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17
117. 바실란도 (Vacillando, 흔들리면서) -2
신인 죽이기.
그 명칭만큼이나 내용도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이게 또 표적이 되고 나면 상상 이상의 피곤함을 유발하는 면이 있다.
왜 학교 폭력도 옆에서 보면 작고 사소한 장난으로 시작해 서서히 그 강도를 높여가면서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발전하지 않는가.
현재 곽재윤이 예선 1차에서 이상한 수작질을 부린 깃은 바로 그 괴롭힘의 시작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일 여기서 우리가 보기 좋게 흔들거리다가 예선 당일에 망신이라도 당한다면 놈은 배꼽이 빠지라 웃어대고는 다음에 또 이상한 수작질을 부려올 것이 분명했다.
이런 추측에는 명징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전생의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기에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과제곡이 공개된 그 날부터 대놓고 ‘원전연주’를 연습해서 우리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면 될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 연습할 때만 의도적으로 다른 연주를 해야 해.”
일부러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말이다.
이런 번거로운 행동을 하자고 결정한 이유는 이것저것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곽재윤이라는 놈에게 우리 미향예고의 세 사람이 쉽게 건드릴 대상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민호는 ‘굳이?’라고 답했고 지은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참 대조적인 반응이었는데,
사실 정상적인 반응을 한 것은 민호였다. 지은이는 그냥 내가 하는 말이니 나쁜 의도는 없으리라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믿어준 거겠지.
역시 내 여자친구의 이런 모습은 정말 하나, 하나가 고마워 죽겠다.
오늘 집 가는 길에 한번 뒤에서 안아 줘야겠다. 저번에 했을 때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선 정말 귀여···.
큼,
다시 돌아와서 나는 내 의견에 반문을 표하는 민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원전연주를 목표로 한다는 걸 알았는데 뭐하러 일반적인 연주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지?”
“그렇지.”
차분히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민호.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만, 그리고 아마도 이틀만 그런 연기를 하면 되는데, 그래도 힘들겠어?”
“음, 힘들 건 전혀 없는데 궁금해서.”
“당장은 말하지 못하는 이유지만, 분명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해지는데 말이지···.”
민호는 살짝 곤란하다는 듯 그리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사정을 다 설명하기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가 되지 않겠는가.
“일주일 뒤에는 설명할 수 있어. 딱 이틀이면 되니까. 나를 믿어주지 않을래?”
그러니 나는 민호와의 신뢰를 믿기로 했다.
퍽 20년 정도 만난 사이 같지만, 실상 제대로 통성명을 거친지는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우리만의 뭔가가 있다고 믿었기에 시도해본 질문이었고, 민호는 흐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 딱 이틀인데 뭐.”
다행히도 민호는 나를 믿어주었다.
나는 곧바로 한껏 진지함으로 물들였던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고, 민호는 그 외에 더 유의해야 할 것들이 있는지 적극적으로 물어오기까지 했다.
“간단해···.”
나는 딱 일주일, 그러니까 1차 예선 당일까지만 숙지하면 되는 행동 요령 같은 것들을 민호와 지은이에게 말해주었다.
이로써 곽재윤이 보낸 ‘엿’을 되돌려줄 작지만, 효과적인 작전이 시작되었다.
***
우선, 예선 과제곡이 공개된 당일 우리는 다 같이 미향예고 개방형 피아노 연주실을 찾아가 함께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의 곡을 조사하고, 연주하길 반복했다.
개방형 피아노 연주실은 교내에서도 몇 없는 컴퓨터가 있는 연주실이었기에 왜 굳이 여기서 연주를 하는가. 따위의 질문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차근차근 각자 2곡씩을 골라 일반적인 연주를 진행했고, 서로에게 피드백을 넣어주는 식으로 본격적인 연습이 궤에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 쉬는 시간이나, 방과후에 많은 교직원이 이곳을 지나쳐갔으니 목격자는 충분히 모았다.
하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으리라.
원전연주를 가장 최근에 이론적으로 배운 경험이 있는 지은이가 계속해서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던 것을 말이다.
그렇게 2일 차가 되었다.
이번에는 이른 새벽에 셋이 모여 몰래 텅 비어있을 지은이네 집으로 향했다.
목적은 그녀의 집에 있는 홈 연습실.
“무슨 비밀작전이라도 수행하는 것 같아서 재미있네. 그치 성현아?”
지은이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민호는 또래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내며 그리 말했지만,
“하아아암, 졸려어···.”
“괜찮아 지은아? 20분 넘게 가니까 어깨에 기대서 좀 잘래?”
나는 지은이만 보느라 민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은이는 특히 졸음을 느낄 때 좀 애교가 많아지는 특징이 있기에 내 시선은 온전히 지은이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기대는 거 말고···.”
역시나 지은이는 전신을 내게 기울여 거의 품에 안기듯이 가까이 오더니 그대로 큼지막하게 커진 내 몸에 자신의 몸을 기대어 잠이 들어버렸다.
음, 귀엽다.
역시 평소 새침하던 지은이가 이따금, 이렇게 아이 같은 면모를 보여줄 때면 그녀가 정말 귀여운 아이라는 걸 느낀단 말이지.
“후후후후.”
내가 그런 지은이의 얼굴을 톡톡 건드리니 그녀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재미있어서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으니 옆에서 싸한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이런 커플, 하아···.”
눈을 수평으로 쭉 찢어 불만스러움을 대놓고 드러내는 민호의 얼굴이 보였다.
분명 봤지만, 못 본 거로 하기로 했다.
일단 지금은 지은이에게 더 집중하고 싶거든.
아무튼,
그렇게 날이 다 밝아올 때쯤, 지은이네 도착한 우리는 함께 홈 연습실로 향했다.
“음, 원전연주를 지향하는 거니까 아마 피아노도 그런 식으로 조율되어 있을 거야.”
“음, 그러면 좀 더 평소보다 타건감을 강하게 잡아야 하나?”
“비슷한데, 음. 그 음악사 수업 때 들었던 거 있잖아···.”
우리는 지은이가 주도하는 바에 맞춰 ‘원전연주’를 연습했다.
나도 음대를 졸업한 뒤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기에 지은이의 말에 떠오르는 사실을 하나씩 언급하며 연습에 질을 올렸고, 민호의 경우 역시나 천재 어디 안 가는지 무서울 정도로 전문적인 지식을 흡수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음원 파일이 올라가 있는 홈페이지, 영상 자료들을 참고하며 디테일을 더했으며 세부적인 항목들에서 적확하지 않은 자료가 나오게 될 때는 곧바로 메모해 두었다.
어차피 하루만 더 있으면 M스튜디오에 찾아가 마원장님에게 상담을 할 수 있게 될 테니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아무래도 감각적으로 지식을 흡입하는 민호,
과거 배웠던 것을 하나씩 떠올리며 세부사항을 수정하는 나, 거기에 전문적인 지식을 공부하는데 능한 지은이가 뭉치니 우린 다소 낯선 연주를 공부하면서도 도저히 난관이라는 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이렇게 셋이서 뭉친 적은 처음이라 조금 긴장했었는데, 정말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팀워크가 잘 맞았다.
그렇게 오후 2시가 되도록 지은이네 개별 연습실에서 원전연주를 연습하던 우리는 점심을 먹고 3시나 되어서 미향예고로 돌아가 다시 보란 듯이 보통의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3일 차가 밝았다.
“스튜디오에 가는 게 좋을 겁니다.”
사흘 만에 아침 조회에 출석한 우리를 보며 특별반의 담임이나 다름없는 교감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번에 우리가 ‘한국 종합 콩쿠르’에 명함을 들이민 일로 출석이나 연습 등을 꽤나 유연하게 신경 써주실 작정이신 것 같았다.
그 외에도 특별반에서 우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연습은 잘 돼 가니?”
“힘든 일이 있으면 상담해도 좋다고? 아 시간이 없으려나.”
“혹시 사람 필요하면 불러 올해 현대 무용 동아리 신입생들을 빌려줄게.”
게다가 첫날 뮤지컬 동아리 ‘라엘라’의 선배가 우리를 소개해준 덕분인지 그들은 대부분 친밀하게 우리에게 협력을 약속해주었다.
이 특별반에 있는 사람들은 절반 이상이 동아리장이거나 그에 준하는 인맥을 가진 사람들로 정말로 사람의 손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되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일이 생기면 부탁 좀 드릴게요.”
나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그리 말했고, 드디어 3일 차에 M스튜디오로 향했다.
뭐,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마 원장님을 만나게 된 김에 원전연주에 대한 것들을 상담했고, 이제부터는 이상한 연기를 할 필요가 사라졌다.
이젠 본격적으로 원전연주를 갈고 닦기 시작하는 셋.
우린 각자 다른 연습실에 모여 전날 받은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연주를 교정했고 다시 모여 공동 연습실에서 연주하고, 피드백을 받길 반복했다.
고작 이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번 과제곡의 비밀을 눈치채지 못한 척을 한 시간은 그게 다였다.
하지만 분명 그 잠깐의 시간은 이런 번거로운 모략을 생각해낸 그에게 큰 충격을 주리라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나는 마 원장님과 쉬는 시간에 대화를 나누다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곽재윤 그놈이 무려 ‘한국 종합 콩쿠르’의 1차 예선 형식을 건드린 것이니 분명 큰 수고를 들였으리라 생각했었는데,
“1차 예선은 예전부터 시범적인 시도가 많이 도입되고는 했단다.”
마 원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이에 내가 놀라 정말이냐고 묻자 그는 설명해주었다.
어차피 1차 예선은 예선 당일에 들고 가는 서류를 더 중요하게 본다는 것이다.
서류,
다시 말해 내가 그동안 1차에 탈락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쌓아온 다양한 경력들을 적은 그 이력서 같은 것 말이다.
대충 1차 예선에서 서류가 (6), 실기가 (4)라서 비중이 크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말로 듣게 되니 좀 그랬다.
“그래도 성현아, 실기가 4라는 건 결코 작은 건 또 아니란다.”
“이력과 비교해서 실력이 모자란 건 아닌지 한 번 더 걸러보겠다는 의도, 아닌가요?”
“그건 맞지만, 현재 너희들처럼 이례적인 나이로 도전하는 아이들에게는 기회가 되는 거지.”
즉, 우리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과제곡에 힘을 줄 필요가 있다는 마 원장님의 말씀이셨다.
하필 우리니까 말이다.
그리고 때마침 과제곡이 남들보다 중요한 우리에게 사소하지만, 치명적일 수 있는 수작질이 들어왔다.
듣고 보니 이번 곽재윤의 수작질이 생각보다 더 정교하게 펼쳐진 공작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상 과제곡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1차 예선이기에 연습을 하라고 주는 시간은 고작 일주일뿐.
거기서 만약 이틀씩이나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보통 연주 연습에 온 힘을 쏟고, 다 다음날, 자신의 연습이 무의미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음, 확실히 정신이 잠시 오락가락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랴.
우리는 이미 원전연주를 충분히 연습 중인데 말이다.
이윽고 4일 차,
내 예상대로 M스튜디오에는 한 팩스가 도착했다.
뭔가 적힌 글은 많았지만, 간략히 가장 중요한 문장들을 추려내면 다음과 같았다.
4일 차인 오늘이 되어서야 이놈들은 오해의 소지를 인지해 안내를 위해 팩스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 팩스는 분명, 애초부터 우리 셋이 M스튜디오에 방문한 다음 날 보내지게 되어있었을 것이다.
주변에 자문하면 이번 예선의 형식이 어떻게 되는지 따위는 아는 건 쉽지 않은가.
그래서 일부러 M스튜디오에 이틀이나 기다렸다가 방문을 했고, 그다음 날 무슨 조치가 취해지는지 확인하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이 팩스를 보고 나는 확신했다.
이건 단순한 내 착각이 아니라 곽재윤이 얽힌 ‘신인 죽이기’가 분명하다는 걸 말이다.
게다가, 내가 만일 그를 몰랐다면 전부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체계적인 ‘신인 죽이기’였다.
사소한 오해, 작은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것들로만 내 컨디션과 멘탈을 뒤흔들려고 하는 정말 짜증나는 수법.
“하···.”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 우리 셋이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확실히 곽재윤에게 각인시키는 일뿐이었다.
“이놈이 진짜···.”
***
정직한 연습과 낯선 기술에 숙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흘이 흘러 드디어 예선 당일이 밝았다.
아무래도 규모가 규모이고 1차 예선에는 한 번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신청하는 이들도 많기에 참 간만에 인산인해라는 걸 만나게 되었다.
단순한 사람의 숫자만 따지고 보면 아주 예전에 봤던 미향예고의 입시 고사 때보다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전공하는 악기마다 집합 장소가 다른 것은 물론, 당연히 그 수가 가장 많은 피아노의 경우 수험표처럼 번호를 매겨 집합 시간까지 차이를 두어 참가자를 심사하게 되었다.
참 신기하게도
아침반 – 나,
점심반 – 지은이,
저녁반 – 민호.
이렇게 우리 셋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이것도 ‘신인 죽이기’일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적어도 스물다섯은 넘어 보이는 프로, 혹은 프로를 눈앞에 둔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이목이 현재,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성현이다.”
“독일에서도 기사에 실리던데.”
“넌 유학 다녀와서 모르지? 쟤가 걔야.”
“일본에서는 벌써 유명해.”
“그 모리스 슈만의 유학 제안을 찼다면서?”
“대체 얼마나 잘나셨길래”
“근데 솔직히 직접 들어보면 장난 아니긴 해.”
그들의 소곤거림과 시선에서 참 다양한 것들이 느껴졌다.
분명, 예전에 미향예고 실기고사에서 5등을 차지하고 나서 입학식에 참여하러 갔을 때도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사람 팔자라는게 잘 변하지 않는다는 걸까.
“후우.”
나는 한숨을 픽 내쉬었다.
예전 같았으면 주목받는 것이 어색해 함부로 한숨을 픽픽 내쉬지도 못했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달랐다.
나는 이제 이런 일만으로는 부담을 느끼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고, 사람들의 시선 역시 불신과 경악으로만 물들어 있던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경계심,
호승심,
흥미,
거기에 곳곳에서 느껴지는 이젠 익숙해질 지경의 불신과 경악.
그 다양한 감정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아주 순수한 눈빛의 소유자들이 그사이, 사이에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사인 해주려나?”
“말 걸어 볼까?”
“듣기로는 성격은 착하다던데.”
“그럼 사진 찍어주지 않을까?”
이전과 같이 나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내 팬’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다수 있다는 것.
그게 은근히 내 긴장감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었다.
새삼 웃기다는 생각도 든다.
전생에는 내 한참 위에 있던 연주자들이 이젠 내 팬을 자처하다니.
아, 참고로 나는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줄 마음이 없었다.
귀찮은 놈에게 찍힌 것도 모자라서 괜한 논란거리가 나오면 더 힘들어지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처음 계획대로 ‘고작 4일 만에 남들의 배 이상을 연주해내는 연주자’로서 곽재윤의 얼굴을 당혹감으로 물들여 버리고는 유유히 이 1차 예선 장소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네가 성현이구나?”
내 등 뒤에서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뱀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실눈의 남자.
유순한 인상의 외모, 말끔한 정장, 정중함에 몸에 밴듯한 행동거지까지.
눈앞에 이 자가 바로 신인 죽이기의 주범, 피아니스트 곽재윤이었다.
“반갑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란다.”
그는 내게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그는 분명 이번 ‘한국 종합 콩쿠르’에 심사위원단으로 참가한 사람일 텐데, 왜 갑자기 나를 찾아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