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150
1150화 진실로 진실을 덮는다
며칠 뒤.
운친왕이 나무 구멍 밖으로 걸어 나왔다.
들어갈 땐 흑발과 백발이 각각 절반으로 나뉘어있던 모습이었으나 다시 밖으로 나온 그는 완전한 흑발이 되어있었다.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온몸에서 힘찬 활기도 느껴졌다.
밖으로 나온 그는 일단 진양의 도궁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나서야 자신의 몸 상태를 천천히 확인해 보았다.
잠시 뒤, 운친왕이 진양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성실히 거래에 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운친왕은 비록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진양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 진양은 이제껏 만나보았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가 이 정도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다른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운친왕과의 거래는 모두 끝났다.
그러나 곧바로 떠나진 않았다.
운친왕이 그를 등극 대전에 초청한 것이다.
진양은 등극 대전 구경도 하고 여러 사람의 얼굴도 익혀둘 겸 흔쾌히 초청을 받아들였다.
이젠 당당하게 본존의 모습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위장은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본존을 드러내기로 한 것도 있다.
진양은 이제 더 이상 나약하던 과거의 진양이 아니다.
본존의 모습으로 직접 등극 대전에 참여하는 것도 일종의 명성을 쌓는 것이었으니 나쁘진 않다.
백 년 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모습이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진양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대영과 대연의 대제를 폐위시켜버렸다.
뿐만 아니라 차기 대제의 등극도 어느 정도 진양의 입김이 미쳤다.
그간의 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제의 죽음으로 인해 대연을 가득 뒤덮고 있던 슬픈 분위기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새로운 대제를 맞이하는 기쁨이 곳곳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물론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 최선일 때도 있는 법이다.
황위 쟁탈전에서 살아남은 건 운친왕이 유일했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운친왕을 인정하고 보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대연 내부에 오랜 시간 이어지던 파벌 싸움과 문제들도 웬만큼 해결이 된 모습이었다.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순 없지만 일단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대다수 사라지고 없었다.
진양은 특별 초청객이었기 때문에 따로 마련된 귀빈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등극 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기에 주위에 있는 신하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대연 예부의 흉을 볼 수밖에 없었다.
관습이 다른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대전에서 사용되는 제기나 부문은 전부 비슷하다.
게다가 대영에서 맡고 있던 관직 탓인지 사방에서 부족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 있자니 고통스러웠고, 아예 시선을 돌리자니 괜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진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서서 대연 예부의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진양의 도움이 더해지자 진척이 없던 대전 준비는 한층 더 속도가 붙었다.
등극 대전은 궁성과 외성이 맞닿은 곳에서 진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대제의 대관식을 직접 보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준비 작업이 어느 정도 된 것 같자 진양은 남은 일을 대연 예부 사람들에게 맡기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등극 대전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성루 지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차피 진양은 특별 손님 자격으로 온 것이었으니 귀빈석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붕에 누운 채 대전 준비 과정을 살피던 진양은 문득 동술을 펼쳐 주위를 살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든 것이다.
아직 대전이 시작되지 않은 틈에 냉정한 진양을 찾아갔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걸.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등극 대전이 가까워질수록 불안함이 커지는 걸로 봐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아. 대제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아. 분명 우리가 모르는 함정을 숨겨놨을 거라고.”
냉정한 진양은 기다렸다는 듯 도표를 펼쳤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정리해봤다. 지금까지 있었던 사례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여러 삼신보술과 공법을 고려해서 만들어봤다.
하지만 크게 염려할 부분은 아닌 듯하다. 운친왕은 오랜 시간 동안 북두성종의 종주를 지낸 사람이잖아. 분명 우리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거야. 게다가 그가 충분히 신중한 사람이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놓친 부분이 아예 없진 않을 거야.
일단 그 갓난아기가 대제가 남겨둔 최후의 보루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다만 그 아이의 몸에서 부활을 할지, 아니면 그 아이를 희생양으로 삼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 외의 것들은 지금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는 추측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미세하게 놓친 부분은 있기 마련이지.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한층 더 강해지고, 더 많은 걸 아는 것뿐이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도 해결책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원래의 진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 봐도 그 아기는 평범한 아기에 불과하던걸. 황실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구석도 없고 말이야.”
“조서에서 언급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특별한 거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 아기가 평범하다는 걸 알게 되니 차마 손을 쓸 수가 없겠더라고.”
“네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면 되지.”
“……결국 무고한 아이가 죽는 건 똑같잖아.”
원래의 진양은 괜한 소리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이런 일은 냉정한 진양과 상의해봐야 별다른 소득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은 대제는 악랄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젖도 아직 떼지 못한 어린아이를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다니.
대화를 마친 진양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동술을 펼치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때, 진양의 시선이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가마에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권세 있는 집안의 누군가 등극 대전에 참가하기 위해 오는 걸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가마의 창문을 가리고 있던 천이 걷혀 올라가는 순간.
진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마 안에는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 앉아있었다.
바로 그 아기였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도대체 누가 이 아이를 등극 대전에 불렀단 말인가?
진양은 제자리에 분신 하나만 남긴 채 허공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뒤.
진양은 한 작은 농장 앞에 나타났다.
동술을 통해 보니 마치 거대한 투명색 물방울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농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은은한 물결이 일어나며 물방울 표면에선 안쪽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진양은 동술을 해제하며 농장 쪽으로 다가갔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황급히 예를 차렸다.
진양이 신임 대제의 초청을 받은 귀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만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농장 안으로 들어가며 진양은 조용히 동술을 펼쳐 발아래를 살폈다.
병사는 신발이 한쪽 벗겨져 있었는데, 발이 푸른색으로 변해있는 것으로 보아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난 듯했다.
진양은 손을 뻗어 병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능력이 반응했다.
그러나 동술을 해제하자 능력의 반응은 사라졌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은 것처럼 말이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능력이 무언가에 의해 제약을 받은 게 아니었다.
일종의 환술을 통해 진양이 동술을 해제하면 평범한 사람을 만진 것처럼 느끼도록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이어서 고개를 들어 맨눈으로 마당 내부를 살폈다.
딱히 수상한 건 없었다.
그러나 동술을 펼친 뒤 살펴보니 허상의 세계가 가림막이 걷어지듯 모두 사라졌다.
농장 안에는 여러 구의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미소를 띤 채 자신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고 있는 장정은 사실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목이 비틀어진 채 죽은 시신이었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인도 사실은 시신이었다.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아이 역시 싸늘하게 식은 시신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조서에서 언급되었던 황족은 아니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동술을 해제했으나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대인, 아기에게 볼일이 더 남으신 건가요?”
아기를 끌어안은 여인은 상당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기의 이름이 조서에서 언급된 이상 눈앞에 있는 진양의 말 한마디에 아기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잘 있는지 잠깐 확인하려고 들린 것뿐입니다.”
진양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한 뒤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농장을 빠져나온 진양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본 뒤 홀연 듯 사라졌다.
이 정도 수준의 환술을 펼칠 수 있는 건 오직 환해 일족이 유일하다.
오직 동술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만 꿰뚫어 볼 수 있는 환술도 환해 일족의 환술이 유일하다.
눈앞에 보이는 농장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물방울은 겉보기엔 환상으로 진실을 가려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즉, 진실로 진실을 가려둔 것이다.
그래서 가려진 진실을 꿰뚫어 보기 전에는 능력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
이게 무슨 원리인지는 진양도 잘 알고 있었다.
모래알 강화를 마치고 남은 보름 정도의 시간 동안 냉정한 진양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계속해서 여러 방면으로 계산과 연구를 이어갔다.
그 중 환세비록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었다.
환세비록은 예전에 얻은 환해 일족의 비장의 공법이다.
다만 이건 환해 일족의 혈맥을 가진 자만이 익힐 수 있었기에 진양은 익힐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연구를 마쳤기 때문에 이 정도로 환술을 펼치려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진실로 진실을 덮는 건 일반적인 수도사가 생각하는 환술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 수준이었다.
방금 농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크게 의심이 가는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
환술을 시전한 사람이 이미 자리를 떠난 것인지, 아니면 동술로도 그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없는데 굳이 그곳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진양이 얻고자 하는 결과는 이미 얻었다.
길거리에서 봤던 그 아기는 분명 조서에서 언급되었던 그 아기가 맞다.
그럼에도 진양이 그를 눈여겨봤던 것은 순간적으로 아기의 몸에 환술이 걸려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있던 그 여인은 분명 아무것도 모른 채 등극 대전을 구경하러 온 게 분명했다.
심지어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아기가 다른 아기로 바꿔치기 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듯했다.
농장을 빠져나오고 나니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정식적인 기록이나 모두들 환해 일족이 대연에 의탁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환해 일족은 대연에 의탁한 것이 아니라 태자에게 의탁한 것이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환해 일족이 정말로 대연에 의탁한 것이라면?
이는 곧 죽은 대제에게 의탁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늘 진실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진실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진실로 진실을 덮는다.
눈앞에 있는 상황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