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92)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92화 >
“파가니니가 피아노를 다뤘다고요?”
아무렴, 어렸을 적 음악을 배우면서 바이올린과 피아노 심지어는 첼로까지 함께 배우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 귀족들의 경우 사교적인 목적으로 가짓수를 늘렸으면 늘렸지 줄이지는 않았으리라. 하물며 음악가의 집안은 어떻겠는가. 허나.
“칼뱅 수준의 실력자였다니요?”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칼뱅이 누군가, 체르니의 애제자 중 한 명으로 한때 리스트의 경쟁자라고 알려진 피아니스트지 않은가. 그러나 건초염을 앓아 결국에는 피아노에서 손을 떼야 했다. 그 실력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칼뱅이 피아노를 그만두던 날 유럽사교계가 비
통에 빠졌다는 말이 있었으니. 오죽하면 리스트가 불세출의 천재는 자신이 아니라 칼뱅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군요, 마에스트로.”
“칼뱅이 직접 그리 말했다고 하더군요.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이 아니라 피아노를 연주했어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소문이 났을 거라고 말이에요. 항간에는 칼뱅이 건초염 때문이 아니라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습니
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보고 자괴감에 빠졌다고 했다. 끝내는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연주를 따라가지 못하니 피아노계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다짐했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헌데 만약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이 아니라 피아노를 쳤다면 그들
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마에스트로, 외람되지만 그 어떤 문헌 기록에도 니콜로 파가니니가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 잠깐 배워본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감독. 저 또한 친애하던 스승님께 어렸을 적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다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두고 피에트로 로카텔리를 넘어섰다고 말했지만 칼뱅은 다르게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그저 바이올린은 파가니니에게 가장 잘 맞는 옷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하물며 파가니니라는 이름 옆에는 그 어떠한 비교 대상도 함께할 수 없다고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하기는 너무나도 구체적이지 않은가.
“피아노를 그만둔 칼뱅은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는 단 한 명의 제자만을 두었지요. 제자의 이름은 연주자로서의 명성보다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뛰어났던 러시아의 거장 바실리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우어 교수에게 퇴짜를 맞고 찾아갔던 음악가의 이름도
바실리지요.”
일순 장피에르는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칼뱅은 제자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니콜로 파가니니는 악마가 아니라 음악의 신에게 축복을 받았다.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에만 정통할 뿐만 아니라.”
그때 구스타프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든 악기를 다룬다고요.”
*
영화촬영장은 많은 스태프들이 함께한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카메라 밖 보이지 않는 무수한 개개인의 노력이 한데 모여 비로소 영화가 완성된다. 지난 삶에서도 영화촬영장을 가본 적이 있었다. 훗날 영화판에서 감독들이 히로뽕을 투약해 이슈가 되었
던 사건을 해결한 영감님이 바로 나였다.
“다시―!”
장피에르가 미간을 좁혔다. 촬영 카메라 속에 비치는 앵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그것도 아니면 배우들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테지. 벌써 몇 번째 엔지인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신인배우의 얼굴이 피죽도 못 먹은 사람 마냥 시퍼렇게 질려 들어가고 있
었다. 스태프들의 표정 또한 심상찮게 변했다.
“환각제를 복용한 상태에서 피아노를 연주해야 하는데 장면을 살리기 어려운 모양이군요.”
알렉산드로의 말처럼 유럽사교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마약과 향락에 취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지만 신인배우가 감당해내기에는 힘든 연기였으니. 하물며 지난 삶 내가 보았던 파가니니의 장면과도 분명 괴리감이 있었다.
“알렉산드로 씨라면 어떻게 연기를 하겠어요?”
“저라도 쉽사리 조언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저건 본인이 스스로 깨우치기 전까지는 해결하지 못할 거예요.”
알렉산드로가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난 헐리우드 배우도 마른 입술을 쓸어 보이는 마당에 신인배우가 오죽하겠는가.
“잠깐 쉬었다 갑시다. 로즈 씨는 잠깐 저랑 이야기를 좀 나누고요.”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장피에르였다. 영화촬영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벌써 몇 시간째 소모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다른 배우들은 이맛살을 찌푸릴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촬영장에서는 으레 있는 일이기 때문.
“누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장피에르와 이야기를 끝마친 신인배우였다. 그녀는 애써 눈물을 참고자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과 분노 때문이리라. 처음에는 도와줄 생각이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대로 가다가는 하루가 꼬박 지나도 제자리걸음일 테니.
“환각제라고 해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손가락을 좀 더 경직되게 사용하세요. 약에 취해서 연주를 한다고 해서 흐느적거리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좀 더 집중해서 미친 듯이 연주하세요. 마치 건반에 천둥이 내리쳐지듯이 말이에요. 약에 취했다는 건 반쯤 벗
겨진 옷과 초점을 잃은 동공만으로도 충분히 표현 가능하니까요. 참, 화장 수정하지 마세요. 반쯤 지워진 그 모습이 더 잘 어울려요.”
지난 삶 봤던 파가니니의 장면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 신인 여배우가 어떻게 연기했는지 머릿속에 생생했다. 짧은 장면에 출연하는 신인 배우였지만 어찌나 연기력이 대단했던지 말들이 많았으니. 분명 그녀는 이 한 컷으로 인해.
“이 장면이 누나의 인생을 바꿀지도 몰라요.”
훗날에는 오스카의 자리를 차지하는 여배우가 되어있으리라.
두두두둥―!
과연 단 한 번의 조언이었지만 될성부른 떡잎은 다르다는 것인가. 신인배우는 찰떡같이 내 말을 알아들었으니. 천둥이 내려치는 건반 소리와 여배우의 모습이 앙상블을 이루니 장피에르의 얼굴에 절로 화색이 만연해졌다. 그때였다.
“어떻게 한 겁니까? 바이올리스트 현.”
알렉산드로가 내 곁으로 다가와 은근슬쩍 묻는 것이 아니겠는가. 난 시치미를 떼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금 전 로즈에게 조언을 하는 모습을 다 봤습니다.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눈이 커지는 것쯤은 잘 보였다고요. 장피에르 감독님의 얼굴을 보세요. 오늘 촬영 내내 저토록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입니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그녀의 연기가 이토록 달
라진 겁니까?”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설마 바이올린 자세를 봐주는 것처럼 연기를 보는 눈도 갖춘 것입니까?”
알렉산드로의 오해는 계속되었다.
* * *
“초대장이요?”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의 저녁식사 초대였다. 장피에르 감독을 시작으로 알렉산드로, 마르티나 그리고 나와 임혜라 이사장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이름이 적힌 초대장이 발부되었다. 마치 중세시대를 재현한 것처럼 붉은 촛농으로 밀봉된 편지이지 않은가. 하물며
손수 적은 유려한 글귀까지. 구스타프의 성정이 여실히 드러난 초대장이었다.
“현아, 이 드레스 괜찮겠니?”
임혜라 이사장은 벌써 드레스 코드를 신경쓰느라 여념이 없다. 아무리 봐도 보호자의 역할로 따라온 것이 아니라 여행을 온 것이 분명했으니.
“현아, 너도 이거 한번 입어보고 나와보렴.”
숫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임혜라 이사장은 몇 벌의 옷을 내게 가져다주고는 계속해서 입혀보길 반복했다. 이제는 정장을 얼마나 갈아입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다. 아무리 봐도 그냥 가면 될 것을. 임혜라 이사장의 진지한 눈빛을 보면 시상식장이
라도 가는 줄 알겠다.
“도착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구스타프의 별장을 보고는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과연 전 세계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바라마지 않는다는 영원한 마에스트로다웠다. 호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으리으리하지 않은가. 폴란드의 모즈나 성을 그대로 본 따 온 것 같은 모습이
었으니. 그 고풍스러운 외관에 임혜라 이사장마저도 얕은 감탄을 터뜨릴 정도였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어?”
알렉산드로의 정장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나와 똑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상표는 물론 행거치프의 색 까지 같으니 같은 곳에서 맞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이즈에서 확실히 차이가 났으니. 어찌 보면 젊은 아버지와 아들 같지 않은 모습이다. 그때였다.
“두 명의 파가니니가 마음이 통했나 보군요.”
여배우 마르티나가 입을 가리며 호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정장은 내 취향이 아니라 임혜라 이사장의 취향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중세시대풍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대식당이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들 들어주세요.”
휠체어에 앉은 구스타프가 우리를 반겼는데 그의 말과는 달리 화려한 식탁보 위로는 만찬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큼 가지각색의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하물며 와인은 어떠한가. 그랜드 에미타미르, 오스트리
아산 최고급 와인이다. 소믈리에들 사이에선 신의 물방울이라 불리는 로마네꽁띠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쫄쫄쫄.
하지만 집사가 내게 따라주는 것은 와인이 아닌 포도 음료였으니. 이 애타는 마음을 누가 알까. 괜스레 들뜬 마음을 포도 음료로 달랬다.
“제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출신입니다. 그래서 오늘 오스트리아 비엔나식 가정식을 준비해봤습니다. 주방장이 오랫동안 저의 입맛을 담당해왔던 분이라 장담하건대 요리실력 하나는 그 어떠한 호텔 주방장 못지않습니다. 제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이지요.
물론, 항상 제게 와인을 끊으라고 잔소리를 하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구스타프의 농담과 함께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정말 구스타프의 말처럼 미슐랭 주방장들조차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음식들이 맛있었다. 웬만한 미식가 못지않은 입맛을 지닌 임혜라 이사장의 얼굴에도 행복한 기색이 역력했으니. 그때 구스타프가 맘씨 좋은 할아
버지처럼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어린 마에스트로께서는 입맛에 맞으십니까?”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마에스트로. 특히 이 특제소스가 곁들어진 타펠슈피츠는 정말 맛이 엄청납니다. 아직도 혀가 감탄하는걸요?”
소의 엉덩이 살을 뿌리채소와 함께 푹 삶아 구운 감자 등과 곁들어 먹는 오스트리아 전통식이었다. 지난 삶에도 몇 번 먹어봤지만 이렇게 특제 소스를 뿌린 타펠슈피츠는 처음이었으니.
“오스트리아의 대표 음식을 알고 있다니, 어린 마에스트로께서는 타펠슈피츠를 경험해봤나 보군요?”
“일전 러시아에 갔을 때 오스트리아 전통식을 파는 식당에서 먹어봤습니다. 그때 기억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어서요.”
어째 순발력이 더욱 발달하는 것 같다. 등 뒤로 굵은 땀방울이 마를 즈음 식사가 끝났다. 후식으로 나온 아름다운 찻잔에는 꽃잎이 하나씩 띄워져 있었다.
“이탈리아에 있는 이 별장은 제가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건축한 건물입니다. 17세기 바로크양식으로 건축하여 실내에서도 악기의 연주 소리가 깊고 풍부하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설계하였지요. 하지만 웬걸 별장이 다 만들어지고 나니 제 어깨가 말썽이었습니다. 더
는 바이올린을 켤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죠.”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 순간 구스타프가 나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린 마에스트로, 실례가 안 된다면 이 자리에서 연주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지만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이토록 성대한 만찬에 초대를 받았으니 그만큼의 보답은 해야 하는 것이었다. 난 흔쾌히 수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나 켤 바이올린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제 별장에는 악기들이 여럿 있으니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러 악기가 진열된 케이스들이 준비되었다.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특이한 악기들도 많았다. 마치 현악기 박물관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말이다. 아까도 언급했던 바지만 과연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의 별장다웠다.
“마에스트로, 이 악기를 사용해봐도 되겠습니까?”
“역시 보는 눈이 있군요. ‘리라’라면 좋지요, 바이올린과 비슷한 고대의 발현악기이니까 말입니다. 관리가 잘 되어 아직도 소리를 낼 수 있답니다. 음악가에게 모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재능만큼 축복받은 것은 없지요.”
고대의 발현악기라는 말처럼 아주 오래된 악기였다. 이런 악기는 이 자리가 아니면 결코 연주할 수 없을 테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구스타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봤다.
반면 장피에르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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