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Mythic creator is a regressed player RAW novel - Chapter 141
논공행상 (2)
아무리 공이 크다 한들 이제 20대 후반에 불과한 청년에게 부교주의 직위를 내릴 줄이야!
한 마디 말로 대전을 충격에 빠뜨린 교주는, 마찬가지로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는 나를 자신의 앞으로 호출했다.
“부교주는 앞으로 나와 명을 받들라.”
“…존명!”
합심해서 전 교주를 물리친 이후 호형호제 할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가 된 우리였으나, 수많은 교도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단상 앞에 부복하며 그가 내민 성화가 새겨진 패를 받아들었다.
-곤륜산 옥양봉에서만 채취되는 설옥으로 만든 패일세. 앞으로 어디에서든 자네의 말 한 마디면 명교도들이 두 발 벗고 나설 테니 부디 거부하지 말게나.
그것은 이후 중원으로 돌아갈 나를 위한 부교주의 선물이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단호함이 깃든 얼굴에 난 사양 않고 호의를 받아들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로서 천서원은 명백한 본교의 부교주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광명천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파란의 취임식이 모두 끝난 뒤,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부교주라는 직책은 애초에 금양이 좌사였던 날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자리에 불과하네. 허울 좋은 직책일 뿐 특별한 책임은 없으니 부담 갖지 말고 받게. 그리고 아우는 중원에 별다른 세력도 없질 않나. 받아 두면 반드시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올 것이네.”
알현실에서 독대한 나와 교주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의 딱딱한 격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대형.”
“그보다 아쉽지는 않나? 중원에 평화를 가져온 영웅으로 이름을 날릴 절호의 기회인데.”
“권력에는 큰 욕심이 없는 편이라…. 전 평화를 얻은 것으로 충분하니, 후에 중원과의 불가침 조약만 잘 성사시켜주시길.”
난 고민 끝에 천서원의 정체가 조가휘임을 어둠 속에 묻기로 결정했다.
그러한 선택에는 전 교주에게 단환을 보낸 세력의 정체가 오리무중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혈혈단신이라면 모를까, 괜한 공명심으로 가족과 주변인의 위험을 자초하고 싶진 않았다.
“약속하지. 또한 암중 세력의 소식 역시 밝혀지는 대로 성녀를 통해 바로 전하도록 하겠네. 성녀의 법구를 이용하면 먼 거리에서도 연락할 수 있다고 들었네만.”
“그렇습니다.”
“그런 법구가 하나 뿐인 것이 아쉽군.”
사실은 그냥 동생 분이 양쪽 플랫폼을 오가며 채팅을 전해줄 뿐이지만요.
“그리고 이거 받게.”
“이건….”
“교주의 시신에서 발견된 암중 세력의 증표일세. 처소에서도 하나가 추가로 발견되었으니, 나눠 갖도록 하지.”
“더 하실 말씀은….”
“이제 없네.”
주작과 용이 새겨진 패를 품에 갈무리 한 난,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모레 성녀께서 절 식사자리에 초대하셨는데 가도 괜찮겠습니까?”
“그걸 내게 묻는 이유가 뭔가.”
“아시면서.”
내 미소와 비례하여 그의 얼굴엔 곤혹이 깃들었다.
“혹시 오해하시면 안 되니까요.”
“하하….”
머쓱한 얼굴로 웃는 그에게 난 몇 마디를 보탰다.
“성녀께서 그렇게 열렬히 구애를 하시는데 웬만하면 받아주시지요. 일편단심에 외모도 빼어나고, 신비한 능력마저 지니셨으니, 그런 신붓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본교의 성녀는 본디 혼인을 해선 안 되네.”
“조금 전 취임식에서 전례까지 들먹이시며 절 부교주 자리에 올리시던 파격적인 모습은 어디 가셨습니까. 저도 나름 조사를 해봤습니다. 과거 교주님들 중에 성녀와 혼인한 사례가 아예 없진 않더군요.”
“…반 년 만에 어엿한 명교의 형제가 다 됐군. 그건 또 언제 찾아봤나.”
약간 상기된 표정을 보아 하니, 그도 수진이에게 영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이번 싸움이 끝나고 수진이가 오죽 끈질기게 대시를 했어야 말이지, 옆에서 보는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으니.
뭐, 둘 다 어른이니 알아서들 하겠지. 더 이상의 지원 사격은 오지랖이기도 하고.
“아, 그보다 한 가지 부탁을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든 말만 하게.”
“광명각 서고에 한 번만 더 출입을 허락해주실 수 있을지.”
“본교의 부교주에게 그 정도 권한도 없겠나. 부탁이랄 것도 없으니 원하는 대로 둘러보게나.”
“감사합니다.”
그럼 허락도 받았겠다.
돌아가기 전까지 혼돈기 3권이나 찾아볼까?
***
이틀 뒤, 성화궁의 모처.
“나 왔어.”
“어서와, 오빠.”
“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성녀의 초대를 받고 성화궁을 찾은 나는, 비밀의 방 가득 차려진 현대의 음식들과 주류를 발견하곤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다.
“동생 분이 고생 좀 하셨겠네?”
“오빠, 다 내 돈으로 산거거든?”
“그래, 수진에몽도 고생했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 치며 식탁 한편을 가리켰다.
“일루 앉아.”
“생각해보니까 여기 온지 거의 반년인데 이렇게 식사 한 번 못해봤네.”
그녀가 내어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니, 뒤이어 차가운 이슬이 맺힌 맥주 캔 하나가 눈앞에 놓였다.
탁, 칙-!
“이제 술친구 좀 생기나 했더니 가야 된다네. 잔 좀 더 기울여봐.”
“땡큐. 근데 돌아가는 시간까지 따지면 나 집 나온 지 거의 1년 반이야. 이제 가야지.”
“그래, 가라…. 아, 거품 뭐야.”
“야, 나 맥주 20년 만에 따라본다.”
“짠-.”
곧 잔과 잔이 부딪히고 황금빛 쌉싸래한 탄산이 목을 적시니, 여기가 진짜 무림인가 싶어 실소가 흘러나왔다.
“차리느라 고생했어.”
“고생은 오빠가 다 했지. 고마워, 도와줘서. 이제 좀 발 뻗고 자겠네.”
“나 좋자고 한 일인데.”
어깨를 으쓱하는 내게 그녀가 안주가 담긴 접시를 건네며 물었다.
“혼돈기 못 찾았더라?”
“벌써 봤어? 야, 네가 볼까봐 무서워서 뭘 못하겠다.”
“키스하고 부비부비하고 다 하더만. 근데 왜 천화대 애들이랑은 안 해? 아, 안 보이는 데서 다 했나?”
“야, 깜박이 좀 켜고 들어와. 또라이 같아, 진짜.”
나 아니면 누구랑 이런 이야기를 하냐며,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으며 웃는 그녀에게 되묻는다.
“교주님이랑은 좀 어때?”
“요즘 워낙 바빴잖아. 그렇게 나쁘진 않아.”
“주아랑은? 친해졌어?”
“어. 나 며칠 전에 엄마 소리 들었잖아. 액괴가 효과가 좋더만!”
그렇게 서로의 연애사부터 시작해서.
“야, 솔직히 내가 더 고생했지. 난 초반에 내공도 못 쌓았어.”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면서 엄살이야.”
“아기 때 겁나 답답해. 그리고 넌 처음부터 카메라 떨어져 있었지. 난 머리에 붙어 있었어.”
유치함의 끝을 달리는 고생담까지.
같은 현대에서의 추억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화 주제는 화수분처럼 솟아났다.
“오빠, 그거 해봐.”
“뭐.”
“때가 도래했다-.”
“뭐야, 왜 이렇게 잘해. 음성 변조기 필요 없겠는데?”
“뭐래. 근데 오빠 진짜 술 마시고 싶었나보다.”
아니라면 거짓말이지.
환생한 뒤에도 기회가 생기면 한 잔씩 마시긴 했지만, 영혼이 기억하는 현대의 맛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래도 뭐랄까… 계속 술을 들이켜고 있으니 우희와 약빈이와 함께 조가장에서 만들어 먹곤 했던 어설픈 한식의 맛이 떠올랐다.
그만큼 그들이 그리워서겠지.
“근데 오빠.”
“응?”
“내가 독 같은 거 넣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홀짝홀짝 마셔?”
“풉-.”
“아, 디러! 흐흐.”
웃으며 식탁 위를 닦아내는 그녀에게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넣었어?”
“아니이-. 오빠 방송 보니까 교주한테 토사구팽? 그런 얘기도 하고, 의심도 많아서 혹시 나도 그런 의심 받나 싶어서.”
“뭘 그런 걸 걱정해.”
“그럼 안 쪼냐. 시청자들이 다 채팅 창에 ‘이게 정파?’, ‘마교 먹어요’, ‘성녀ntr’이러고 있는데.”
취한 김에 은근슬쩍 속내를 밝히는 그녀에게, 나 또한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솔직히 마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땐 그런 걱정도 해봤어. 얘가 나 통수 치면 어쩌나….”
“근데?”
“근데 생각해보니까 내 채널 구독자가 몇인데, 너 때문에 채널 닫히면 팬들이 너랑 동생 신상 털 거 아니야. 그럼 현대에서 물품 받기가 힘들어질 수도 있는데 설마 네가 그럴까, 싶어서.”
“엇.”
“뭔데 그 ‘엇’은? 생각 안 해봤어?”
실소를 터뜨리는 날 따라 배시시 웃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오빠 온 김에 까먹지 말고, 이따가 저것 좀 가져가.”
“뭔데?”
“스타킹.”
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눈을 한 내 모습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까먹었어? 스타킹 신은 우희. 고양이 머리띠 한 약빈이.”
“…아.”
“뭘까, 그 ‘아’는?”
조금 전의 날 흉내 내며 웃은 그녀가 아까부터 방 한 구석에서 존재감을 뽐내던 거대한 배낭을 내게 건넸다.
“지금 열어봐도 돼?”
“당연하지.”
난 술을 마시던 것도 멈추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 아이의 기분으로 배낭에 든 물건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컬러렌즈.”
“중원에서 금안마공 펼치려면 필요할 테니까.”
“센스.”
다음으로 배낭에서 튀어나온 것은 소형 카메라였다.
“오빠가 촬영하는 영상 주변 사람들은 못 보니까, 그걸로 추억이나 남기라고.”
“우희가 신기하다고 분해해보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고마워. 진짜 생각도 못했는데.”
“그리고 이쪽 태블릿에는 여태까지 오빠 채널에 올라온 영상 다 받아 놨으니까, 어린 시절 건 이걸로 보구. 그리고 오빠가 부탁한 서적들도 전부 여기에 넣어놨고, 배터리도 하나 넣었고….”
“충전은?”
“이제 양쪽 사이 좀 좋아지면 하오문 통해서 보내줄게.”
그 외에도 배낭 안에는 요리는 물론, 약재나 독 제조에 유용한 전자저울을 비롯해 건전지나 태양열로 작동하는 소형 전자제품 몇 가지가 들어 있었다. 심지어는 우리 가족과 사부님을 위한 선물까지도.
“근데 상비약은 왜?”
“오빠네 엄마는 무공 안 익혔잖아. 항아랑 석율이? 아기도 아프면 쓰고.”
“너 진짜 섬세하네?”
“응. 오빠도 섬세한 여자 만나.”
칭찬이 싫지 않은지 한쪽 입 꼬리를 끌어올리는 그녀에게 반쯤 진심을 담아 물었다.
“수진에몽, 그냥 교주님이랑 주아랑 우리 집 옆에서 사는 건 어때.”
“사실 난 그래도 상관없는데, 교주님이 되겠어? 오빠도 가족 데리고 이리 오라고 하면 난감하잖아.”
“그렇지.”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지섭이 통해서 연락해.”
그렇게 배낭 탐색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마침내 문제의 ‘그 상자’가 등장했다.
살짝 열린 상자 틈새로 보이는 남성의 온갖 판타지가 담긴 의상들을 비롯해, 기타 어른의 물건들을 발견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내가 처음에 말했지? 초박형, 돌기형….”
“야이씨, 근데 왜 옷들이 다 세 벌씩이야?”
내 물음에 그녀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피어났다.
“혹시 몰라서 려군 언니 것도 담았지.”
“아, 사고였다고.”
“입술은 삼류예욧!”
“시끄러.”
“아하하하. 소혜 것도 담을 걸 그랬나? 아니야, 그러면 사화 것도 담아야 되고, 시큼이 것도 담아야 되고 너무 많아.”
채팅창 단골 멘트로 날 도발하던 그녀가 문득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 것은 그 때였다.
“오빠.”
“응?”
“근데 뽀미 님은 뭐하시는 분이야?”
“매니저 님? 글쎄? 그냥 돈 많고 시간 많은 유부녀? 그것 말고는 모르는데, 왜?”
“그냥. 24시간 오빠 방송 모니터링을 어떻게 하나 싶어서.”
“그건 내가 더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듣기로는 무공도 쓸 수 있다고 했지?
단순한 농담인지 허풍인지는 몰라도 독특한 캐릭터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수수께끼에 싸인 매니저님의 정체에 대한 토크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술자리는 막을 내렸다.
***
“그럼 가볼게. 오늘 잘 먹었어. 선물도 잘 쓸게.”
“그래! 가기 전에 또 한 잔 해.”
“야, 자꾸 만나면 부교주님이 싫어하셔.”
“그럼 안 되지. 주아까지 넷이서 밥 한 끼 먹자.”
가휘를 비밀통로 입구까지 배웅한 수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다시 홀로 방을 향해 걷기 시작한 그녀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애플티비의 채팅창을 통해 남동생과 주고받은 메시지가 맴돌고 있었다.
[누나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가휘 님 통수 치지 마라] [갑자기 개소리야 내가 미쳤냐? 근데 왜?] [얼마 전에 매니저끼리 밥 한 번 먹자고 해서 뽀미 님 집으로 초대 받은 적이 있는데 좀 위험한 사람 같던데. 집도 무슨 대저택에 늑대? 같은 것도 키우고. 재벌 같은 건가? 예쁘긴 존나 예쁘던데. 관리를 잘해서 그런가 무슨 아줌마가 20대 같음 ㅇㅇ]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냥 이 일 오래 하자고 하던데 아무튼 쎄하니까 동생 좆 되는 거 보기 싫으면 둘이 친하게 지내라고] [니가 말 안 해도 그럴 거야]당시에는 자신을 못 믿은 가휘가 혹시나 매니저를 시켜서 동생을 협박하는 건가 싶어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오늘 대화를 나눠보니 그는 매니저 간 회동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더구나 그녀로서도 가휘의 뒤통수를 칠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기에, 그녀는 테이블 위에 남아있던 마지막 소주 한 잔을 입안에 털어 넣는 것으로, 가슴에 남아 있던 일말의 응어리마저 훌훌 털어냈다.
한 차례 풍파가 휩쓸고 지나간 이곳에서, 이제 그녀도 그녀만의 삶을 다시 살아가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