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799
799화 기회를 놓칠 리 없다
한 방울의 천일진수로 탄탄대로를 꿈꾸는 것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족쇄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었다.
완벽하게 부족한 점을 채우기엔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우가 천일진수의 기운에 꼼짝하지 못하고 강한 유혹을 느꼈던 것.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독이 있어도 일단은 먹고 보는 거다.
뒤늦게 함정에 빠진 걸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다음의 일이다.
단지 이 함정이 전혀 빠져나갈 길이 없는 함정이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뿐.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도망칠 수 없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천일진수가 진짜 천일진수라는 점이다.
아주 약간의 기운만 빨아들였을 뿐인데도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족쇄가 헐렁해진 느낌이었다.
그에게 이러한 일을 지시한 사람은 결코 이 정도 수준의 보물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 정도 수준의 보물을 약속했다면 애초에 이런 함정에 빠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놈은 그저 내게 너희들의 앞길을 막고 방해하라는 부탁만 했을 뿐. 그 외의 것은 나도 모른다.”
“그게 다야?”
진양은 믿을 수가 없다는 눈초리였다.
“정말이다. 내게 최상급의 경령지수를 주며 부탁을 했다. 알다시피 난 안개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러니 경령지수 정도만 돼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단점을 약간이나마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인 거다.
다만, 너희들이 대영 신조 조정의 사람일 줄은 나도 몰랐다. 그래서 함부로 죽이지는 못했던 것이었다. 괜히 죽였다가 추살이라도 당한다면 오히려 내겐 손해니 말이다.
그러다 결국 이 꼴이 나긴 했지만…….”
녀석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진양은 피식 웃어버렸다.
분명 죽는 게 두려운 눈치였으나 보물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쓰는 모습이었다.
이걸 담이 크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담이 작다고 해야 할지.
다만, 대영 태자의 운구 행렬을 건드린 것만 보면 꽤 담이 큰 녀석인 건 확실했다.
“이 행렬은 대영 태자의 운구 행렬이다. 설령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건드린 것만으로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건 너도 예상했을 텐데? 이 사실이 정천사의 귀에 들어간다면 넌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야.
한낱 경령지수 따위에 네 목숨까지 바칠 생각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평소 괴산에 처박혀 수련만 하는데, 바깥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알겠나!”
대영 태자라는 말에 여우는 하마터면 소피를 지릴 뻔했다.
“그런 변명은 나중에 정천사 사람들을 만나면 실컷 하라고. 근데, 그런 변명이 과연 먹혀들까? 내가 아는 정천사 녀석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녀석들이 아니거든.”
“히익! 대, 대인! 하지만 저는…….”
이쯤 되니 여우는 잔뜩 겁에 질렸다.
고고하던 태도는 어디 가고 순식간에 공손해진 모습이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일단 목숨부터 건지고 보자는 듯했다.
“변명은 나중에 하라니깐. 보아하니 애초부터 녀석들은 네가 계획을 성공시킬 거라고 기대조차 안 한 모양인데. 넌 그냥 우리를 찔러보기 위해 보낸 희생양에 불과한 거지.
뭐, 좋아. 불쌍한 녀석인 것 같으니 내가 특별히 도와주지. 단,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네 몫이야.”
“말씀하시지요, 대인.”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마땅한 선택지가 없다.
물론 진양이 자신의 목숨을 건져줄 것이라는 말은 충분히 믿을 만했다.
하지만 그다음의 일은 보장할 수가 없었다.
대영 신조에 원한을 사게 된 이상 편하게 살아가는 건 이미 물 건너갔으니 말이다.
“걱정 마. 목숨도 살려주고, 천일진수도 주고, 또 도망칠 길도 다 마련해 줄 테니까. 괴산에서 왔다고 했지? 그럼 혹시 괴산에 살고 있는 산귀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들어본 적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원래 괴산을 차지하고 있던 대인과 크게 맞붙으셨는데, 산귀 대인 앞에서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밀려나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렸다고 들었습니다.”
녀석의 눈빛이 반짝였다.
존경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 산귀 대인이 바로 우리 형수님이거든. 나중에 일만 무사히 마치고 나면 내가 형수님께 잘 얘기해 줄게. 그러면 정천사 녀석들도 널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거야. 네게 이런 일을 하라고 시켰던 녀석들은 더더욱 접근조차 못 할 거고.
물론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아. 강요하진 않을 거니까.”
여우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게다가 이건 엄청난 기연이나 다름없다.
천일진수를 얻게 되는 것도 그렇고, 산귀 대인을 후견인으로 둘 수 있게 되는 것도 그렇다.
한 번에 엄청난 기연이 둘이나 찾아왔는데 이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진양은 분명 강요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진양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여우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
“알겠습니다. 대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약속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하하!”
진양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녀석을 만났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곤 손에 들고 있던 천일진수를 녀석에게 던져 넘겼다.
“약속했던 보상은 미리 주도록 하지. 그리고 약속을 꼭 지켜달라고? 그렇게 못 믿겠으면 유령 선장 진양이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물어봐. 난 지금까지 신용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다 이 말씀이야.”
녀석은 진양이 건넨 천일진수를 받아 삼키며 진양이라는 이름을 마음속에 잘 새겼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얘기한다는 건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성공 보수까지 미리 주다니.
결코 빈말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런 사람을 배신했다간 결코 좋지 못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해. 그냥 계속해서 녀석들이 시킨 대로 나랑 같이 있는 녀석들을 전부 삼켜버리면 돼. 그러다 적당한 곳에 풀어주면 되고. 대신 네게 이 일을 시킨 녀석, 그 녀석이 어떻게 생겨 먹었고, 또 왜 네게 이런 일을 시켰는지 알고 싶어.”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비록 외모를 바꾸고 있었긴 하지만 녀석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거든요.”
여우는 순순히 진양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엄청난 보물과 후견인, 거기에 도망칠 길까지 약속받은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다.
녀석에게 이런 일을 시킨 자들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하여튼 이족들은 인간보다 단순해서 그런지 다루기 쉽단 말이지.’
진양은 여우를 밖에 풀어주었다.
그리고 기절시켜 몰래 숨겨둔 사람들을 전부 여우에게 넘겨주었다.
이들 중 일부 근위병을 제외하면 전부 실력 없는 의장대 사람들이었다.
이런 녀석들은 따라와 봐야 짐만 된다.
그러니 아예 미리 빼놓는 게 상책이다.
여우는 다시 안개로 변해 숲속을 자욱하게 뒤덮고 있는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녀석은 결코 진양을 배신하지 못할 것이다.
진양을 배신한다면 붙어먹을 곳은 전조뿐이다.
그러나 매정한 전조 녀석들이 이족 따위를 지켜줄 리는 없다.
그러므로 진양을 배신한다면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셈이 되는 것.
이족이 바라는 건 매우 간단하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 그리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 거기에 더 높은 단계로 향할 수 있는 기연을 얻는 것.
이 세 가지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양은 이 세 가지 요구를 한 번에 모두 만족시켜주었다.
그러니 녀석이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결코 진양을 배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진양은 관을 들고 있는 자신의 분신을 향해 이만 출발하자는 듯 손짓을 했다.
그리곤 그들이 들고 있는 관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절 만날 걸 천운으로 여기셔야 할 겁니다.”
준비를 마친 일행은 계속해서 숲을 가로질렀다.
태자는 관 속에서 기운을 최대한 숨긴 채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있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수치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은 모두 자신이 죽어도 놓지 못했던 집념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죽은 교인을 생각해 보면 더욱 양심에 찔렸다.
진양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극진히 보살폈었다.
그런 그녀가 태자의 집념 때문에 죽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본다면, 태자는 결코 진양처럼 원수를 은혜로 갚을 용기가 없었다.
* * *
진양은 하얀 깃발을 든 채 선두를 지켰다.
심지어 밤낮없이 곡소리를 이어나가기까지 했다.
장례에서 이런 과정은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편안한 안식을 유도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을 직접 경험해 보는 건 진양도 처음이었다.
물론 번거로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써먹을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임했다.
예를 들어 나중에 운 좋게 어느 고수의 시신을 찾게 되었을 때.
그냥 아무 감정 없이 성불을 시키는 것보단 이런 과정을 거친 뒤에 성불을 한다면 훨씬 더 높은 등급의 광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소 귀찮긴 하겠지만 그래도 원래 나올 광구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광구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인구 행렬은 대영 황실 묘지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들을 몰래 뒤따르는 사람들은 한층 더 은밀하게 뒤를 밟았다.
부하를 이끌고 따라오고 있는 가희와 위흥조.
그리고 더 먼 곳에는 이름 모를 강자들도 있었다.
이제 황실 묘지까지는 겨우 오천 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진양은 한층 더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전조 녀석들이 가장 마지막 구간에서 거사를 벌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황실 묘지는 대영 신조의 국운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는 곳이다.
대영 신조의 국운에 큰 타격을 줄 생각이라면 이곳을 건드리는 것만큼 가성비 좋은 수단은 없다.
황실 묘지는 평소 굳게 닫혀있다.
비록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이곳은 이도 궁성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방어 금제가 펼쳐진 곳이다.
많은 사람이 지킬 필요가 없는 것도 바로 이 철옹성 같은 방어 금제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영제의 본존이 만년제에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조 세력은 만년제에서 마지막으로 영제를 떠보려고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영제를 떠볼 곳은 바로 이곳이다.
만약 이곳에도 영제의 본존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건 본존이 정말로 실종되었다는 뜻이다.
영제가 사라졌다는 게 확인이 되면 곧바로 거사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만년제가 시작되면 황실 묘지가 열린다.
대영에 큰 타격을 줄 생각이라면 이때가 바로 절호의 기회다.
영제의 법신을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실의 묘지를 뒤집어 대영의 용맥을 끊어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제의 상태를 확인하는 즉시 대영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게 된다.
태자의 운구를 마치기 위해선 황실의 묘지를 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거사를 치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그러니 전조 세력도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