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508
1508화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다시 돌아온 진양이 손을 펼치자 손바닥 위로 한 권의 책이 나타났다.
탑 구 층에서 보았던 책.
문자 화신의 생명의 근원이 담긴 책의 복제판이었다.
사실 내용만 보면 크게 특별할 것 없었다.
다만 이것의 핵심은 책에 기록된 문자 내용이 전부였다.
“감히 내 앞에서 이런 장난질을 하다니.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군.”
진양은 흑검을 사용하여 책에 하나의 부문을 새겼다.
이어서 그것을 해안 안으로 집어넣은 뒤 두충(蠹蟲)을 소환했다.
“먹어버려.”
그러나 두충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다 먹고 나면 맛있는 경전을 먹게 해 줄게.”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두충은 마지못해 그 책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사주는 한참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때, 문자 화신의 근본이 든 책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그의 화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존…….”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신의 왼쪽부터 조금씩 형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뭐라 반응할 틈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화신은 연기처럼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책은 아무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가 되어있었다.
심지어 사주 본인조차도 그곳에 본래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
사주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곧장 계율사 거점을 빠져나와 궁성으로 향했다.
* * *
진양은 조용히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자신조차도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흡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충을 키운 지도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수많은 양의 책을 먹이며 한 단계씩 성장시켰다.
이렇게 두충을 키운 건 그를 하나의 서고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사자결의 수준이 높아지고 대몽진경과 같은 공법을 익히며 진양의 몸은 하나의 거대한 이동식 서고가 되었다.
게다가 안전을 고려해봐도 진양 자신이 두충보단 훨씬 더 안전하다.
적어도 자기 자신은 충분히 믿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두충은 그 이후로도 한 단계 더 성장했다.
그러나 진양은 성숙한 선초인 십이와 만나게 되었다.
때문에 두충의 존재감은 한층 더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정보로만 따지만 이 세상에 십이를 능가할 존재는 없다.
게다가 십이는 진양과 함께 여러 세계를 돌아다니고 망자의 세계까지 다녀왔다.
덕분에 한계점은 더 이상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높아졌다.
이로써 두충은 완전히 존재감이 죽어버리게 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진양이 두충을 계속 남겨온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생각하고 데리고 있던 것뿐이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도 오늘 두충의 존재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실 사주를 만난 건 단순히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첫 만남으로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게 가능했다면 아마 수련은 모두 포기한 채 협상 전문가로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물론 상대와 대화를 하거나 협상을 하려면 어느 정도 기반이 될 만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
일개 하급 수도사 따위가 찾아와 재잘재잘 떠들어댄다면 사주가 상대나 해주겠는가?
아니, 애초에 그들은 사주의 앞까지 가기도 전에 계율사의 주구들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존재들은 보고서에 적을 가치조차 없다.
어쨌든 신나게 대화를 마쳤으니 어느 정도는 힘 자랑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일종의 당근과 채찍이라고나 할까.
상당히 간단하면서도 효과는 만점이었다.
흑검, 그리고 몇 권이나 되는 경전보책을 먹어 치우고도 간에 기별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성장한 두충까지.
이 조합으로 이 세상에서 문자 화신의 근본이 들어있는 책의 모든 글자를 날려버리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그 책은 일개 범인조차도 들여다볼 수 있는 평범한 책이다.
만약 경전이었다면 진양이나 두충의 지금 실력만으로는 완전히 지워버리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직 그 정도 수준까지 성장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주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의미가 달라진다.
그가 두 눈 새파랗게 뜨고 보고 있는 앞에서 책을 건드리지 않고도 그의 화신을 근본부터 완전히 소멸시켜버렸다.
그리고 그가 주로 익힌 창힐대전은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물건이다.
대략적으로 가늠해 보면 진양이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와 같은 경지에 오르게 되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은 그에게 손을 대는 것조차 불가능할 테니까.
누군가 모든 방어를 우회하고 곧장 핵심으로 갈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심지어 무시할 수 없을 만한 실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사주는 당연히 경계를 해야 할 수밖에 없다.
진양은 어째서 일전에는 이러한 방법으로 화신을 죽이지 않았을까?
어째서 기껏 이곳까지 왔는데 창힐대전 몇 장만 살펴보고 돌아간 것일까?
왜 돌아가자마자 화신부터 죽인 걸까?
답은 간단하다.
이전에는 그런 능력이 없었지만 창힐대전을 살펴보고 난 뒤로는 이런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능력을 펼쳐 보인 것이다.
이런 능력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능력이다.
이제 와서 후회를 하기엔 너무 늦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진양이 마음대로 하도록 놔둬선 안 되는 것이었다.
사주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진양이 진지하게 뱉었던 말들, 그리고 태도들.
모든 것들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 * *
궁성에 도착한 사주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진양의 ‘제안’에 대해서는 재차 강조하여 설명했다.
물론 괜히 객기를 부리다가 당했다는 얘기는 쏙 빼놓고 말했다.
그저 진양이 자신의 문자 화신 하나를 베어버린 게 전부였다고만 말했다.
보고를 마친 뒤.
사주는 조용히 십방 대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십방 대제는 궁전 밖으로 향했다.
그는 궁전 입구에 선 채 멀리 보이는 산하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인간은 과연 대대손손 인재가 넘쳐나는구나. 이 시대의 사람들은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져야 하지.”
그는 상고의 전쟁을 직접 경험했던 존재이자, 세 천제 중 한 사람이었던 존재다.
양쪽 모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다면 서로가 만신창이가 되는 결과를 낳을 뿐.
십방 대제는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과거 상고 시대에 일어났던 전쟁은 모든 것을 박살 냈다.
아니, 아예 세계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오직 비경급의 존재만이 사라졌었다.
대부분의 비경은 부서지더라도 거기서 끝이었다.
다른 대세계로 떨어지거나, 다른 비경으로 떨어지거나, 다시 조각이 하나로 모이거나.
심지어 수십만 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새로운 비경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결코 소멸이 아니다.
진정으로 대세계가 소멸된 것은 오직 상고 때뿐이다.
상고는 더 이상 다시 재건될 수 없다.
남아있는 조각들이라고 해봤자 아무 생기 없는 시체 조각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망자의 세계에 나타나는 것도 사망 상태의 상고 조각뿐이다.
진양의 말이 맞다.
전면전을 벌여봤자 양쪽 모두 처참한 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승리자가 없는 싸움인 것이다.
물론 십방 대제는 상고 전쟁과 같은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고 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 다시 부활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부활을 하기 위해선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세계의 천장 자체가 낮아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또다시 상고 때처럼 ‘섬멸전’이 벌어져 세계가 부서지게 된다면, 그때는 도군 수준으로 한계치가 크게 낮아질 것이다.
여기에 물 재앙까지 찾아온다면 다시 부활한 세계에선 도군조차도 전설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용의 꼬리가 될 바엔 뱀의 머리가 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십방 대제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도군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도군이 되는 것.
그것은 지금보다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진양의 제안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제안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먼 미래까지 바라보고 해온 제안이었다.
대규모 전쟁의 결과는 승자 없이 두 명의 패배자만 낳을 뿐.
진양은 두 패배자 중 한 사람이 될 생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종말을 대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십방 대제 역시 승리자 없는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겐 충분한 시간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무한정으로 시간이 있다는 건 아니었다.
바람 재앙이 지나간 뒤에는 물 재앙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물 재앙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며 모든 곳을 집어삼킬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십방 대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만큼 먼 미래의 일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진양의 제안 자체는 사실 큰 문제가 없다.
다만 그 과정은 상당히 큰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통로를 열어 대황과 십방계를 연결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제였다.
십방계의 사람이 대황으로 가서 전투를 벌이는 것 자체가 이미 불리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승리를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낼 수밖에 없다.
중간 과정이 어떻든 상관없다.
설사 대황 사람들에게 밀리는 한이 있더라도 결국은 그들이 직접 가는 수밖에 없다.
반대로, 대황의 입장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분명 문제가 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진양이 믿는 구석이 있는지는 십방 대제는 알 수가 없다.
가늠할 수도 없었고 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진양이 단순히 쫄았다고 볼 수도 없다.
단지 자신이 손을 쓰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하기에도 어딘가 이상했다.
겉보기엔 진양이 겁을 먹고 수작을 부린 것처럼 보였다.
아예 양쪽 다 서로 손을 쓰지 않게 하면 십방 대제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십방 대제가 보기엔 막상막하였다.
두 천제가 죽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이 겨우 이런 상황에 겁을 먹고 쫄 리는 없다.
물론 그가 직접 봤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의문은 존재한다.
어쩌면 두 천제의 죽음은 진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참의 생각 끝에 십방 대제는 결론 내렸다.
진양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대가 먼저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이를 모른 척하고 있을 순 없었다.
손을 쓰는 순간 빈틈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빈틈이 드러나면 승리를 다잡을 기초를 얻게 된다.
십방 대제는 먼 곳에 있는 산하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생각을 이어갔다.
인간 신조의 대제가 된 이후로 사고방식이 과거 천제였던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가서 그에게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하거라. 제안한 대로 내가 직접 손을 쓰지 않겠다고.”
말을 마친 십방 대제는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주는 몸을 살짝 숙이며 예를 갖췄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