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149
1149화 이만 황위를 넘기겠습니다
흑백 세계에서 지켜보고 있던 냉정한 진양이 한마디 했다.
“어린아이는 본능적으로 낯선 이를 두려워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오히려 좋아하고 있다. 어딘가 이상하다.”
“그게 뭐? 날 비웃기라도 하는 거 같아서?”
“전혀 실없는 소리는 아니다. 만약 대제가 이 모든 걸 오래전부터 계획한 게 맞다면 모든 사람들의 한계점이 어디인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범인을 살해하는 건 수도사들 사이에서 엄격하게 금지된 일이지. 마찬가지로 한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 역시 대부분의 수도사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모든 수도사들이 결코 넘지 않는 마지막 선과도 같은 것이다. 만약 이를 어겼다간 죄책감이 마음속 깊이 남아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언젠간 이로 인해 입마 상태에 빠지고 말겠지.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미래조차 보장할 수 없을 거고.
그러니 설령 이 아이가 대제가 남겨둔 최후의 보루가 맞다는 걸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손을 쓸 수 없는 거다.
넌 과감하게 이런 일을 해내고도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극소수에 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책감에 차마 손을 쓸 수 없는 대다수에 속하지.”
“물론이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나 진양이 정의롭고 공정하다는 걸 아는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를 수 있겠어?”
그러나 뒤늦게 이상한 걸 느낀 진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지. 대제가 남겨둔 최후의 보루인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해?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를 어떻게 하겠어?
만에 하나 사실이라고 해도 겨우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한 달 만에 도군의 경지에 올라 날 죽이기라도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제는 애초에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일부러 함정을 판 것이다.
그 고약한 늙은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했을 리 없다.
운친왕은 아이의 신분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부모를 불러 약간의 보상을 쥐여주며 아이를 데려가도록 했다.
그 역시 아이의 정체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여러 잡다한 일들이 남아있었지만 전부 진양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뿐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조용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굳이 정식으로 등극을 할 필요도 없다.
예부에서 거행해야 하는 핵심적인 일들도 혼자서 모두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운의 화신과의 거래도 아직 남아있다.
애초에 진양이 필요한 건 명목상의 황위였기 때문에 천하게 이 사실을 고할 필요도 없다.
국운의 화신만 협조해 준다면 단순히 신조의 힘을 부리는 건 크게 문제없을 것이다.
모든 게 순조롭게 이어지기만 한다면 모래알도 무사히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진양과 대연 신조 사이의 거래이기도 했다.
흑백의 세계를 일곱 빛깔의 세계로 바꾸는 계획은 잠시 중단하기로 했다.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이보다 더 안정적인 방법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원래의 진양이 육신에 대한 주도권을 잡는 순간부터 모래알의 붕괴가 이루어진다.
이 속도는 진양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시간에 비례하여 달라진다.
이런 이유로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무에 가까웠다.
아무리 안정적인 방법이라고 해도 사실상 전혀 쓸모가 없어진 셈이다.
차라리 모래알 자체를 강화하여 세계를 대신하는 방법이 훨씬 더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 * *
열흘 뒤, 대연 황실 제단.
이곳은 대연의 대제가 직접 제사를 올릴 때만 사용하는 곳이다.
운친왕은 곧바로 황위에 오르지 않았다.
국운의 화신과 협의를 통해 진양에게 잠시 황위를 빌려주기로 한 것이다.
그 덕분에 진양은 대연 신조의 힘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진양이 있는 이곳은 최대치로 신조의 힘을 빌려올 수 있는 곳이다.
어느덧 제단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하얀 두꺼비는 조용히 진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진양이 손을 뻗자 수십 개의 도기가 각자의 자리로 날아갔다.
순간 강력한 기운이 모여들며 제단을 한 단계 더 제련시켰고, 백옥색이던 제단은 반투명색이 되어 자욱한 일곱 빛깔의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제사의 효과도 순식간에 한 단계 더 증가했다.
운친왕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려 수십 개나 되는 도기라니!
아무리 제기라곤 하지만 그래도 엄청난 양이었다.
유령 선장은 대형 세력에 속한 수도사를 제외하고 가장 갑부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제 보니 그 소문은 사실이었던 듯했다.
아니, 오히려 소문이 진양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듯했다.
천하의 모든 종문을 한곳에 모아놔도 이렇게 많은 도기를 내놓진 못할 것이다.
단순히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용도라고 해도 그 위력만 보면 결코 만만하게 볼 수준은 아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두꺼비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진지한 눈으로 수십 개의 제기를 지켜보았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대제가 폐위당한 것은 전혀 억울한 게 아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양은 제사가 진행될수록 마치 한 세계의 힘이 자신을 점점 짓눌러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히 대적하거나 막을 수 없는, 마치 범인이 되어 하늘과 마주한 느낌과도 같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엄청난 힘은 진양에게 그 어떠한 상처도 입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끊임없이 진양을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엄청난 힘이 몰려오며 스스로도 강해지고 있다는 게 뚜렷하게 느껴졌다.
만약 이 자리에 대제가 살아있었다면 정면으로 그의 공격을 버텨내면서 일 검에 베어버리는 것조차 가능했을 정도였다.
원래의 진양은 다시 모래알 안으로 돌아와 강화를 준비했다.
그리고 냉정한 진양은 영맥 하나를 꺼냈다.
영맥의 힘에 신조의 힘까지 더해지니 진양의 기운은 순식간에 법신을 돌파했다.
여기에 검둥이의 손까지 더하자 곧바로 도군과 견줄 만한 수준까지 올랐다.
이 상태로 모래알을 강화시키자 지금껏 본 적 없던 효율이 발휘되었다.
신조의 힘은 단순히 보조적인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모래알의 구조를 강화시키는 힘이 되어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일곱 빛깔의 모래가 흑백 세계 위로 천천히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흑백 세계를 비추는 태양처럼 상공 높은 곳에 매달리게 되었다.
일곱 가지의 찬란한 빛이 온 세계를 비추었다.
문득 보면 흑백의 세계에 색동옷을 입혀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모래알 내부의 공간도 어느덧 흑백 세계의 절반만 한 크기로 늘어났다.
이쯤 되자 폭포처럼 쏟아지는 힘에도 불구하고 모래알이 강화되고 공간이 확장되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대연 신조의 힘을 빌려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력이었다.
이보다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려면 진짜 대제의 자리에 올라야만 했다.
단순히 시간만 이용하여 길을 뚫는 것도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그래도 전체적인 경과는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적어도 지금부터는 장기간 육신에 대한 주도권을 잡는다고 하여 모래알이 붕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원래의 진양이 물었다.
“보름하고도 세 시진이 흘렀다.”
냉정한 진양이 대답했다.
“이만 여기까지 하자. 어차피 시간을 더 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어렵게 얻은 기회인 만큼 몇 가지 계산해 보고 싶은 게 있다.”
“무슨 시도?”
“백옥 신문, 흑옥 도궁, 흑오동, 그리고 그 외에 여러 공법까지. 이런 상태라면 여러 가지 경우를 효율적으로 계산해 볼 수 있을 거다.
특히 특정한 혈맥만 익힐 수 있는 공법들은 설령 완전히 익히는 건 불가능해도 그 정수를 습득하고 이해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거다.”
“그렇군. 그럼 계속해.”
냉정한 진양은 곧바로 계산에 돌입했다.
우선 지금 상태로 백옥 신문을 깨닫게 될 경우부터 살폈다.
설령 깨달음을 얻어 개방 난이도가 소폭 줄어든다 해도 새로운 부분들이 추가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최소 이 상태를 팔백 년 이상 유지해야 한다.
과연, 우선 경지를 올린 다음 백옥 신문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던 추측이 전부 옳았던 것이다.
도군의 문턱까지 가는데 팔백 년.
도궁까지는 오백 년.
누가 봐도 전자가 훨씬 더 가성비가 좋았다.
계산과 검증을 거친 후 백옥 신문에 대해 깨닫는 건 우선 보류하기로 하고 일단 다른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 * *
십사일 아홉 시진이 지났을 때.
진양은 돌연 눈을 떴다.
아무리 공법을 써도 기혈이 줄어들지 않을 것 같던 상쾌한 느낌은 순식간에 모두 사라졌다.
체내에 상당히 큰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냉정한 진양은 일말의 동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결국 이 모든 건 단순한 실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냉정한 진양은 지금까지 알아낸 모든 것들을 원래의 진양에게 공유한 뒤 육신의 주도권을 원래의 진양에게 넘겼다.
진양은 계속해서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던 운친왕에게 말했다.
“약속한 한 달이 지났으니 황위를 넘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한다면 흑오동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도록 하죠.”
“부탁드리겠습니다.”
운친왕이 포권을 취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앞과 뒤가 사람을 본 탓일까?
그는 이 순간 진심으로 진양이라는 사람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실하게 조사를 하고 떠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직 대제가 완전히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특히 대제가 젊은 시절 삼신도군과 깊게 연관되어있던 만큼 어쩌면 삼신보술을 익혔을지도 모릅니다.
대연 황실과 북두성종 모두 삼신보술을 감지하는 뛰어난 방법이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와 자기 자신의 상태를 최대한 자세히 살펴보고 출발하는 것으로 하시죠.”
“이미 여러 번 확인해 보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특히 그가 먼저 저를 불러들여 황위를 넘긴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살펴봤지요.
삼명신이라는 삼신보술이 지금까지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삼신보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북두성구도를 익힌 것만 해도 누군가에 의해 화신으로 연화되지 않았다는 증거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양은 머릿속으로 냉정한 진양이 만들어준 도표를 떠올렸다.
모든 경우의 수를 적어둔 도표였다.
하나씩 확인해 본 결과 확실히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황위를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큰 성과를 얻고도 이토록 신중하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운친왕은 이러한 진양의 모습에도 전혀 답답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신중함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황위부터 먼저 받으실지, 아니면 흑오동이 있는 곳에 먼저 다녀오실지 정하시죠.
단,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전 단순히 흑오동이 있는 곳까지만 안내해드리는 겁니다. 나무 구멍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저도 예상할 수 없고, 설령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건 저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겁니다.”
“물론이죠. 흑오동이 있는 곳부터 먼저 가도록 하겠습니다.”
진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앞에 흑옥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대문이 열리며 안쪽으로 무시무시한 도궁의 세계가 나타났다.
대지 위에 진양의 도궁이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명궁이었다.
그리고 대지 아래 거꾸로 뿌리를 박은 흑오동의 모습이 보였다.
신문을 살펴보는 운친왕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신문만 놓고 본다면 그와 견주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신문 너머에 있는 도궁은 그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진양이 도군 문턱 가까이 있는 그와 비슷한 수준일 줄은 전혀 몰랐다.
그는 놀란 감정을 추스르며 미소를 지었다.
진양이 순순히 자신의 신문까지 드러냈는데 여기서 겁먹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순 없었다.
도궁 세계로 들어선 운친왕은 곧바로 흑오동의 나무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