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254
254화 장비빨
이렇게 된 이상 상대가 허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놈의 말이 맞다.
놈은 밖에선 그저 평범한 환상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진짜인 척 행세하며 환상으로 남을 속이거나 현혹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진양은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
어느덧 통로 가장자리까지 물러선 진양의 등 뒤로 무언가 느껴졌다.
커다란 뿔이 달린 소의 모습을 한 괴수의 석상이었다.
분노로 가득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채 굳어있는 놈의 입에선 푸른 불꽃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환상은 갑자기 삼 장 밖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래, 날 막을 방법이라도 생각해낸 거냐? 하하하!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다. 이만 순순히 몸과 영혼을 내게 바치도록 하거라. 뭐, 그렇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이 몸이 널 대신하여 열심히 살아가도록 할 테니까.”
상대의 얼굴에 기분 나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광기 어린 얼굴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진양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진양은 환상의 발끝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그러다 갑자기 피식하고 상대를 비웃었다.
“이 영면천등, 네가 남긴 게 아니구나. 그래. 이건 널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야.”
진양의 시선이 석상의 머리 쪽으로 향했다.
그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이 석상들, 전부 널 구하러 왔다가 이런 꼴이 된 거야.”
웃고 있던 상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진양을 노려보았다.
“도망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진양은 털썩- 주저앉으며 이마에 흘러내리던 식은땀을 닦아내며 활짝 웃었다.
“뭐, 이 정도는 상관없겠지. 걱정할 필요 없어. 난 남는 게 시간이거든.”
“흥! 시간을 끌어봐야 아무런 소용 없다. 네가 이곳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이미 모든 결과는 정해졌으니까. 난 이미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더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 그리고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너는 네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네 연약한 몸뚱이는 이 몸의 힘을 버티기엔 한없이 작고 부족한 소모품에 불과하니까.”
환상의 목소리는 매우 평온했다.
마치 있는 사실을 그대로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네가 이곳에 있는 영면천등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었지. 아니, 내가 틀렸어. 영면천등 역시 봉인의 일부였던 거야. 그래, 네 말이 맞아. 네 말대로 넌 이곳에서 무한한 힘을 부릴 수 있는 존재야. 하지만 영면천등의 불빛이 비치는 곳에선 어떨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와서 덤벼보던지. 설마 쫄은 건 아니지?”
진양은 일부러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상대에게 도발했다.
하지만 아무리 도발을 해도 상대는 불빛이 비치는 곳 안으로는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네 본체는 아마 아직도 봉인되어있겠지. 강인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정작 불빛이 비치는 곳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영혼의 힘을 부린다는 거냐?”
간을 보기 위해 던진 말이었으나 상대는 아무런 반응 없이 진양을 노려보기만 했을 뿐이다.
진양은 곧바로 부문검의 허상을 소환하여 휘둘렀다.
잔잔한 물결이 일어나며 상대의 몸을 휩쓸었으나 상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흠. 영혼의 힘은 아닌 모양이군. 그렇다면 단지 이성만 남은 존재란 건가?”
진양은 자문자답을 하며 자신의 추측에 더욱 확신을 느꼈다.
“넌 날 죽일 수 없다.”
환상이 말했다.
“닥쳐! 그렇게 대단한 놈이면 어디 와서 덤벼보든지! 입만 나불거리면 무서운 줄 알아?”
진양은 곧바로 받아쳐 버렸다.
환상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진양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대치하게 되었다.
진양은 배가 고팠는지 육포를 뜯으며 이곳에서 나갈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상대가 이성만 도망쳐 나온 존재라는 건 이제 확실해졌다.
그리고 섬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것도 확실해졌다.
여기서 멀어질수록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아마 석림 미궁을 벗어나면 기껏해야 귓가에 속삭이는 정도의 힘밖에 내지 못할 것이다.
일단 상대는 영면천등에서 타오르는 영혼의 불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불꽃을 이용해야 했다.
진양은 고개를 들어 타오르고 있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마가 불꽃의 주인이라고 생각했기에 만지지 못했지만, 이젠 아니다.
만약 이 불꽃이 주인이 없는 물건이라면 이론적으론 습득 능력을 사용해 가질 수 있게 된다.
영면천등의 영혼의 불꽃.
누군가의 영혼을 태우며 일어나는 불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타오르고 있는 영혼의 불꽃은 다른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품질 좋은 불꽃이었다.
이곳에서 석상이 되어버린 자들은 하나같이 강자들이었다.
강자들의 영혼을 태워 만들어낸 불꽃인 만큼 그 힘도 엄청났다.
때문에 섣불리 손을 뻗어 불을 만지려고 했다간 자신의 영혼에 불이 옮겨붙어 버릴 수도 있었다.
현재 진양의 앞에 있는 석상은 하나의 거대한 촛불과도 같았다.
진양의 영혼은 기껏해야 날아든 날파리에 불과하기에 불이 옮겨붙었다간 순식간에 타버릴지도 몰랐다.
‘습득 능력’의 규칙에 따라 습득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물건을 만져야만 했다.
하지만 만지는 순간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 너무나도 뻔했다.
이렇게 된 이상 석상 전체를 연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양은 석상에 손을 가져다 댔으나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이번에는 모종삽을 꺼내 가까이 가져다 댔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진양은 포기하지 않고 곡괭이를 꺼내 가져다 댔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흠. 채광이었군.”
진양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 굳이 연화시킬 필요는 없지.’
환상이 무서워하는 건 영혼의 불꽃에 뿜어져 나온 불빛이었다.
불꽃은 연화가 불가능하지만 생각해 보면 굳이 연화시킬 필요가 없다.
그냥 통째로 떼어내면 그만이니까.
평범한 방법으로는 석상에 흠집 하나 낼 수 없겠지만 채광 능력을 사용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하지만 통째로 떼어내고도 불길이 계속해서 살아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여러 방면으로 고려를 해봐야 할 듯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진양은 무언가 떠오른 듯 현철 한 덩어리를 꺼냈다.
그리고 곡괭이를 만들어 석상 가까이 가져다 댔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군. 망할 놈의 현질 게임.”
채광 능력은 일급 소호조차 가지고 있을 정도로 기초적인 능력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차이는 존재했다.
바로 ‘장비빨’이었다.
높은 등급의 광물을 채광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높은 등급의 장비가 필요한 법.
진양은 값비싼 재료로 만든 곡괭이를 꺼내 들었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한참 동안 석벽을 살피던 진양은 마침내 조각상의 측면을 향해 곡괭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곡괭이가 닿을 때마다 석벽은 조금씩 떨어져나왔다.
적당히 떨어져나왔다 싶으면 진양은 손을 뻗어 그것을 주머니에 챙겼고 계속해서 석벽을 두드렸다.
한편 환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진양을 쳐다보았다.
적당히 놔두면 지치겠지 싶었던 상대가 갑자기 쓸데없는 곳에 힘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진양은 아무렇지 않게 석벽을 파내고 있었다.
그의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도 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후훗. 이게 바로 장비빨이란 말씀.”
진양이 씨익 웃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곡괭이로 말씀드리자면 족히 육 급 이상은 되는 귀한 물건이란 말이지. 이 정도는 십만 원 이상 현질해야 얻을 수 있다고. 물론 직접 제작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들어가는 재료와 시간을 생각하면 손해긴 하지만…….”
환상은 ‘그게 무슨 소리냐?’라는 표정으로 진양을 쳐다보았다.
장비빨, 현질……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석벽을 깎아내는 진양의 모습에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각도 채 되지 않아 진양은 석상 전체를 석벽에서 파내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 석벽에서 파낸 석상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석벽에서 벗어나자 더욱 힘차게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빛이 닿는 거리도 기존의 삼 장에서 팔 장으로 늘어났다.
놀란 환상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는 멍한 눈으로 삼 장 높이의 석상을 옆구리에 낀 채 수상한 웃음을 짓고 있는 진양을 바라보았다.
“잘 있어! 만나서 반가웠어.”
환상은 제자리에 멍하게 선 채 멀어져가는 진양을 바라보기만 할 뿐 쫓아가진 않았다.
놈이 석상을 안고 있는 이상 아무리 쫓아가 봐야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쫓아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한편 진양은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습득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석상은 순식간에 연화되었다.
진양의 생각이 맞았다.
이전에 벽에 붙어있을 땐 석상 하나가 아닌 지하 미궁 전체로 인식이 됐기 때문에 연화가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따로 분리되어 독립된 개체가 되었기에 습득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연화를 마친 진양은 석상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힘에 혀를 내둘렀다.
예상했던 대로 석상은 생전에 엄청난 힘을 가진 고수가 분명했다.
타오르는 불꽃에선 성난 파도와 같은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며 절반 이상의 힘이 소모되긴 했으나, 남아있는 힘은 여전히 오천 년에서 육천 년을 타오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옆구리에 석상을 낀 채 앞으로 걸어가던 진양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환상은 따라오지 않았다.
“휴. 살았다.”
진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안전하다.
물론 다시 놈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석상이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이성뿐이라고 하더라도 영혼의 불꽃에 데이면 결코 멀쩡하진 않을 것이었다.
* * *
같은 시각.
부도마교 사람들은 벌써 열 이상이 죽어 나갔다.
그러나 주름 가득하던 장로는 며칠 본 못 사이에 주름이 많이 펴진 모습이었다.
이전에 비해 노인 특유의 무기력함도 많이 사라졌기에 십 년은 젊어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장로의 곁에는 십여 명의 제자들이 몰려있었다.
이들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고 있었는데, 반대 방향에선 검은 그림자가 조금씩 이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지면에는 회색 빛깔의 재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그림자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재의 위로 발자국이 만들어졌다.
재의 영향 때문인지 그는 상당히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제자들은 그림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미친 듯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시간을 끄는 것이 전부일 뿐,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검은 그림자의 발걸음을 완전히 멈춰 세울 순 없었다.
그때, 겁에 질린 제자가 외우던 주문을 멈추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훅- 하며 그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제자의 몸에서 펑- 하는 소리가 폭발하더니 잿더미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