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548
1548화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
지면에 착지한 묵양은 다른 사람은 무시한 채 진양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곤 괴상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딘가에서 네게 꼭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발견해서 가지러 갔다 왔어.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알았어. 고마워.”
오랜만에 묵양을 만나니 마음 한쪽 구석이 괜히 시큰해졌다.
그는 어느새 모든 봉인을 해제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리바리한 모습은 여전했다.
무언가를 얻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묵양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이것을 얻어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그가 가져온 물건에선 선초와 비슷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 몽사가 다가와 묵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묵양은 멍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구냐?”
“누구긴. 몽사죠.”
“몽사? 그게 누구지?”
하지만 진양은 묵양의 일에는 신경을 써 줄 여유가 없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루마리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는 계속해서 진양의 육신과 영혼, 이성으로 스며들었다.
십방 대제는 막고 싶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진양, 설마 인간의 일자결이 네게 먹혀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왜? 독살이라도 하려는 줄 아는 거야?”
진양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공포를 모아 맹독을 만들어봤자 삼신도군조차 독살할 수 없다.
진양은 애초에 그런 방법은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이게 네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진양은 흑검을 휘둘러 지난 십만 번의 기억을 잘라냈다.
그리고 그것을 광구로 만들어 검은 피가 뚝뚝 흐르고 있는 두루마리 안에 집어넣었다.
십방 대제는 정확히 보았다.
그것은 진양에 예전에 얻었던 찢어진 두루마리로 삼신도군을 독살할 때 썼던 바로 그 두루마리였다.
사실 희자결을 아예 모를 때만 해도 이것을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가희와 함께 희자결을 완성시키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일자결은 애초에 공법이 필요하지 않다.
태생적으로 인간의 혈맥 속에 녹아있는 공법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요족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신통력처럼 말이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익혔는지 익히지 못했는지의 차이가 전부였다.
찢어진 두루마리 하나로도 충분하다.
진양은 십만 번 동안 추측을 반복하며 얻은 수억 년의 기억을 전부 두루마리 안에 녹여 넣었다.
그 순간, 검은 피를 흘리던 두루마리는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진양은 지난 수억 년간 공포를 모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통해 마침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진양은 그것을 맹독으로 만들지 않았다.
태일을 독살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일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한다.
진양이 일념을 발동하자 두루마리가 펼쳐졌고,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뻗으니 거대한 도장 하나가 나타났다.
이어서 망설임 없이 두루마리에 도장을 찍었다.
도장의 정체는 사상강인이었다.
순간 두루마리가 파괴되며 무형의 힘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무형의 힘은 온 세계를 뒤덮었다.
심지어 신수와 호량을 통해 다른 세계까지도 뻗어나갔다.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다.
비틀거리며 서 있는 진양의 입가에 마침내 미소가 번졌다.
“이건 정신오염(精神汚染)이라고 이름 지은 공법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십방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사상강인이 찍혔다.
사상강인에는 진양이 그동안 모았던 수많은 생명체의 수억 년 치에 해당하는 공포가 섞여 있었다.
태일에 대한 공포와 절망이었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다.
심지어 진양도 그것에 의해 완전히 오염되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십방 대제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십방 대제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결코 마음 밖으로 밀어낼 수 없는 확고한 생각이었다.
마찬가지로 십방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동일한 생각이 떠올랐다.
“십방 대제, 한시라도 빨리 태일로 변신하는 게 좋을 거야.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다간 크게 후회하게 될 테니까.
배를 타면 물 위를 건널 수도 있지만, 물 위에선 배가 뒤집힐 수도 있는 법. 난 지금부터 네 녀석이 탄 배를 뒤집을 생각이다.”
마음 같아선 배를 잡고 시원하고 웃고 싶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보통 이런 시기에 웃기 시작하는 쪽은 항상 절망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순간을 위해 엄청난 시간을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매번 삼천 년에서 오천 년이나 이어지는 추측을 무려 십만 번이나 진행했다.
만약 기억을 잘라내지 않았다면 십방 대제는 고사하고 진양이 먼저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사실 진양은 상대를 질리게 만들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니다.
다만 상대를 질리게 만드는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하마터면 진양이 먼저 질려버릴 뻔했기 때문이다.
무려 십만 번이나 같은 상황이 이어지며 십방 대제는 단단히 독이 올랐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고, 손을 쓸 때마다 무자비한 살초가 펼쳐졌다.
십만 번의 추측이 이어지는 동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최소 한 번씩은 십방 대제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한술 더 떠서 매번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추측 세계라고 해도 빈사 상태에 이르게 되면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치게 된다.
물론 본질을 따지자면 현실만 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려 십만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며 상당한 감정이 누적이 된 탓에 어느덧 한계치에 이르렀다.
감정을 끌어모으는 두루마리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도 상당한 독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마음 같아선 십만 번만 더 모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진양 스스로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루마리도 마찬가지다.
만약 계속해서 같은 상황을 이어나갔다면 버티지 못하고 폭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가장 먼저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진양이다.
상당히 무시무시한 힘이 진양을 덮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망자의 세계는커녕 소멸을 면치 못할 게 뻔했다.
설사 운 좋게 망자의 세계로 넘어간다고 해도 여전히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사상강인에 공포 두루마리까지 더해지며 두 개의 일자결이 함께 발동되었다.
여기에 지금까지 쌓인 감정들까지 폭발을 일으키며 진양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십방 대제, 아니, 태일은 모든 생명체의 공공의 적이다.
모든 생명체가 ‘오염’됐기 때문이다.
십방계에도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십방 신조 영토 내에는 전대미문의 지진과 이상 현상들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한편 사주는 머리를 쥐어 싼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신이 오염된 그는 자기모습에 빠졌고, 그로 인해 자아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무려 수억 년에 걸쳐 쌓인 힘과 진양의 사상강인이 하나로 합쳐졌다.
설사 수많은 생명체들이 그 힘을 나눠 가졌다곤 하지만, 한 사람분의 양만 해도 결코 단신으로 막아낼 수 없는 수준이다.
오염의 힘은 일종의 맹독과도 같다.
그러나 사상강인의 힘이 작용하며 모든 독소가 사라졌다.
여기에 모든 생명체에게 무해한 사상강인까지 합쳐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힘은 설령 범인에게 효과를 발휘한다고 해도 그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도 끼치지 않게 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내놓아야 하는 법.
진양의 사상강인이 그랬다.
신통력 자체가 고정된 도장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요구하는 수준도 매우 낮았다.
심지어 모든 사람의 혈맥 안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거의 무한에 가까운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십방 대제의 충신들은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자신들의 적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혈맥이나 종족처럼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바꿀 수 없는 것들.
그것이 바로 이 순간 그들의 적이었다.
십방 대제를 인정하고 있던 마음이 곳곳에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붕괴된 것은 범인이었다.
아래부터 시작된 붕괴는 위로도 이어졌다.
마치 작은 불씨가 드넓은 들판을 태우는 것과도 같은 기세였다.
이미 대세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위로 갈수록 더욱 막을 수가 없었다.
십방 신조의 말단 관리부터 시작하며 계율사 사주까지.
겉보기엔 이성도 멀쩡했고 기억도 온전했지만, 십방 대제를 인정하는 마음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게다가 마침 십방 신조의 국운의 화신은 목사의 목도편에 맞아 죽어버렸다.
아마 당분간은 새로운 국운의 화신이 나타날 일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이 상황을 막을 수는 없다.
설령 십방 대제가 나선다고 해도 말이다.
아무리 높은 탑이더라도 바닥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면 위층도 무사할 순 없다.
위층이 아무리 견고하게 지어져봤자 바닥이 무너지면 결국은 붕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십방 대제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뚜렷하게 느껴졌다.
신조를 굳건하게 받치고 있던 모든 기초가 사라진 탓이었다.
점차 약해져 가는 십방 대제의 모습을 보며 진양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십방 대제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과감하게 십방 신조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옥새를 부순 뒤 다시 권력을 취하여 태일 천제가 되는 것.
하지만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아직 진양의 손바닥 안인지, 아니면 현실로 돌아온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왠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은 기이할 정도로 익숙했다.
마치 기억 속의 장면이 다시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상당히 강렬한 익숙함이었다.
확실하게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지금 이 장면이 자신의 눈앞에서 수차례 벌어졌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진양의 뒤로 강력한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망자들이 서 있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망자 고수들이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반면 이들을 마주하고 있는 건 십방 대제 한 사람뿐이었다.
때문에 십방 대제는 더더욱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십방계와 복제된 십방계는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 서로를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진실과 거짓이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수도 없이 같은 상황을 겪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자세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이성을 잃고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 가운데 십방 대제는 마침내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