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299
299화 강 건너 불구경
진양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맞은편 언덕에는 동글동글한 바위만 잔뜩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언덕 아래 협곡으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무두등롱이 몰려있었다.
그냥 무두등롱이 아니었다.
전부 불이 꺼진 채 찢어진 무두등롱 조각들이었다.
무두등롱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인지는 직접 본 바가 있었기에 기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저렇게 많은 수의 무두등롱 조각이라니.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당한 게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무두등롱을 찢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강제로 놈들의 몸속에 타오르는 불을 꺼버리는 것이다.
현재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노인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기괴한 기운이 풍겨오고 있었다.
순수하면서도 원초적인 죽음의 기운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기운을 풍길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의 몸에선 아직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은 방대한 양의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가운데에서도 생기가 느껴졌다.
마치 반석처럼 견고하고, 수천 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고목처럼 든든한 기운이었다.
살아있는 자가 이토록 무시무시한 죽음의 기운을 내뿜을 수 있다니!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대머리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안 형, 이만 피해갑시다. 괜히 건드려 봐야 좋을 것 없을 것 같아요.”
진양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진양은 연체 수도사이자 목령의 육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거기에 한동안 나무 정령을 몸속에 품고 있으며 생기와 사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느낌,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아무리 안경창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노인의 상대가 되진 못할 것이었다.
“진 형, 아무래도 늦은 것 같소. 저자는 실혼(失魂)의 강자인 것 같소.”
안경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머리 뒤로 초록빛이 끊임없이 반짝였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감히 먼저 살수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젠장.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냐고…….’
진양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실혼의 강자라니.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승이었다.
전승은 불변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는 무질서한 고대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하나의 규칙과도 같았다.
요리, 농사, 건축 등 어떠한 전승이든 생존과 번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무엇이든 쓸모가 있다면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한 종문 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종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전승이었다.
도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설령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전승은 일 순위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도문이 계속해서 건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유지되던 종문이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것도 바로 전승 때문이었다.
전승이 끊어지게 되면 쇠퇴의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쇠퇴의 길로 들어선 종문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는 다시 전승을 얻을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종문 내에 아무리 수많은 천재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배울 수 있는 공법이 없으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공법은 경전이나 서책의 형식으로 기록이 되어 전승되는 경우도 있었고, 직접 스승이 제자에게 전달해 주는 형식으로 전승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한 강자가 종문의 핵심 전승을 소지한 채로 먼 곳을 여행하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게 된다면 전승이 실전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강자의 마음속에는 강력한 집념이 생겨나게 된다.
마지막 남은 숨이 다 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고 버텨 종문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종문에 도착하여 자신이 소지한 핵심 전승을 무사히 종문에 전달하게 되는 순간, 비로소 마지막 숨을 내뱉으며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이러한 강자들을 실혼의 강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뿐.
이마저도 기억보단 집념에 가까웠다.
아니, 집념보단 본능이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러한 상태에 빠질 수 있는 건 오직 진정한 강자들밖에 없었다.
진양의 얼굴은 잔뜩 울상이 되어있었고, 안경창의 얼굴 역시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진 형, 미안하오. 아무래도 내 힘으로는 무리일 것 같소…….”
안경창조차 무리라면 진양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진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본능만 남아있는 강자라니.
목숨을 걸고 덤빈다고 해도 전혀 승산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였다.
두 사람 모두 죽을 각오로 싸운다 해도 겨우 상대의 발끝에 닿을까 말까였다.
어쨌든 이대로 싸우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진양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상대는 아마도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단히 갇혀버리는 바람에 돌아가는 길을 완전히 잃은 게 분명했다.
이미 목숨을 잃었으나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건 곧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핵심 전승이나 공법 등이 전부일 것이었다.
그는 비록 정신적으로는 죽음을 맞이했으나 육신은 여전히 숨이 붙어있었다.
즉, 습득 능력으로 성불시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진 형, 미안하게 됐소. 아무래도 우리 두 사람 모두 이곳에서 죽게 될 운명인 듯하오. 그래서 이런 곳에서 진 형을 만나게 된 건 내 나름의 영광이었소…….”
안경창은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은 반짝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 안경창, 삼계산의 젊은 수도사들 중 가장 유망 있는 젊은이로 꼽히던 사람이거늘. 오늘 이런 곳에서 실혼의 강자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
“안 형, 정신 차려요. 이렇게 되면 남은 길은 한 가지뿐입니다.”
진양은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며 종문에서 보았던 서적들을 돌이켜보았다.
과거에 심심할 때마다 장서루에 처박혀 온갖 서적을 다 살펴보았던 자신이 이 순간만큼은 상당히 기특하게 느껴졌다.
“진 형, 날 위로할 필요 없소. 완벽하게 이성을 잃은 실혼의 강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소. 난 단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진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거참, 사내자식이 더럽게 징징대는군.’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예전에 한 서적에서 이런 내용을 봤어요. 실혼의 강자를 만났을 경우, 그를 그의 종문에 데려다주겠다고 약조를 한다면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살이오? 난 처음 들어보는 얘기인데…….”
안경창은 다소 못 미덥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잖아요. 일단 시도는 해 보자고요. 이곳은 수천 년 동안 닫혀있던 곳이니 저 강자도 아마 수천 년 전에 죽음을 맞이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전히 숨이 붙어있다는 건 생전에 엄청난 강자였다는 뜻이겠죠. 그렇다는 건 아마 십중팔구 대황에서 온 강자일 가능성이…….”
그러나 진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경창이 한걸음 나서며 노인을 향해 소리쳤다.
“어르신, 저는 삼계산에서 온 안경창이라고 합니다. 같은 대황 출신으로서 약조하겠습니다. 저희 제 목에 숨이 붙어있는 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르신을 종문으로 모셔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콰광-
노인이 고개를 들자 체내에 있던 사기가 뿜어져 나오며 회색의 연기를 만들어냈다.
회색 연기는 하늘로 솟구쳤고, 혼탁했던 그의 두 눈은 맑게 빛났다.
그리고 굳었던 그의 등은 꼿꼿하게 펴지기 시작했다.
“그럼 부탁하오.”
노인은 짧은 한마디와 함께 가볍게 한 걸음 발을 디뎠다.
그는 마치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순식간에 안경창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곤 깡마른 두 손을 뻗어 안경창의 등에 매달렸다.
바로 그 순간, 노인은 체외로 뿜어져 나온 사기를 깔끔하게 거둬들였다.
그의 눈은 다시 혼탁한 색으로 변했고, 꼿꼿해진 허리는 다시 굽어지며, 순식간에 쇠약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 어르신…….”
안경창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의 시선을 갈 곳을 잃었고, 두 손과 발은 뻣뻣하게 굳었으며,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이야, 안 형. 다시 봤습니다. 이렇게 멋있는 사람인 줄 이제야 알아봤네요!”
진양은 손뼉을 치며 그를 칭찬했다.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노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가 대황 출신이 맞긴 한 건지, 심지어 어느 종문의 사람인지, 그 종문이 존재하긴 존재하는지.
안경창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노인에게 약조한 것이었다.
이런 약조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괜히 지키지 못하기라도 했다간 십중팔구 처참하게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한편 안경창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자신의 등 뒤에 업힌 노인의 체온이 느껴졌다.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진 형, 이렇게 될 거라고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은 겁니까…….”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건 진양의 잘못이 아니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고, 진양은 선택지를 제공한 것뿐이다.
게다가 아직 말도 덜 끝났는데 덜컥 달려든 건 안경창이었다.
‘이걸 내 탓으로 돌린다고?’
물론 진양은 속으로만 이렇게 생각했을 뿐, 겉으로는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안 형, 그래도 이만하기에 다행 아닙니까? 게다가 삼계산 정도 실력을 지닌 종문이라면 이 정도 강자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닐 겁니다. 그저 무사히 어르신을 종문으로 모셔다드리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진 형,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으면 조금 더 빨리 얘기해 주었으면 하오.”
“어허! 안 형, 그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앞으로는 남의 말을 끝까지 듣고 판단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세요.”
안경창은 잔뜩 울상이 된 채 한참 동안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궁시렁거렸다.
하지만 이미 물이 엎질러진 상황에서 별수 있겠는가?
“자, 이만 움직입시다. 어르신의 모습을 보니 기껏해야 칠십 근에서 팔십 근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안 형의 실력으로 그 정도는 문제될 것 없잖아요. 게다가 어르신을 모시고 다니는 건 오히려 안 형에게 이득인 것 같은데요.”
안경창은 여전히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진양은 피식 웃어버렸다.
어차피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입장이었기에 마음은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