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085
1085화 퇴로는 이미 확보해뒀다
백령은 동해 바닷길을 따라 북쪽으로 쭉 올라갔다.
대영을 빙 돌아 대연으로 들어섰고, 이어서 대연을 가로질러 극북빙원에 있는 영야의 땅에 도착했다.
일전에 확인한 동거울 속의 장면엔 어둠으로 가득한 황야와 새하얀 서리가 낀 흔적이 보였었다.
대략 시간을 계산해 보니 낮인 듯했다.
지금은 여름이라 낮이 길다.
아무리 극북빙원이라고 해도 어두운 밤일 리는 없다.
여러 가지 조건을 따졌을 때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건 대황 전체를 통틀어 영야의 땅이 유일하다.
백령은 동거울을 쥔 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처를 느껴보았다.
그리고 대황 쪽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망할 신조 놈들이 그의 거울 조각을 빼앗아가지만 않았다면 이토록 개고생을 하며 거울 조각을 훔쳐 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곳이 그렇게까지 변해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상고 지부 조각부터 우산을 든 흑포인까지.
전체적으로 회복 추세에 들어선 모습이었다.
대영 신조에 진 이 빚은 절대로 이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마침 진양 그 망할 녀석도 대영 신조의 사람이다.
“기다려라. 이 빚은 반드시 되갚아주마!”
* * *
“도무지 잠잠할 틈이 없네요.
사해황막의 일은 일단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전씨 노조가 힘을 좀 써준 모양이던데 이것 역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 노인네 제게 꽤 많은 빚을 졌었거든요.
게다가 이 일은 그 노인네보단 제이검군 형님께서 더 큰 힘을 써 주셨을 겁니다. 전씨 노조의 성격상 먼저 나서서 도와줄 위인은 아니거든요.”
진양은 편안하게 앉아 영과를 먹으며 가희와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럼 사해황막 쪽은 일단 내버려 두도록 할게요. 다만 사람을 조금 보내 당신의 수하를 돕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듣자 하니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더라고요.”
가희는 진양의 곁에 앉아 영과를 깎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 소저에게 손을 벌릴 정도는 아니니까요.”
진양은 이제 막 깎아진 영과를 하나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소저도 하나 드셔보세요. 엄청 달아요.”
가희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한 조각 집어 입속에 넣었다.
“외층 공간의 일도 어느 정도 두서가 잡혔어요.
외층 공간에 있던 자들이 소식을 주고받던 자들은 대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일단 혈란이 직접 조사를 벌이며 순천사를 재정비하고 있어요. 다만 외층 공간에 소식을 흘리던 자가 대연과 연관이 있다는 단서가 발견됐어요.”
진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니까 내부 첩자가 대연 사람이라는 거군.’
가희가 아무 확신 없이 이런 말을 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확실했다.
다만 대연 황실과 관련이 있는 건지, 단순히 대연 사람과 관련이 있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이는 결코 같은 상황으로 볼 수 없다.
“게다가 어제 막 들어온 밀서에 따르면 대연 대제의 수명이 이제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고 해요. 아마 올해 안으로 죽을 거라고 하네요.”
진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제야 알겠군. 추격수에게 정보를 넘겼던 첩자는 분명 대연 황실과 관련 있는 자가 확실해.’
대영은 이제 막 새로운 대제가 등극했기 때문에 아직 기반이 연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영에 혼란을 일으키면 대연 입장에선 무슨 일이든 벌어기 쉬워진다.
아니, 어쩌면 대영이 대연에 눈 돌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무사히 대제의 죽음과 새로운 대제 등극의 시기를 넘기기 위해서 말이다.
어느 쪽으로 보던 충분히 말은 된다.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문득 일전에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던 사람이 순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녀석은 도대체 어디에 숨은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순목은커녕 장정의조차 아무 소식이 없었다.
대영 신조, 남만, 동해, 남해 할 것 없이 대영 신조의 정보망과 진양의 정보망이 쫙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괴산 쪽 상황은 좀 어때요?’
현재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영제의 본존이다.
지금으로서 가장 큰 위협이 될 만한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와 비교하면 순목과 백령은 양반이다.
이 외에 잡다한 인물들도 아직은 무시해도 될 수준이다.
당장 진양에게 치명상을 입힐 만한 실력을 가진 자는 영제가 유일하다.
그가 정말로 일념의 바다에서 기어 나온다면 그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자결을 지금보다 열 배나 더 강하게 펼친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실력 차이를 극복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어느 정도 조짐은 있지만, 아직 확실하진 않아요. 우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응백 소저는 괴산의 산귀잖아요. 저희보다 한발 먼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 같아요. 아마 조만간 일념의 바다가 안정되며 다시 길이 열릴 거예요.
일단 응백 소저가 버티고 있는 한 설령 아직 신조 내에 영제의 충신이 남아있다고 해도 제가 깔아둔 덫을 모두 피해 괴산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일념의 바다로 들어가는 건 더더욱 불가능할 거고요.”
가희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다만 기껏해야 시간을 끄는 거에 불과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만큼은 그 누구보다 영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요.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는 언젠간 밖으로 빠져나올 거예요. 단순히 탈출하는 게 아니라 한 단계 더 해탈한 모습으로 걸어 나올지도 모르죠.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영제가 나타나기 전에 봉호의 경지에 오르는 것뿐이에요. 그렇게 되면 신조의 힘도 한층 더 강력해지겠죠. 영제는 더 이상 신조의 힘을 받지 못할 테니 제 앞에 힘없이 무릎 꿇고 말 겁니다.”
가희는 영과를 깎으며 마치 일상 잡담을 나누는 듯한 모습이었다.
신나게 영과를 집어 먹던 진양은 우뚝 멈춰 섰다.
가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영제를 꺾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최대한 빨리 봉호도군에 오르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말한 최대한 빨리는 어쩌면 겨우 수십 년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도군에게 수십 년은 그저 잠깐의 폐관, 혹은 아무 공법 하나 깨우칠 시간에 불과하다.
진양은 이제 막 도궁에 올랐다.
대략적으로 계산해 봐도 백옥 신문을 개방하는 데 순수하게 필요한 폐관 시간만 해도 수백 년이다.
만약 가희가 정말로 수십 년 내에 봉호도군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건 그녀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만큼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수준의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말이다.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수명이 다하여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인생은 길게 봐야죠. 겨우 영제 하나에 인생을 걸 필욘 없잖아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대황 세계에서 도망치면 되죠.
제가 데리고 있는 녀석 중에 다른 대세계에서 온 녀석이 있거든요. 정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서 충분히 실력을 쌓고 다시 돌아와 영제를 치면 되죠.
살아있다면 뭐든 할 수 있겠지만 죽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진양은 들고 있던 영과를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목숨을 걸어야 할 때 진양은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하지만 그건 딱 자신까지다.
주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희생되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
그러나 가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진양이 한층 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퇴로는 이미 확보해뒀으니까요.
소저의 기반을 신조에 두지 말고 단순히 신조의 힘만 사용하라고 했던 것도 이것 때문이에요. 그래야 신조를 잃어도 기반에는 아무런 영향이 가지 않을 테니까요.”
“정말인가요?”
가희가 진양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물론이죠.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진양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진양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희가 깎아놓은 영과를 집어먹었다.
‘퇴로라…….’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대황 세계를 떠나는 순간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니까.
물론 단순히 위험도만 본다면 영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보단 적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 일은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법.
어쩌면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는 게 영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보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돼지와 검둥이 두 사람 모두 외부인이다.
도망쳐야 할 상황이 된다고 해도 완전히 눈앞이 캄캄한 건 아니다.
사실 이 방법은 최후의 수단이다.
실제로 상황이 닥치기 전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법.
그저 최선을 다해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충분히 역전할 기회를 노려볼 수 있는데 뭐하러 목숨을 내던진단 말인가?
대화는 한참 동안 이어지고 나서야 끝났다.
진양은 가희가 싸준 맛있는 영과를 챙겨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으로 돌아온 진양은 곧바로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다시 대연으로 떠났다.
내부 첩자에 대한 단서를 찾았으니 이젠 직접 나설 때가 되었다.
게다가 곧 다가올 대연 대제의 죽음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큰일이었다.
장례 전문업자에게 신조 대제는 엄청난 고객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황에서 대영 신조를 제외하고 신조라고 불릴 만한 자격을 갖춘 건 대연 신조뿐이다.
대영은 이제 막 새로운 대제가 등극했으니 그렇다 치고, 남은 최대의 고객은 대연 신조의 대제뿐이다.
이런 좋은 일감을 놓치게 된다면 큰 후회로 남을 것이다.
앞으로 장례 관련된 지남서를 제작하려면 이런 경험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물론 이건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이다.
첫 번째로 중요한 건 한시라도 빨리 내부 첩자를 찾아내 죽이는 일이다.
어느덧 대연 신조의 영토에 들어섰다.
이곳에 들어서니 대영과는 사뭇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대연은 지리적으로 썩 좋지 못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우선 남쪽으로는 대영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감히 대영을 건드릴 순 없었다.
그랬다간 뼈저리게 아픈 교훈과 함께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서쪽으로는 요국이 자리 잡고 있다.
대연과 요국의 분쟁은 단 한 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다.
분쟁은 아마도 평생 끊어질 일이 없을 듯했다.
북쪽으로는 극북빙원이 펼쳐져 있다.
환경이 열악한 만큼 범인들은 그곳에서 살 수가 없었고, 범인들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사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율종의 고행 수도사를 제외하면 그곳에 있는 세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동쪽은 동해와 빙해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사정은 그나마 극북빙원보다는 나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열악한 환경이 펼쳐진 건 다르지 않았다.
대연 땅에 들어서니 대영보다 훨씬 더 거친 영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