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75
975화 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
진양은 한숨을 쉬며 남은 하얀 광구를 자신의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사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격렬한 영력의 파동으로 인해 강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천둥이 내려치는 것처럼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사방에 난무했고, 사악한 요기로 만들어진 검은 비가 쏟아지며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깡마른 소녀가 지붕 없는 사당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듯 피가 흐르는 양쪽 귀를 막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때, 청량한 울음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거대한 화염새가 날개를 펼치며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요기로 만들어진 비는 순식간에 불타버리며 소멸되었다.
한 줄기의 요기가 지면으로 떨어지며 모여들었고, 몸이 반쯤 타버린 사도 수도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수도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는 마치 중상을 입은 것처럼 두 눈에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서 가희가 내려와 그를 발로 밟아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이어서 손을 뻗자 새빨간 화염이 뿜어져 나와 남아있던 사악한 기운마저 깔끔하게 소멸시켜버렸다.
가희는 벌벌 떨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영액(靈液)을 먹여주었다.
소녀는 눈이 풀리는 듯싶더니 이내 완전히 기절해버렸다.
기억은 여기서 끝이 났다.
이것은 적란이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고 있던 기억이자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가장 큰 비밀이었다.
기억을 확인하고 나니 진양의 마음은 한층 더 불편해졌다.
차라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배반을 저지른 자가 죽었다면 오히려 통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배반을 저지르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배반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말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오직 가희에게 충성을 다 하던 사람이었는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성이 왜곡되며 결국은 처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생각할수록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었으면 이토록 비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무슨 개죽음이란 말인가!
반드시,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원흉을 찾아 복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모든 처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진양은 혈란을 따라 다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진양은 도저히 모른 척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적란은 본심은 배신을 하려던 게 아닙니다. 그저 이성이 왜곡되었을 뿐이죠.”
“사실 전 적란을 믿어요. 절대로 폐하를 배신했을 리 없어요.”
혈란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하지만 본심이 남아있었다면 분명 자결을 선택했을 거예요. 결코 그런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 아이가 저를 습격하는 순간 깨달았죠. 결국 그녀를 해탈시킬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라는 걸요.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에겐 결코 해탈은 아니겠죠.”
진양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직접 힘에 당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이성과 기억이 완전히 왜곡되는 순간 일자결을 익힌 자신조차도 다시 만회할 기회가 없었다는 걸.
이성과 기억이 왜곡 당하는 순간, 설령 검은 힘을 밀어내고 소멸시킨다고 하더라도 왜곡된 이성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상태다.
“진군이 망가진 이유를 알고 있나요? 전체적으로 멀쩡해 보였지만 핵심이 파괴된 이유, 바로 이런 일을 벌인 사람이 희생당한 진법사 본인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완전히 미쳐버렸어요. 자신의 영혼까지 불태워버렸죠. 파괴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말이에요.
이곳은 외층 전장, 냉혹한 곳이죠.”
* * *
전장을 빠져나오자 정례적인 검사가 이어졌다.
혈란이 말했다.
“진군 수리도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검사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빛이 진양을 수차례 훑었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나서야 두 번째 층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진양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책자를 꺼내 살폈다.
책자에는 복잡한 선들이 이어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머릿속에 있던 기억들을 토대로 그린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과 머릿속에서 직접 기억이 떠오르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적어도 이렇게 그림을 보는 건 아무런 위험이 없으니까.
그림 속에는 여러 명의 이족이 그려져 있었다.
이 중에는 거인도 포함되어있었다.
예전에 봤던 바로 그 추격수였다.
그림을 확인한 진양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당장이라도 거인의 머리를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검둥이가 자리에 없다는 점이 이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만약 검둥이가 있었다면 적어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상의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닭이나 묵양처럼 생각 없는 녀석들과는 이런 일에 대해 논할 가치조차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양은 머리카락을 한 올 뽑아 분신을 만들었다.
분신은 형성되기 무섭게 뒤로 물러섰다.
“본체, 진정해.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침식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도 알아. 그냥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뭐? 자기 자신과 상의를 하겠다고? 아니면 자기 자신이라도 말리려는 거야? 어차피 우리 둘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분신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용히 진양의 앞에 앉았다.
“맞아. 네 말대로 내 자신을 좀 말려보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어떤 사람인지 네 스스로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 사람이 암살을 당했는데도 가만히 있을 사람일 리가 없잖아.
게다가 너도 이쯤이면 눈치챘을 거 아냐. 이젠 더 이상 네가 조용히 떠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도 아니고.”
* * *
허공.
새까만 역금자탑이 짙은 어둠 속에 동화되어있었다.
이백만 리나 되는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군이 유지되며 방어막이 작용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거대한 그물이 전장에서 두 번째 층으로 향하는 길목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층 전장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전장에선 단 한 구의 시신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몸길이가 수천 장에 달하는 거대한 규룡을 닮은 이족이 헤엄치듯 전장을 누비고 있었다.
한참 거대한 그물의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이던 그는 어느 한 곳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이곳은 세 개의 역금자탑의 핵심이 파괴되며 벌어진 틈이 존재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복구되어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전과는 크게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규룡은 부문으로 가득한 까만 금속 조각을 뱉어냈다.
이어서 조각이 녹아내리며 규룡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한 규룡의 몸이 부서지며 수만 마리의 손가락만 한 굵기의 뱀의 형상을 이루었고, 뱀은 천천히 그물을 향해 접근했다.
미약한 빛이 번쩍이며 수만 마리의 작은 규룡들은 그물을 넘어 진군의 방어 범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작은 뱀들은 한 금자탑을 향해 다가갔다.
그것은 진양이 복구한 세 개의 역급자탑 중 하나였다.
복구된 역금자탑은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의 기반은 그대로 유지되며 복구되었다.
규룡은 본래 역금자탑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부품의 조각과 하나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역금자탑에 가까워지자 작은 뱀들이 하나로 뭉쳐지며 다시 거대한 규룡의 형상이 나타났다.
규룡은 입에서 내뿜어진 검은 연기가 역금자탑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역금자탑의 핵심 부위에서 부문이 피어올랐다.
은은한 빛이 역금자탑을 감싸며 다가온 검은 연기를 완전히 막아냈다.
이어서 또 하나의 부문이 피어올랐다.
고대의 신비로운 힘이 발산되며 부문의 힘이 한층 더 강력하게 일어났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방원 만 리에 있는 모든 것이 강력한 힘에 의해 압도되며 멈춰 섰다.
규룡은 마치 그림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부문이 빛을 발했다.
역금자탑을 중심으로 은은한 빛의 물결이 일어났다.
물결이 규룡의 몸에 닿는 순간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소멸되어버렸다.
주위는 다시 평온해졌다.
역금자탑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 * *
진양은 두 번째 층에서 며칠 정도를 더 머물렀다.
이곳엔 대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적들이 가득했고 그 누구도 진양을 제지하지 않았기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 많은 서적들을 살펴보았다.
이 외에 적란의 장례에도 참여했다.
시신도 없고, 관도 없이 작은 상자에 적란이 생전에 입었던 옷만 담긴 게 전부였다.
이렇게 의관총(衣冠冢, 죽은 사람의 옷을 묻어 만든 무덤)만으로 간이 장례식이 치러졌다.
대외적으로는 적란도 진법사처럼 적의 기습에 희생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가 끝나자 진양은 곧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때, 자란이 진양을 찾아왔다.
“이걸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자란이 옥간을 건넸다.
옥간에는 진양이 최근에 수리했던 역금자탑에 거대한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규룡이 나타났던 기록이 적혀있었다.
겁 없이 역금자탑에 덤벼들었던 녀석은 역으로 역금자탑의 힘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언제 있었던 일이죠?”
“하루 전에요.”
자란은 다시 옥간을 회수하며 말했다.
“이족이 소리 없이 숨어들어왔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방어에 틈이 생겼다는 뜻이겠죠. 다행히 진 선생께서 미리 방비를 해 주신 덕분에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조금 더 머물면서 진법을 보강해 주실 순 없을까요?”
이어서 멋쩍은 듯 말했다.
“제가 직접 살펴보긴 했는데 새겨져 있던 여섯 개의 상고 부문 중 단 하나도 못 알아보겠더라고요. 도저히 손을 댈 엄두도 나질 않았고요.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진 선생께 이렇게 부탁을 드리려는 겁니다.”
“혈란 소저께서도 알고 계신가요?”
“물론이죠. 지금 사람들을 이끌고 진군을 살펴보러 가셨어요. 다 같은 식구나 다름없으니 굳이 외부인 취급하며 본인이 직접 찾아갈 것까진 없으니 제게 물어봐달라고 하셨죠. 만약 바쁘시다면 다음을 기약해도 상관없다고 했고요.”
“뭐, 다 같은 식구끼린데 그 정도 부탁도 못 들어드릴 건 없죠. 괜찮습니다.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 지금 당장도 문제없습니다.”
진양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식구라니.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진양은 자란과 함께 거점 밖으로 나서자마자 물었다.
“꽤 큰일인 것 같은데. 다들 알고 있는 건가요?”
“아뇨. 언니께서 일단은 함구하라고 하셔서요. 당장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혈란 언니와 저, 그리고 진 선생이 전부입니다.”
“그렇군요.”
진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물었다.
“대제께서는 출관하셨나요?”
“아직이요.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거점 밖으로 나온 진양은 끊임없이 펼쳐진 허공을 바라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너머로 은연중에 별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