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257
257화 거래
그렇게 반 시진 정도가 지났다.
옆구리에 조각상을 낀 진양이 어슬렁거리며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좀 비켜봐요.”
무슨 속셈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장은 진양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괜히 자극했다가 진양이 완전히 떠나버리기라도 한다면 그에겐 큰 손해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선장은 중상을 입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이대로라면 단천궁이든 검은 그림자든 손쉽게 그를 노릴 수가 있게 될 것이었다.
진양은 통로에 한참 숨어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날 미끼로 삼아 검은 그림자를 다시 함정에 빠트리려고 그런 건가? 아니면 설마 검은 그림자를 불러들인 건가?’
불안한 눈빛으로 진양을 살폈을 때, 그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누군가를 속이려는 생각에 신이 난 얼굴이었다.
유령 선장은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한시라도 빨리 진양을 죽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진양을 다시 부른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령 선장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벽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진양은 그제야 다가와 자신의 황소 조각상을 집어 들었고, 황소 조각상에 불을 켠 뒤 들고 있던 사람 조각상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역시 큰 게 좋단 말이지…….”
황소 조각상은 파냈던 조각상 중에서 가장 크고 강한 불꽃을 뿜어내는 조각상이었다.
훨씬 더 넓은 안전 구역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위급할 땐 방패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한편 유령 선장은 황당하다는 듯 진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비켜서라고 했던 것이 이것 때문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일단 알고 있는 거 뭐든 얘기해 봐요. 믿을지 말지는 듣고 난 다음에 생각해 볼 테니까.”
사실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으나 속으로는 그의 말을 믿고 있었다.
지하 미궁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컸다.
벌써 몇 번을 돌았으나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 비슷한 건커녕 문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거대한 공간, 그리고 이곳에 봉인되어있는 사마, 거기에 사방을 활개 치고 다니고 있는 사마의 이성까지.
이곳은 매우 위험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사실 이곳이 지하 미궁인 것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이곳이 지하에 설치된 미궁이 아니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섬이나 성일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는 장소일 수도 있었다.
진양의 말에 유령 선장은 다소 복잡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허, 거래를 하자면서요. 그럼 성의를 보여야죠.”
진양은 주머니에서 인간 조각상을 꺼내 선장에게 던졌다.
조각상에선 푸른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 이건 제가 보이는 성의입니다. 이제 당신 차례에요.”
선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딴 걸 성의라고? 마음대로 불을 꺼버리면 그만인데. 차라리 안 준 것만 못하잖아!’
뻔뻔한 진양의 태도에 선장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선장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복잡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선장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평소에는 한 손가락으로도 제압하고 남았을 진양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하니 당연히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속은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양은 조금도 양보해 줄 생각이 없었다.
“좀 솔직해집시다. 만약 제가 방심했다면 어땠을 것 같아요? 아마 절 붙잡아 화신으로 만들고도 남았을 겁니다.”
유령 선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진양의 말대로 기회만 충분했다면 진양을 화신으로 만들어버리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이번 일도 좀 따져봅시다. 전 그저 조용하게 벽 뒤에 숨어있던 것이 전부였을 뿐인데 먼저 달려와 절 때린 건 누구죠? 그나마 많이 회복된 상태라 버텼던 거지. 아니었다면 정말로 죽을 뻔했다고요. 게다가 이 천등이 당신 때문에 박살나기라도 했다면 지금쯤 우리 두 사람 다 검은 그림자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을 거라고. 제 말이 맞죠?”
유령 선장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부릅뜬 눈은 진양을 향해있었다.
모두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린 어쨌든 같은 해적단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위기일발의 순간에 천등을 점등시켜 당신을 구했죠. 하지만 전 당신이 또다시 일어나 저를 해치려 할까 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도망갔던 겁니다. 근데 그러다 죽으면 어쩌나 걱정돼서 다시 돌아온 거라고요.”
진양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왜 그렇게 절 의심하는 겁니까? 제가 아무나 함정에 빠트리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 겁니까?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풍림호에 타고 있는 모든 동료들이 알고 있는데.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느냐 이 말입니다.”
진양은 결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령 선장은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허……. 나 참! 살면서 이렇게까지 뻔뻔한 놈은 처음 보는구먼.’
선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진양이 일부러 선장이 죽기 직전에 천등을 점화시켰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은인인 척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장은 한숨과 함께 철푸덕 대자로 뻗어버렸다.
그리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 이봐요, 선장님. 설마 죽은 거예요?”
이러면 곤란하다.
이대로 선장이 죽어버린다면 무슨 수로 이곳을 빠져나가란 말인가?
“선장님.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거래를 하자면서요. 근데 성의도 안 보이고, 이젠 이렇게 먼저 죽어버리는 겁니까?”
그때, 선장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고 앉았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진양. 죽지만 않는다면 넌 우리들 중 그 누구보다도 더 크게 될 놈이야.”
“그런 칭찬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니까 이쯤에서 하고요. 그래서 거래할 거예요, 말 거예요? 얼른 말해요.”
유령 선장은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혈기를 최대한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외층의 봉인은 부서지고 있고 내층의 봉인 역시 손상을 입긴 했지만, 여전히 그 위력은 건재하지. 우리가 있는 이곳은 사마 봉인의 핵심 지역이다. 다행히 아직 봉인 자체는 큰 문제 없이 멀쩡한 듯하다. 그러나 부도마교의 그 미친놈들만 아니었다면 우린 아무 걱정 없이 이곳을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놈들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다음을 기약해도 됐었을 테니까.”
선장이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어갔다.
“이곳에 있는 조각상들은 사실 봉인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세월의 힘에 의해 모든 것이 낡고 부서지고 말았지. 대부분의 영면천등은 이미 힘을 잃고 꺼져버렸어. 이대로 외층 봉인이 완전히 깨진다면 놈이 가진 힘의 일부가 해방될 거야.”
“일부?”
선장의 말에 부도마교를 떠올리자 순간 무언가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니까 부도마교 놈들은 단순히 봉인만 해제하러 온 게 아니라는 건가요?”
“오호.”
유령 선장은 ‘의외로 제법이군’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아무리 미친놈들이라고 해도 완전히 봉인을 해제할 리는 없지. 놈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일을 계획해왔어. 봉인은 일부만 해제하고 개방된 사마의 힘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려는 거지.
놈들은 아마도 사마와 모종의 거래를 했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질 리 없으니까. 게다가 놈들은 이미 힘의 일부를 손에 넣은 것 같아.”
선장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놈들은 매번 유령섬이 나타날 때마다 이곳에 나타났지. 언제부터인지는 나도 잘 몰라. 적어도 만 년 가까이 이어져 온 계획인 것만은 확실해. 어쨌든 놈들은 이곳에 나타날 때마다 재능이 없거나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제자들을 이곳으로 보내 피의 제물로 바쳐왔지. 이곳으로 보내지는 제자들은 자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특수한 공법을 익히게 된다고 하더군.
사마가 이러한 공법을 익힌 제자들을 놈의 몸속에 무언가 쌓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랜 시간 쌓이게 되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해방된 사마의 힘의 일부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
“흠…….”
왠지 상당히 익숙한 방식이었다.
그렇게 진양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향하는 순간 눈빛이 반짝였다.
“아, 연화! 그러니까 이런 방법으로 연화를 시킨 거네요?”
“뭐, 연화로 볼 수도 있지만 연화와는 달라.”
진양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잠깐만요. 근데 이게 여기서 도망치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선장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으나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상관이 있지. 이곳은 봉인의 핵심 지역이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반드시 이곳의 중심으로 가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지 않는다면 부도마교 그 미친놈들의 손에 우리 모두 죽게 될 게다.”
“이곳에 봉인된 그 사마, 도대체 정체가 뭐죠? 부도마교 사람들이 만 년 가까이 공을 들였는데도 겨우 놈이 가진 힘의 일부만 장악할 수 있을 정도라니.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그건 나도 몰라. 아주 오래된 고대의 존재라는 것밖엔 알려진 바가 없어. 게다가 놈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세계의 존재가 아니라고 하더군. 때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을 때도 있는 법이야. 뭐, 어쨌든…….”
진양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자, 됐고. 그럼 이만 거래 얘기나 계속해 보죠.”
솔직히 부도마교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진양과는 상관이 없었다.
진양은 이곳에서 나가면 그만이고, 놈들이 진양을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큰 상관도 없었다.
그러다 사마가 풀려난다면?
정 안 되면 이곳에 있는 영면천등을 전부 모아다가 놈의 입에 쑤셔 넣어주면 그만이었다.
“난 중상을 입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마를 포기할 순 없다. 그러니 네가 사마를 막아줘. 내가 단천궁을 막도록 할 테니까.”
“잠깐!”
진양이 황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애초에 단천궁은 저랑 아무 상관이 없는 인물이잖아요. 오히려 당신이랑 있다가 저까지 휘말릴 거 같은데.”
선장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단천궁은 자유를 얻기 위해 어떻게든 선장을 죽이려 들 것이었다.
이 외엔 그의 앞길을 막지 않는 이상 그 어떠한 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을걸.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건 나뿐이니까.”
“아니죠. 당신 말고도 부도마교 사람들도 알고 있죠. 전 그 사람들의 ‘계획’이랑 완전히 무관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여기에 제가 갖고 있는 영면천등까지 더한다면 오히려 더 쉽게 거래가 성사될 것 같은데요?”
선장은 순간적으로 ‘그 미친놈들이 너와 거래를 할 것 같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