다.
일단 상대가 자발적으로 소유권을 넘겼을 확률은 무에 가깝다.
그렇다고 소멸을 눈앞에 둔 백귀의 이성이 자초지종도 모른 채 갑자기 소유권을 포기했을 리도 없다.
그러나 하얀 초롱은 백귀를 가짜 세계 안으로 밀어 넣어 속이는 과정 중에 존재하는 가장 큰 빈틈이라고 할 수 있다.
새하얀 이성 밖으로 나와 들어선 곳은 새까만 심문 세계가 아닌 몽경으로 만들어낸 심문 세계였기 때문이다.
새까만 심문 세계에서 심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가장 먼저 하얀 초롱과 마주하게 된다.
이때 진양은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백귀가 진양의 판을 단숨에 꿰뚫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얀 초롱이 신통력을 통해 만들어낸 것이라면 다시 거둬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비록 환영을 통해 세 번째 비경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결국 백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성을 기반 삼아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통력까지도 진짜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진양도 마찬가지다.
환영이나 몽경 속에 빠지게 되면 진양 역시도 자신이 어떠한 수에 걸려든 건지 구분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습득 능력 하나뿐이다.
능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은 현실이지만, 반대의 경우 환술이나 몽경 속에 갇힌 것이다.
다행히 백귀가 떠난 후 하얀 초롱을 거두었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자신이 자신을 속인 것이다.
스스로 하얀 초롱을 거두었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어서 수십 년 동안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받았던 것도 백귀의 이성이 자신의 본체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붙잡아두었던 것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얀 초롱은 보물이라는 사실과 허상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신통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얀 초롱에 허점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하얀 초롱이 계속해서 비춰져야만 심문이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초롱이 파괴되거나 꺼진다면 진양은 자신의 심문 안에 갇히게 된다.
진양은 그곳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 자칫하다간 영영 그곳에 갇혀버리는 수가 있는 것이다.
묵양과 분신을 남겨둔 건 이번 일에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사시 묵양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분신을 남긴 것이다.
머리를 쓰는 건 분신에게 맡기고 남은 건 묵양이 처리하도록 말이다.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은 없었다.
겉으로는 심문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얀 초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다급하게 계획을 짜긴 했지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갔다.
하얀 초롱을 습득해 본 건 계속해서 계획을 실행해도 무방할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습득이 가능하다면 백귀의 본체를 찾으러 갈 때의 위험도도 수긍 가능한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미 은원은 맺어졌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언젠간 큰 걸림돌이 되고 말 것이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백귀의 본체를 제거할 방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얀 초롱은 일단 챙겨뒀다가 나중에 천천히 연구해 보기로 했다.
진양은 진판을 다시 회수하고 바깥을 살펴보았다.
딱히 눈에 띌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심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유명성종과 우두머리 귀신은 여전히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싸움은 당분간 계속해서 이어질 듯했다.
이제 백귀의 본체를 찾아 움직여야 한다.
물론 우두머리 귀신에게 발각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괜히 녀석의 주의를 끌었다간 어쩔 수 없이 녀석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그랬다간 유명성종이 한층 더 날뛰게 될 것이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황천마종을 노리게 될 것이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유명성종을 제거할 계획까지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상황이 이렇게까지 발전한다면 본래 황천마종을 발전시키려던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많은 이들이 황천마종을 주시하게 될 테니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식으로 상황이 흘러가는 건 막아야 한다.
작은 불씨 하나만으로도 연쇄 반응이 일어나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우두머리 귀신에게 발각되어선 안 된다.
일단은 지금처럼 유명성종과 우두머리 귀신이 계속해서 싸우도록 놔두는 게 최선이다.
* * *
진양은 묵양을 해안에 집어넣은 뒤 모든 기운을 감추었다.
그리고 몸을 숨긴 채 조용히 홀로 세 번째 비경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략적인 위치를 찾았다.
이어서 입구로 추정되는 동굴도 찾아냈다.
입구를 따라 하루 정도 들어가다 보니 마침내 어느 한 장소에 도착했다.
짙은 음기와 귀기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느껴보니 우두머리 귀신이 남기고 간 기운인 듯했다.
남겨진 기운을 따라 계속해서 안쪽으로 향하니 먼지가 두텁게 쌓인 석문이 나타났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석문이었다.
대략 이 장 정도 되는 높이의 석문은 구불구불한 길 끝에 있는 석벽에 박혀있었다.
석벽과 같은 색의 석문은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먼지까지 더해지며 멀리서 보면 석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른다면 이것이 석문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챌 수 없을 듯했다.
진양은 진판을 꺼내 이곳을 완전히 밀폐시킨 뒤 묵양을 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석문을 입술로 가리켰다.
“석문에 달라붙은 먼지만 좀 제거해줘. 석문까지 부수지 않게 조심하고.”
잠시 석문을 살펴보던 묵양은 자신이 직접 손을 쓰는 대신 도구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배에 달린 뚜껑을 열자 네 개의 곡도를 든 인형이 튀어나왔다.
인형은 곡도를 휘두르며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챙- 하며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인형의 손놀림은 상당히 세밀했다.
마치 두부를 얇게 포를 뜨는 것처럼 정확하게 석문에 쌓인 먼지만 깎아내렸다.
하지만 세밀한 손놀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동작은 상당히 신속했다.
덕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먼지가 모두 걷어내지며 석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석문엔 인물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잠시 살펴보려는 순간 인형이 다시 쌩- 하고 달려 나가며 곡도를 휘둘렀다.
순간 회색 석문 위로 작은 틈이 벌어졌다.
그곳에선 피와 같은 새빨간 액체가 흘러나왔다.
짙은 살기가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흘러나오며 주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와는 모순되게도 마치 파도가 휘몰아치는 것처럼 육신과 영혼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느낌이 났다.
이어서 쩍- 하며 틈이 벌어지고 표면이 떨어져나왔다.
시냇물처럼 졸졸 흘러나오던 살기는 거대한 해일처럼 터져 나왔다.
미쳐 손 쓸 틈이 없었다.
열심히 곡도를 휘두르던 인형은 강한 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며 사라져버렸다.
진양은 빠르게 묵양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밤하늘에 걸린 상고 잔월을 끌어당겨 앞을 가로막았다.
강렬한 살기는 다행히 상고 잔월의 힘에 의해 가로막혔다.
겉 부분이 떨어져나오며 석문에 새겨진 조각상의 형상은 한층 더 뚜렷해졌다.
석문에 한 폭의 그림이 나타났다.
어두운 세계 가운데 다 떨어진 붉은 장포를 입은 대머리가 날이 부러진 흑철대검을 들고 등지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붉은 선혈이 대검을 따라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진양 일행을 등지고 서 있던 대머리가 대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온 세상은 허공으로 변했고, 대머리가 홀로 등진 채 그곳에 서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붉은 검강이 천지를 갈랐다.
마치 세계 자체를 두 동강 내버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묵양은 무표정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검강이 몸에 닿기도 전에 그의 몸에 있던 혈육 위장은 전부 찢겨져 나가버렸다.
묵양의 눈앞에서 빛이 빠르게 번쩍였다.
그의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기이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사람의 형상에서 수천 개의 발이 달린 벌레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천지를 가르며 붉은 검강이 다가왔다.
검강은 하나로 모여 붉은 대검의 형상을 이루며 묵양을 강타했다.
치지직-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강은 일 다경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사라졌다.
완전히 뒤바뀌었던 주위의 모습도 다시 진법 안의 세계로 돌아왔다.
묵양은 잔상을 남긴 채 뒤로 날아가 버렸다.
잠시 후, 진법 공간 전체가 뒤흔들렸다.
하마터면 묵양에 의해 진법에 큰 구멍이 생길 뻔했다.
석문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살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겉보기엔 평범한 석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석문엔 누군가의 뒷모습 윤곽이 드러났다.
세밀하게 조각되지 않은 탓에 다소 흐릿하게 보였다.
몇 다경 후.
묵양이 다시 돌아왔다.
어느덧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와 혈육 위장까지 걸친 모습이었다.
겉보기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전혀 지친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전의 일격은 묵양이 진양을 따라나선 이래로 맞아본 가장 강력한 일격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지금까지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두 번째 형태로 변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번째 형태는 보통 상대를 죽일 때만 사용한다.
방어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게 아니라 살상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방어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두 번째 형태로 변신한 듯했다.
묵양의 눈빛이 반짝였다.
상당히 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진양은 그런 묵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너무 분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저 사람이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거든. 비록 진짜 사람이나 이성을 남겨놓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막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검둥이의 본체 기억하지? 저 사람은 죽은 상태로도 전성기의 검둥이를 토막 내버린 고수가 틀림없어.
그러니까 이 정도로 버틴 것만 해도 잘 해낸 거야.”
묵양은 잠시 고민에 빠진 듯하더니 이내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