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화상용
살기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이 목을 휘감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아무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가득하던 살기와 전의는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부드러운 기운에 손과 발의 힘마저 풀려버렸다. 더 이상 화상용을 상대로 살기를 품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진양의 동공이 매우 작게 수축했다.
불길함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심장이 마구 뛰었으나 육신의 반응은 계속해서 한 박자 늦었다.
살기가 피어오를 때마다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목을 휘감은 은빛의 기운이 피부를 뚫고 진양의 머리를 베어 버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도무지 반격할 수가 없었다.
은빛 기운을 손에 든 채 조용히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화상용의 모습이 보였다.
진양의 육신은 마치 지배를 당한 듯 상대에게 살수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합!”
진양이 나지막하게 기합 소리를 내뱉자 몸에서 화염이 피어올랐다.
상대방의 수에 당해 살수를 쓸 수 없다면 살수를 쓰지 않으면 된다.
진양의 손바닥이 화상용을 향해 날아갔다.
찰싹-!
날아간 진양의 손바닥은 화상용의 볼기를 때렸다.
순간 화상용은 옆으로 날아올랐다.
그녀의 백옥같던 피부에 새까맣게 그을린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진양의 목을 휘감고 있던 은빛은 화상용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그 바람에 진양의 목에 한 뼘 정도 되는 상처가 생겼다.
상처는 피가 베어나올 틈도 없이 순식간에 아물며 사라져버렸다.
진양은 황급히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고 숨이 가빠왔다.
‘예황천녀무(霓凰天女舞)!’
사람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마음속의 살기를 씻어버릴 수 있는 공법.
적이 자신을 베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반항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공법.
아름다운 춤사위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어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공법.
틀림없이 예황천녀무가 확실했다.
예황천녀무는 영태성종의 숨겨둔 절기였다.
오직 성종의 성녀들만 배울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태성종의 역대 성녀들 중에서도 이를 완벽히 익힌 자는 겨우 두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예황천녀무를 배우기 위해선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했다.
단순히 하나씩 가르친다고 해서 전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이해로만 익힐 수 있는 공법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영태성종에서 예황천녀무를 사용할 수 있는 건 엄청난 색기를 지니고 있다는 영태성녀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비록 성녀의 신분이긴 하나 그 실력은 이미 영태성종의 고위층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했다.
심지어 영태성종에서도 손꼽는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신! 화상용이 아니군.”
매섭게 화상용을 노려보는 진양의 눈빛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훗, 이젠 헛소리까지 하는구나.”
화상용은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디디며 삼 장 정도 떠올랐다.
그녀의 주위로는 은빛이 반짝이며 긴 치마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진양의 목을 휘감았던 은빛은 십여 장이나 되는 긴 천이 되어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손맛이 달라.”
진양은 화상용의 볼기를 후렸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화상용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당신은 화상용이 아니야. 만약 진짜 화상용이었다면 방금처럼 내게 맞고도 가만히 있을 리 없거든. 아마 난리를 쳤겠지.
게다가 당신이 진짜라면 아마 날 본 순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겠지. 지금처럼 날 알아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도 아니고 말이야.
무엇보다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예황천녀무를 이런 경지까지 익혔을 리도 없잖아.
어쩐지, 화상용이 삼신술(三身術)을 쓴다고 할 때부터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화상용을 노려보는 진양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스쳐 지나간 생각들은 마침내 하나의 결말을 만들어냈다.
“진짜 화상용은 이미 죽었어. 그렇지?”
진양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한 글자씩 또박또박 발음하여 상대를 불렀다.
“영.태.성.녀.”
순간 화상용의 눈에서 흘러나오던 눈빛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녀의 입가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말투 역시 살기 하나 섞이지 않은 나긋한 말투로 변해있었다.
“진양, 정말 똑똑한걸. 하지만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면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지. 마치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너처럼 말이야!”
“하하하!”
진양은 큰소리로 웃었다.
“천하의 영태성녀가 삼신술로 자신의 제자를 속여 자신의 화신으로 만들다니. 아마 날 살인멸구 하고 싶겠지. 하지만 지금 상태로 싸운다면 과연 누가 먼저 죽게 될까?”
진양은 곁눈질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주저앉아 있는 양범을 바라보았다.
그의 상처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진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양범, 너도 참 재수가 없구나. 날 죽인다고 하더라도 저 여자는 널 죽여 입막음할 텐데, 이래도 저 여자와 손을 잡고 날 죽일 셈이냐?
저 여자가 최후의 패를 꺼내 든다면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이길 수 없어. 설령 그녀가 겨우 삼원기에 불과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야.”
진양은 기분이 이상했다.
생각해 보니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흐흐흐, 끝났다. 이제 너희 모두 죽어라!”
양범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기분 나쁘게 웃었다.
바로 그때, 양범의 육신이 빠르게 메말라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체내에 있던 모든 피가 복부의 상처를 통해 뿜어져 나왔고, 그는 메마른 시체가 되어버렸다.
마치 순식간에 그의 몸에 있던 피를 모두 짜낸 듯이 말이다.
그의 주위로 흘러나온 피는 진양과 화상용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는 사이 수십 장 범위로 흘러가며 사방을 뒤덮은 상태였다.
순수한 선혈 그 자체였다!
붉은빛이 피어오르며 양범의 몸에서 허상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피가 한곳으로 모여들며 수많은 요괴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새빨간 피에서 기어 나온 요괴들은 기괴한 포효를 내질렀다.
바로 그 순간, 빽빽하게 모여있던 요괴들의 몸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요괴들이 폭발하며 붉은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고, 피비린내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선혈로 덮인 범위가 더 넓은 곳에서는 더욱 많은 수의 요괴가 나타났다.
그러나 전부 나타나기 무섭게 폭발해버렸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요괴까지 폭발하고 나자 지면 위 수십 리 범위를 뒤덮고 있던 선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어서 양범의 몸 뒤로 무려 수십 리 길이에 달하는 거대한 괴수의 허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렁이와 같이 생긴 몸은 선혈과 같은 새빨간 색이었고 머리에는 눈, 코, 입이 달려있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거대한 주둥이가 달려있었다.
주둥이 바깥쪽에는 하나당 수백 장에 이르는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있었고, 안쪽에는 그보다 작은 톱니 같은 이빨들이 빼곡하게 자라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괴수의 표면을 선혈이 뒤덮었다.
이어서 허공에서 튀어나온 괴수의 거대한 몸이 땅을 향해 발을 내딛자 대지가 크게 흔들렸다.
매서운 살기와 함께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사방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체급만 봐도 괴수는 현재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등급인 것처럼 보였다.
진양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선 여전히 오동염이 불타오르고 있었으나,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던 것이다.
피비린내 속에는 사람의 기혈을 끓게 만드는 기괴한 힘이 실려있었다.
마치 몸속에 있는 선혈을 괴수의 입을 향해 자발적으로 뿜게 만드는 듯한 힘이었다.
진양은 호흡을 멈추고 손가락 끝에 하얀 꽃을 피웠다. 체내로 흘러들어온 기괴한 힘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화상용도 심각한 표정으로 새롭게 나타난 괴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크라라!”
괴수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독기가 강한 바람을 일으켰고, 고막을 찢는 듯한 포효와 함께 괴수는 두 사람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화상용은 예황천녀무를 펼치며 다가오는 괴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진양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진양의 얼굴에는 마치 상대를 잔뜩 비웃는 듯한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피할 필요 없어. 아니,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
몸집은 무려 십 리에 달하며 주둥이를 벌리면 그 크기가 삼 리나 되는 괴수에게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놈은 아무렇게나 입을 벌리고 머리만 흔들어도 족히 십 리 이상의 범위를 휩쓸어버릴 수 있는 녀석이다.
게다가 여기선 비행까지 불가능했기에 피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진양은 전혀 피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무언가를 해 보고 싶어서 잔뜩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한참 뒤에나 이 솥의 성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거대 괴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진양으로부터 수십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바로 그때, 진양은 들고 있던 검은 솥을 던졌다.
솥은 진양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땅에 박혔다.
땅에 박힌 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칠 리나 되는 거대한 크기로 변해 마치 방패와 같이 진양의 앞을 가로막았다.
괴수는 전혀 멈출 마음이 없는 듯 오히려 전속력으로 솥을 향해 돌진했다.
콰광-!
거대한 솥은 매우 견고했기 때문에 작은 실금조차 생기지 않았다.
대신 괴수와 부딪힌 충격으로 인해 진양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진양의 의지에 따라 솥은 빠른 속도로 크기가 줄어들었다.
솥은 반 장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어 땅 위로 엎어졌다.
그리고 솥과 부딪힌 괴수는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소멸했다.
진양은 흡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생각했던 거랑 비슷한 결과군.’
검은 솥의 중앙에는 대략 세 뼘 정도 되는 붉은색 지렁이가 꿈틀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녀석의 머리 아래로 삼 할 정도 되는 부분이 검은 솥에 찰싹 붙어있었는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아무리 애써도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검은 솥 중심부엔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봉인이 걸려있었다.
그러나 다소 까다로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우선 봉인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선 반드시 솥을 원래의 크기로 늘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가둘 대상을 솥의 중앙으로 빠뜨려야 완벽하게 가둘 수가 있다.
다른 곳을 두고 굳이 칠 리나 되는 거대한 솥의 중앙으로 빠지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도 지금까진 단순히 방패로만 사용해왔으나 생각보다 빨리 다른 용도로서 효과를 보게 된 건 만족스러웠다.
진양은 조용히 솥을 다시 챙겨 넣었다. 그리고 양범이 있는 곳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우리의 은원은 이제 완전히 끝을 맺을 수 있게 됐군.”
양범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한 채 멍하게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