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52
52. 트리오 (Trio, 삼중주)
함께 뮤지컬을 보고 돌아온 토요일, 그리고 M스튜디오에 나가 종일 피아노를 연습한 일요일.
주말은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흘러갔다.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화려하게 끝난 지 일주일, 슬슬 다음 학기에 내가 참가할 콩쿠르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석 달이나 남아 있으니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지금까지 한 곡을 연습해내는데 2주가량밖에 걸리지 않은 이유는 전부 ‘고등학생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목표로 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참가하려고 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잘 알려진 백건오 선생님의 이름을 걸고 열리는 종합 콩쿠르.
아마추어들을 위한 배려를 해주는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는 애초에 궤가 다른 것이다.
‘한국 국제 종합 콩쿠르’
어찌나 규모도 크고 심사하는 악기도 다양한지, 예선과 본선에 최종 결선까지 있는 콩쿠르였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을 만큼 거대한 그야말로 프로들을 위한 콩쿠르.
이곳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전생의 나보다도 그리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오늘까지의 내 연주보다도 더 대단한 연주를 선보여야 한다.
게다가 이 백건오의 ‘한국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참가 기준까지 까다로워서 현재의 나로서는 1차 예선에 좋은 연주 영상을 찍어 보내더라도, 그냥 서류 검토에서 탈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참가를 위해서는 지은이나 민호처럼 경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방학 기간에 바이올리니스트 유키에와 약속된 협주회가 있으니 나름 멋들어진 경력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좀 부족하단 말이지···.”
아무래도 ‘백건오 한국 콩쿠르’ 수준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빈약했다.
“방학 동안에 지방 콩쿠르를 싹 돌까.”
그러나,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수상 실적이 많고 적음으로, 채울 수 있는 틈이 아니었다.
뭔가, 거대한 한방이 필요한데···. 그게 뭐가 좋을지 모르겠다.
아예 민호처럼 유학을 다녀오는 것도 방법이 될 수도 있고, 최지은처럼 유아 시절부터 착실하게 수상을 거듭하며 연주를 해왔다는 것 역시 참가 자격으로서는 좋은 포인트가 되리라.
하지만 내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내가 혼자 고민하고 있으니 등 뒤에서 친근하지만 좀 어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현아.”
최지은이었다. 최지은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착 가라앉은 저음에 툴툴대는 목소리가 아니라 평소보다 높은 억양으로 나를 부르는 것이다.
그저께 토요일, 나와 묘한 대화를 나눈 뒤로 최지은의 태도가 좀 유해졌다.
“엉? 왜, 왜 부르는데.”
“반응이 왜 그래. 내가 너 부르면 안 되냐?”
물론 내가 한번 인상을 잠깐 구기는 것만으로 다시 평소처럼 돌아오지만 말이다.
뭐랄까, 지은이가 날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진 것은 솔직히 좋은 일이었지만,
같이 있을 때마다 지금까지 티격태격하면서 친해졌었다 보니 유순한 그녀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답답한 마음에 나는 1인용 연습실로 자리를 옮겨버렸었다.
“아니, 안되는 건 아니고. 그래서 왜?”
“담임 선생님이 나랑 너랑 김민호랑 셋을 손님이 찾으신다고 하셔서, 우리 오전 수업 빠져도 되니까 잘 얘기해보래.”
“오전 수업을 빠져도 된다고? 뭔가 중요한 손님이신가?”
“음, 아마? 근데 너나 나나 이미 면식이 있는 분일 거야.”
“누구신데?”
“금천문화재단 이사장님.”
클래식 전반을 지원하는 금천문화재단의 이사장. 내가 전에 들었던 다른 호칭은 민호의 아버지인 김동혁씨.
정석 선배는 물론 마 원장님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고?
***
미향예고 1층에 있는 귀빈 응접실.
전생과 달리 요즘 이곳에 좀 자주 오는 느낌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이번 금천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국내 오케스트라 경연 대회에서 나는 너희들이 경연의 공백을 채워줬으면 한단다.”
민호의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금천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서 마주한 김동혁씨는 매우 엄숙한 표정과 진중한 목소리로 맞은편 소파에 앉은 우리 셋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주셨다.
국내 오케스트라 경연.
전생에서도 내가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피아니스트일 적에 재단의 제안으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오케스트라를 불러 3시간에 걸쳐 반년간의 성과를 서로에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는 자신이 속한 오케스트라를 어필하고 다른 오케스트라를 견제하는 그런 무대였다.
그런데 지금 김 이사장님이 우리에게 맡기겠다고 하는 게 무엇이냐.
오케스트라는 적어도 스물 이상에 많으면 쉰 명까지 대동하는 경우가 잦다.
그 때문에 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마치고 다음 오케스트라가 무대를 준비하는 시간이 꽤 길게 걸릴 수밖에 없는데, 이를 ‘경연의 공백’이라 이사장은 칭한 것이다.
“경연의 공백이요?”
지은이가 손을 들어 묻자 방금 내가 생각한 내용을 그대로 말해주는 김동혁 이사장.
“그러니까 오케스트라와 오케스트라 연주 사이에 비는 시간을 저희가 공연으로 채워줬으면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예의 바르게 다시 이사장의 긴 설명을 정리하는 최지은.
이해력이 뛰어난 그녀답게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렇단다. 이번에 우리 재단에서 초빙한 오케스트라는 세 팀이란다. 그러니 서막, 1차 교체, 2차 교체로 총 세 번 특별 공연을 진행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지.”
“특별 공연이요?”
그때 민호가 확인하듯이 묻자 김동혁 이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별 공연이지. 국내에서 최고라 불리는 세 오케스트라의 경연이란다. 당연히 이 업계에서 이름있는 사람은 모두 모일 거고 너희는, 그분들의 앞에서 너희의 연주를 선보일 기회를 얻는 거지.”
즉, 재단은 이 거대한 경연의 지루할 틈을 없앨 수 있으니 좋고, 우리는 귀빈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좋다.
즉, 누구에게 있어서든 이득이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과연 전생에서도 사람을 다루는데 도가 텄다는 말을 듣던 김동혁 이사장다운 생각이었다.
그리고 물론이지만 우리 셋이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가 보기 좋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자 기분이 좋아지신 건지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던 김동혁 이사장은 잠시 편안한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갑자기 나를 쳐다보더니 잠시 멈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셋 중에서 딱 한 명에게는 조금 특별한 제안을 하려고 한단다.”
“특별한 제안이요?”
아마 나를 보며 말했으니 내게 부탁을 할 것 같은데, 나는 애써 적극적으로 답하며 흥미를 보이는 척을 했다.
뭐, 이 분하고 친해져서 나쁠 일은 국내에서는 없으니까. 나이 많은 사람의 노련함 같은 것이다.
“그래. 사실 이번 특별 공연을 약속한 연주자는 둘이나 더 있지.”
“두 명이나요?”
그러자 내 반응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이사장. 이내 그는 내 되묻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확히는 첼리스트 한 명과 우리 금천문화재단이 직접 키운 바이올리니스트 한 명. 이렇게 두 사람이지만 말이야.”
첼리스트에 바이올리니스트 거기에 한 사람에게만 특별한 제안이 있다고 한다면···.
“트리오인가요?”
“그렇지. 역시 똑똑하구나.”
아니, 이 중에서 유일하게 협주 경험이 있는 나를 보면서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언급하는데 누가 모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성현이 네가 가장 먼저 이번 무대의 서막으로 계획된 삼중주에 참가해줬으면 한단다.”
역시, 예상대로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 이사장.
나는 어느 정도 예상하던 중이었기에 크게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맡겨주신다면 꼭 해내겠습니다.”
이번만큼은 학생다운 대답이 아니라 한 명의 연주자로서 답하는 나.
그러자 이사장은 조금 놀랐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며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네주었다.
“멋진 대답이구나.”
신입생 실기우수자 연주회에서 엘리나와 협주를 했던 일이 눈덩이처럼 구르고 굴러, 내게 이런 기회로 돌아온 것이다.
눈앞에 온 기회를 잡지 않는다는 건 내게 피아노를 관둔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게다가 마침 ‘백건오 한국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한 경력도 필요했는데 이 정도 규모에 특별 공연은 좋은 이력이 되어줄 것이다.
정말 타이밍이 잘 맞았다.
“그럼 내일 방과 후에 맞춰서 운전기사를 보내두마.”
“예!”
나는 반사적으로 힘찬 대답을 내놓았다가도 갑자기 그의 말에서 기묘한 단어가 들린 것 같아 주춤했다.
우, 운전기사요?
***
다음날,
나는 솔직히 놀란 심정으로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외제차에 올랐다.
시커먼 외향에다 차도 넓고 커서 솔직히 이런 차를 타도 되나 싶긴 했는데, 김민호와 최지은이 너무 쉽게 타고 앉아 왜 안타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어색한 동작으로 차에 오른 것이다.
하여간 있는 집 자식들이라 잘 모르시나 본데···. 이 차는 2009년 기준으로 국내에서 가장 잘 나가던 중형세단, BMW528이었다.
대략 가격이 7천만 원쯤 할 텐데,
“성현아. 왜 그렇게 두리번거려?”
그렇게 내가 신비하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지은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질문했다.
“아아, 차가 좋아서.”
“차?”
그런데 내 대답에 완전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인상을 꾸깃꾸깃하는 최지은.
너무 아저씨 같았나 보다···.
나는 애써 차에서 관심을 끊고 눈앞에 집중했다.
금세 도착한 금천문화재단의 ‘클래식 아트센터’.
예술계열에 있어 전반적인 부분을 지원하는 금천문화재단답게 우선 건물의 거대한 규모가 압권이었다.
그 내부는 더 대단했다.
좋은 설비의 피아노를 한 방에 하나씩 배치한 M스튜디오와 달리 아예 피아노의 특징을 연습실 외부 문고리 옆에 적어두었다.
“우와.”
“미···. 미친”
최지은은 긴 감탄을 그리고 욕은 내가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수준 높은 설비는 솔직히 22년 음악 인생에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 그러니까 이렇게 좋은 설비가 다 여기 모여 있었다. 그거구나···.
“민호 도련님은 이쪽으로, 최지은 양은 저쪽 연습실을 쓰시면 됩니다.”
도, 도련님이라니···. 아, 아니다. 이런 것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간 끝이 없겠다.
어쨌건 우리를 태워다준 운전 기사님의 안내에 따라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우리 셋.
“나중에 봐.”
“이따 보자~”
친절하게 손까지 흔들며 내게 인사를 해준 최지은과 장난스러운 미소로 최지은을 따라하는 김민호.
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사님의 안내에 따라 넓은 협주홀로 향했다.
방음효과가 확실해 보이는 두터운 문을 힘을 줘서 열자 곧바로 들려오는 애잔하고 무거운 음색.
문에서부터 열 걸음은 더 걸어야 닿을 법한 반 층 무대에 커다란 첼로를 켜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나와 이번 트리오를 함께 할 사람인 것 같았다.
흐느끼는 듯한 첼로의 독주가 끝나고 그가 활을 내리자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트리오를 함께하게 된 이성현이라고 합니다.”
“오! 언제 들어왔었니 깜짝 놀랐잖아.”
“아, 죄송해요.”
남자는 연주에 한껏 몰입했던 것인지 내가 말을 걸자 눈을 껌뻑였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죄송할 것까진 아니고 음, 반갑다. 나는 이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면접에서 떨어지고 우연히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강남준이라고 한단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요?”
퍽 그리운 이름에 나도 모르게 큰 반응을 해버렸다. 지난 생에 무려 5년을 몸담았던 애증의 오케스트라인데, 이렇게 듣게 되니 이상하게 반가웠다.
그런데 강남준은 내 반응을 오해했는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좀 놀랐지? 나라도 스물둘인 내가 최종면접까지 갔다가 떨어졌다고 말하면 못 믿을 것 같긴 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경력을 내게 드러내려는 강남준.
아마도 자기애가 좀 강한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연주 실력만은 확실했다.
내가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있을 때도 첼리스트 2군에 있던 젊은 연주자들보다 좀 더 나은 수준.
하긴, 실력은 확실하니까 김동혁 이사장이 그를 초빙했겠지.
그런데 왜 오케스트라 면접에서 떨어진 걸까.
내가 그런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중 내 등 뒤에서 다시금 묵직한 협주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단발머리에 바이올린 가방을 메고 있는 여자아이.
당연히 김동혁 이사장이 언급했던 이번 트리오의 바이올리니스트 역할을 맡았다는 중학생이리라.
그런데 그 아이를 본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고 반사적으로 어떤 이름을 내뱉고 말았다.
“이, 이수정?”
“예?”
내가 이름을 부르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는 중학생의 이수정.
“혹시 저 아세요?”
그녀는 불안하다는 어조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그리 말했고 나는 그제야 내가 한 실수를 깨달았다.
현재 이수정과 나는 초면이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내게 있어 그녀는 결코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수정.
그녀가 바로 내게 반주자의 자리를 제안했던 최초의 연주자였으며, 내가 전생을 떠올릴 때면 항상 언급하던 그 미향예고 후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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