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552
1552화 목사가 하려던 말과 추측
십방 대제가 죽은 뒤로 일련의 문제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대영 신조는 천제를 죽였다는 명예를 안게 되었으나 이를 함부로 휘두르고 다니진 않았다.
대신 지금까지 물불 가리지 않게 집어삼킨 영토를 조금씩 소화해나가기 시작했다.
각 세계의 분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대황 내에서도 이익이나 이념으로 인한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대영 신조는 이러한 분쟁에 가세하거나 간섭하진 않았다.
대신 법전을 중심으로 ‘기준’을 정하여 최소한의 선만 지키도록 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확실하게 정해진 법은 열 개가 넘지 않는다.
게다가 전부 인간의 존망과 연관된 매우 극단적인 경우에만 해당했다.
남은 법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처벌을 내릴 만한 죄가 아니라면 벌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상당히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인간의 관점으로 법을 만들어야만 했다.
게다가 법의 사각지대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구멍도 최대한 막아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 만들어진 법 조항은 열 개도 되지 않았던 것.
한편 대략적으로 검토 중인 법은 대영 신조의 형법 법전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실 법은 무조건 냉정하고 차가운 것만은 아니다.
법이 냉정하고 차갑기만 한다면 더 큰 재앙만 불러올 뿐이다.
같은 일을 두고도 법리적으로만 따지느냐, 아니면 인간적인 요소를 염두에 두고 따지느냐에 따라 결과는 수도 없이 달라진다.
어떤 상황도 만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법은 없다.
진양 역시 인간 세계가 일말의 인간 냄새조차 없을 정도로 냉정한 세계가 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저 최소한의 선만 지키면 된다.
애초에 진양이 법을 만드는 목적도 바로 그 선을 긋기 위해서다.
대영 신조가 영원할 수 없다는 건 진양도 잘 알고 있다.
가희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국가를 대영 신조에 합병하면서도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해 준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나의 기준을 세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득을 얻게 된다면 오히려 그편이 훨씬 낫다.
진양은 출발선만 그은 뒤 물러났다.
그 이후로는 크게 간섭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대영에는 넘치는 게 인재들이다.
게다가 아무리 진양이 날고 기는 천재라고 해도 이건 한 사람이 단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무엇보다 진양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아직 산 자의 세계에 남아있는 신들은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신이 지름길을 통해 손에 넣은 건 사실이다.
덕분에 여러 혜택과 이익을 누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수도사보다 못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한계점이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수도사와는 달리 신은 권력을 손에 넣는 순간부터 한계가 정해지게 된다.
하지만 신들은 자신의 한계점에 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어쨌든 남아있는 하급 신들은 큰 위협거리가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하급 신들 중에서도 겸손히 인간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자들도 다수 존재했다.
덕분에 점차 많은 수도사들이 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신도(神道)는 그저 수련의 방식일 뿐이고, 하급 신 역시 다소 강한 수도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상황은 꽤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 수백 년, 아니, 수십 년 후면 ‘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예 인간의 문화 속으로 완전하게 녹아들지도 모른다.
* * *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한 진양은 망자의 세계로 향했다.
목사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십방 대제를 완전히 처치한 뒤로 목사는 그 누구보다도 느긋한 삶을 즐기고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무료한 망자의 세계에 머물면서도 한 마디의 불만조차 없었다.
심지어 매일 황천 땅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광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할 정도였다.
물론 이렇게 사방을 돌아다니는 건 목사뿐만이 아니었다.
황천 땅에 있는 수많은 사지(死地)들은 수많은 망자들이 망자의 세계에 알맞은 공법을 찾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꼽히게 되었다.
그곳에는 진양이 세워둔 대량의 비석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사지가 생기던 초기부터 있었기에 사지와 함께 변화하며 ‘자연적인 공법’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진양이 목사를 찾은 곳은 영제의 사지였다.
따사로운 햇살과는 상반되는 지독한 초원이 펼쳐진 이곳.
그러나 이 정도는 목사에겐 아무것도 아닌 수준에 불과했다.
비록 목도편은 부서졌지만, 그가 세웠던 도 그 자체는 아직 건재하다.
그가 망자의 세계로 넘어온 후 이 도는 자연스럽게 망자의 세계와 하나가 되었다.
목사는 이 도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과거의 실력을 다시 발휘하는 것도 어려울 게 없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먼 훗날에는 전성기의 힘을 다시 되찾게 될지도 모른다.
“대인, 상당히 편안해 보이십니다.”
목사는 느긋한 모습으로 잔디에 누워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방원 백 장 내에는 따뜻한 봄바람이 불고 있었고, 지독한 풀들은 감히 그를 해칠 엄두조차도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목사의 힘이 모든 변화를 압도한 것이다.
“이제야 편하게 쉬게 되었구만.
난 무려 두 시대나 싸워왔어. 이젠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네. 이제 남은 건 젊은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나?
나 같은 노친네들은 이제 슬슬 물러날 때가 되었네.”
목사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상고처럼 모든 것이 파괴되는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다.
결과가 좋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사실 대인께 한 가지 가르침을 받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진지한 진양의 모습에 목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대인께서 말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이젠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크게 대단한 건 아닐세. 단지 작은 정보 하나만으로도 결과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반드시 함구하라고 풍수사가 단단히 당부를 했던 것뿐이지.
태일은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일세. 그는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경험했던 사람이지. 그런 그가 아무런 대비책조차 남겨놓지 않았을 리 만무하지.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평정심을 잃고 말았네. 그는 자네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가 진퇴양난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고, 결국은 고배를 들게 되었지.
그는 이번만큼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죽음을 맞이했다네. 천제가 아닌 인간 신조의 대제로서 죽음을 맞이한 만큼, 설사 대비책을 남겨놨다고 해도 그것을 쓰지는 못할 걸세.
다시 부활하려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걸세. 아마 모든 것이 다음 시대의 일이 되겠지.
허나 다음 시대가 올 때까지 우리 모두가 여전히 살아있을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을 걸세.”
진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다음 시대가 올 때면 아마 저희 모두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솔직히 그때까지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거든요.
전 여러분들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해 봤기 때문에 더 이상 신선함조차 느껴지지 않거든요.
곁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버리고 나 혼자 살아남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건 고통이겠죠.
솔직히 전 대인이 진심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도대체 홀로 남았을 때의 적막함과 외로움은 어떤 식으로 버티신 건지 아직도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끝마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쉽게 눈을 감을 순 없는 법일세. 마찬가지로 포기하는 것도 어렵고 말이야.”
“그 부분이 가장 존경스럽습니다.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으니까요. 솔직히 저는 그렇게까진 못할 것 같습니다.
전 이제까지 도과조차도 가지지 못한 일개 범인에 불과합니다. 고정관념이란 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죠.
만약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여전히 하나의 결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실 건가요?”
목사는 멍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난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가 원하는 것은 전부 손에 넣었다네. 허나 유일하게 놓지 못하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세 천제라는 걸림돌일세.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십이사들도 마찬가지일 걸세. 모두들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겠지.”
진양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그에게 예를 표했다.
이후로도 목사와 꽤 긴 시간 동안 여러 대화를 나눴다.
솔직히 지난번에 목사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하지 않았을 때부터 진양의 머릿속엔 수많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당시 그는 진양에게 분명히 추측해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예전부터 목사에게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느끼긴 했지만 정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목사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으며, 이것이 태일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진양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조금만 연상해 보면 알 수 있다.
과거 태호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천제 삼신술’을 만들어내려고 했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목사가 아주 오래전부터 태일에 의해 손발이 묶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목사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정보를 함부로 퍼뜨릴 수도 없다는 것도.
그저 간접적으로 그가 추측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네는 똑똑하니 분명 추측해낼 수 있을 걸세’라는 말을 한 것이다.
사실상 이건 ‘자네가 한 추측이 맞다네’라고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삼신술 중에는 삼명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삼신보술이 있다.
상대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면 상대의 육신을 빼앗게 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자아이성만 빼앗는 삼신보술이다.
과거 위풍이 익혔던 삼신술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 여러 고수들로부터 들었던 상고의 일을 함께 놓고 생각해 본다면 한 가지 사실을 추측해낼 수 있다.
바로 세 천제 중에서 태미가 가장 약하다는 사실이다.
태호는 비록 똑똑하긴 하나 적당한 곳에서 빠질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결국 이러한 단점으로 인해 죽게 되었다.
태일이 인간 신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태호가 모를 리 있겠는가?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단지 함께 동참하길 거부했을 뿐이다.
뼛속까지 인간을 자신의 아래로 보는 자가 어찌 인간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반면 태일은 상고 시대부터 세 천제 중에서는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다.
물론 비록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이긴 해도 유일하게 인간에게 호감을 표시했던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유일하게 자세를 낮출 줄 알았던 사람이다.
조금 다른 말로 하자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에게 과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직 결과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