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452
452화 진실만 말했는데……
가까이서 세자를 본 진양은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신전후 세자에게선 귀족 자제들에게 느껴지는 특유의 오만함이나 태만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강직하고, 안정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신문 경지인 듯했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이 기운은 대형 문파의 후계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구지신후가 다른 건 못해도 후계자 교육 하나는 잘 시킨 듯했다.
“전 괜찮습니다.”
진양은 일부러 말을 아꼈다.
슬슬 거드름을 피워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 예를 갖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아직 작위를 가진 몸도 아니고, 군에 소속된 몸도 아니니까요.”
변소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본론으로 향했다.
“도장께서 비경 속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구할 수 있을까요?”
“정 가신다면 맹독 늪지대로 가시는 게 최선의 선택일 듯합니다.”
“어째서입니까? 화산 지대로 가면 안 됩니까?”
“화산 지대가 있는 비경은 공간 자체가 불안정한 곳이므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변소무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다.
상대의 반응에 진양도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그는 지도도 가지고 있고, 앞에 있는 세 비경이 구체적으로 어떤 비경인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선택지가 최선의 선택지인지도 잘 알고 있다.
화산 지대 비경 자체가 불안정한 것도 문제였으나, 그 뒤로 이어지는 두 개의 비경 역시 상당히 불안정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곳이 안전한 길일 리 없다.
또 하루가 지났다.
두 번째로 들어갔던 흑뇌위 부대 역시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쯤 되자 신전후는 진양의 말대로 맹독 늪지대로 가기로 결정했다.
맹독 늪지대는 세 번째 비경이었다.
세 번째 비경엔 자욱하게 안개가 깔려있었으며, 마치 평원같이 지형이 탁 트여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전부 늪지대였다.
풀이 약간 자라있는 곳도 있긴 했으나, 물 아래로 뿌리를 내린 것이었기 때문에 물결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 외에 진흙이 그대로 드러난 곳도 있었다.
이따금 한 번씩 맹독으로 인해 물방울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신전후 세자는 해독 단약을 복용했다.
그러나 진양은 단약을 먹는 척만 할 뿐, 진짜로 먹지는 않고 따로 챙겨두었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며 냄새를 맡아보았다.
익숙한 썩은 냄새와 짙은 맹독의 기운이 코를 자극했다.
남만과 상당히 비슷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굳이 해독약을 먹을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늪지대에 살아있는 생물은 단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짙게 낀 맹독의 기운과 진흙으로 이루어진 곳만 피하면 되었기에 이곳을 조사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다음 비경으로 향하는 입구를 찾아냈다.
입구를 찾기 무섭게 진양이 달려들어 그것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번 역시 이틀 정도의 연구 끝에 남은 두 개의 비경까지 모두 찾아낼 수 있었다.
이번에도 삼자택일의 선택지가 놓이게 되었다.
“첫 번째 입구 너머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평온한 듯하면서도 정적이 느껴지는 듯하고 딱히 큰 위험도 없어 보이긴 합니다만, 그곳으로 가는 건 별로 추천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두 번째 입구 너머로는 차가운 죽음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들어가게 된다면 열 중 아홉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입구 너머로는 마치 거대한 산이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이 느껴집니다. 한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이 들지도 모르지만,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길로 가시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진양은 지도에 기록된 내용을 더듬어 적당히 버무려냈다.
물론 이건 단순히 선택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 것일 뿐, 최종적인 선택은 결국 상대의 몫이다.
말을 마친 진양은 조용히 물러났다.
신전후는 진양이 물러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을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첫 번째 비경과 세 번째 비경으로 부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파견되는 흑뇌위의 모습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고기 방패가 따로 없군.’
사실 첫 번째 비경 뒤로 무엇이 있는지는 진양도 잘 모른다.
지도엔 작은 벌레 모양의 표식이 그려져 있던 게 전부였다.
처음 보는 벌레긴 했지만, 진양은 지난번의 일로 작은 벌레의 무서움을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에 절대로 첫 번째 비경으로는 향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첫 번째 비경 내부.
비경 안으로 들어온 흑뇌위 병사들은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살폈다.
빼곡하게 들어선 식물, 그리고 이따금 보이는 평범한 벌레를 제외하곤 특별한 건 없었다.
“평범한 날파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거라.”
부대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조용히 말했다.
흑뇌위 부대는 앞으로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날파리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개중에는 독충도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진원의 파동 때문에 몰려든 녀석들이다. 모두들 진원의 파동을 최소한으로 감추도록. 이런 보잘것없는 벌레 따위에 정신 팔릴 필요 없다.”
모두들 진원의 파동을 최소한으로 줄인 채 오직 육신에만 의지하여 숲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벌레 쫓는 가루까지 사용하자 달려드는 벌레의 양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날아드는 녀석이 있긴 했지만.
한 시진 뒤.
무리 중의 한 수도사가 갑자기 휘청거렸다.
눈앞이 흐려지는 바람에 넘어질 뻔한 것이었다.
그는 멋쩍은 듯 눈을 비비며 말했다.
“별것 아니야. 그냥 갑자기 피곤해서 그런 거야.”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는 하품했다.
그런데, 연달아 세 명이 함께 하품했다.
“나도 갑자기 몸이 늘어지는 느낌인걸…….”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를 시작으로 모두가 입을 쩍쩍 벌리며 하품을 해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휴, 왜 이렇게 졸립지…….”
“자면 안 되는데…….”
“눈이 감긴다…….”
털썩- 털썩-
순식간에 스무 명 중 열 명이 그대로 쓰러진 채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아직 잠들지 않은 이들은 적지 않게 놀랐다.
계속해서 비경 내부를 살펴보고 싶긴 했으나, 심상치 않은 상황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건 불가능할 듯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자들은 곧바로 잠든 자들을 들춰 매곤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밖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한 사람씩 풀썩 쓰러지며 영영 깨어나지 못할 잠에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비경 입구까지 겨우 반 시진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었을 즈음.
스무 명의 흑뇌위는 전부 쓰러지고 말았다.
이들이 모두 쓰러지자 평범한 날파리처럼 생긴 벌레들이 기다렸다는 듯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왔다.
그리고 깊게 잠든 흑뇌위 병사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 * *
약속했던 세 시진이 지났다.
세 번째 비경으로 들어갔던 흑뇌위는 벌써 돌아왔지만, 첫 번째 비경으로 들어갔던 흑뇌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혼등은 여전히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생사를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신전후는 굳은 얼굴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에 대한 불신이 조금 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파견된 이들에게도 말했지만, 어딘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 같으면 즉시 복귀하도록 하거라.”
신전후는 흑뇌위 부대 하나를 더 꾸려 비경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이들은 한 시진이 채 지나지 않아 먼저 들어갔던 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먼저 들어갔던 이들은 세상 모르게 코까지 골며 달콤한 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짓을 해도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진양은 조용히 다가가 잠든 이의 몸에 붙어있는 벌레 한 마리를 붙잡았다.
지도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형상의 벌레였다.
아무래도 오래된 지도이다 보니 윤곽 묘사가 정확하지 않았던 듯했으나, 같은 벌레는 맞는 듯했다.
벌레와 깊게 잠든 이의 모습을 보니 순간 현여에서 보았던 어느 기록이 떠올랐다.
“혹시 이들을 발견했을 때 이런 종류의 벌레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흑뇌위 병사는 먼저 신전후 세자의 눈치를 살폈다.
세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는 진양에게 대답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온몸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었거든요.”
“이건 갑수충(瞌睡蟲, 사람을 잠들게 만드는 벌레)입니다.”
진양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약으로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갑수충은 사람을 혼수상태에 이르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맹독을 품고 있는 벌레입니다. 물론 소량의 독이라면 단순히 잠에 빠지기만 할 뿐 실질적인 피해는 입지 않으나, 현재 이들은 독이 몸속으로 깊이 침투한 상태입니다. 영혼까지 깊은 잠에 빠진 상태라 더 이상은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분명 경고를 했으나 신전후는 믿지 않았고, 그 결과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진양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결코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남을 속이면 모두들 쉽게 속아 넘어가고, 반대로 진실을 말하면 거짓으로 간주된단 말인가?
“도장,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허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랬던 게 전부이지,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이쯤 되자 세자도 체면이 서질 않았다.
두 번이나 이런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인은 그저 보잘것없는 제안을 드리는 것이 전부이옵니다. 선택은 세자께서 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진양의 말에는 깊은 뜻이 있었지만, 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옆에 있는 이들에겐 그저 능력 있는 자가 겸손을 떠는 것처럼 보이는 게 전부였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기에, 무리는 일단 대열을 정비한 후 곧바로 세 번째 길로 향했다.
진양의 말대로 비록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으나 별다른 특별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 갈수록 묵직한 기운이 점점 더 강하게 어깨를 짓눌러오는 게 전부였다.
때문에, 버티며 나아가기만 하면 됐다.
현재 무리 중 가장 약한 몇몇 신해 수도사들이 다소 힘들어하긴 했으나, 법보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비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삼자택일의 순간이 다가왔다.
신전후 세자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진양에게 물었다.
“첫 번째 비경 너머로는 빼곡하게 들어선 숲이 보입니다. 생기와 영기 모두 왕성하고 겉보기에도 상당히 평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위험이 숨겨진 곳입니다. 두 번째 비경 너머로는 사정없이 내려치는 번개들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비경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텅 빈 허공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