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83
83. 아마추어 (Amateur) -3
“앞서 말했다시피 최고 득점자는 이성현이다.”
그렇게 말하는 모리스는 왜 그런지 즐거운 표정이었다.
나를 우승 후보라고 공언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는데,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미소를 짓는 걸 보면 그가 무슨 생각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라는 존재를 통해 준프로와 프로가 뒤엉킨 이 사람들을 채찍질하려는 것이다.
솔직히 나도 내 연주가 정민주나 이재상보다 뛰어났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거의 분명했다.
“다음은 정민주와 이재상. 두 사람의 연주는 다른 참가자들과는 레벨이 달랐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던 것을 그대로 읊어주며 다음 결선 진출자를 발표하기 시작한 모리스.
참가자들은 기습 본선을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문성진, 박예지, 황재준, 김철주. 하하, 얄궂게도 마침 뽑힌 놈들이 모두 각 대학을 대표해서 나온 수석들이구나.”
웃음소리와 함께 7번째 결선 진출자까지 발표하는 모리스.
하지만 얼굴이 미소를 짓고 있는 것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매우 건조했고 연주에 대해 짧은 평을 해주지도 않았다.
남은 진출자는 다섯.
그리고 그 다섯 중 한 명은 다음 아닌 지은이였기에 괜히 내가 다 떨려왔다.
이윽고 꾹 닫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모리스가 입을 때자 다섯 명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이번 결선의 마지막 진출자는 최지은. 이걸로 진출자 발표를 마치겠다. 추후 일정은···.”
“뭐라고!?”
조곤조곤한 모리스의 목소리와 상반되게 터져 나온 새된 소리, 고요했던 만큼 그 날카로운 억양은 더 귀를 강하게 자극했다.
“이봐요. 작곡가 모리스씨.”
게다가 입을 연 사람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모리스를 막 부르기까지 했다.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했고 모리스 뒤에 서 있던 이재상은 단번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성큼성큼 무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재상아 그만. 거, 금방 흥분하는 것 좀 고치라니까.”
“어르신.”
허나 그런 재상을 막는 모리스.
“괜찮으니 다시 올라오거라. 그래. 내가 작곡가 모리스다. 뭐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그는 오히려 태연한 얼굴로 새된 소리를 내지른 단발머리의 연주자에게 질문을 건넸다.
“하! 할 말이 있냐고? 당연하죠. 갑자기 예선 참가자도 아니었던 애가 본선에 올라온 것도 당신이 워낙 변덕쟁이라고 하니까 넘어갔어, 근데 이제는 결선까지 올라간다고? 쟤가?”
그리 말하며 정확히 지은이를 향해 삿대질하는 여대생, 그 얼굴은 이미 분노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성적으로 사고를 거쳐 말을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 솔직히 당신이 말했던 저기 이성현이라는 애는 인정해. 나도 그렇게 연주를 잘할 줄은 몰랐으니까. 근데 쟤는 아니지. 그렇게 뛰어난 연주도 아니었잖아요. 안 그래?”
어지간히 흥분했는지 존댓말과 반말이 무차별적으로 나오는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모션을 취했다.
문제는 그녀처럼 탈락할 위기에 있는 이들은 은근히 그 말에 동의하는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에 납득하지 못하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따지는 건 솔직히 나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는데,
“쟤 최지은이잖아.”
“퇴물 아니었어?”
“1등이란 1등은 다 놓치고 항상 턱걸이로 등수에 드는···.”
서서히 퍼져나가는 그딴 중얼거림을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애초에 지은이를 반강제로 이 콩쿠르에 참가시킨 것이 나 아닌가.
나는 결코 이런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 그녀를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예끼···!”
“죄송하지만, 혹시 아까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셨던 분 아니신가요?”
분명 모리스 슈만도 나와 같은 타이밍에 입을 열었던 것 같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그런데?”
나는 불만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며 침착하게 해야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 곡의 중점은 웅장한 도입부와 토속적인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서주의 음색이죠.”
“그래서 뭐!”
“당신이 연주하셨던 차이코프스키에서는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을 그냥 지나치셨었죠. 아닌가요?”
이렇게 대놓고 지적을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걸까. 그녀는 입술을 씹으며 화난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리스 역시 내가 나서서 움직이는 모습을 그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건, 초견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무려 20초가량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연 탈락자.
하지만 나는 그 대답에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초견이요? 진심으로 이 본선이 단순한 초견 연주를 보는 자리였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얼굴에 바로 드러났다.
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을 확인한 다음 더 힘차게 말했다.
“제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도 당신이 연주했던 차이코프스키의 곡도 브람스의 곡도 전부, TV에서 들어본 적 있지 않아요?”
실제로 차이코프스키의 서주는 그냥 지나가던 행인이 들어도 ‘아, 이거!’ 하며 반응을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모인 연주자들이 연주했던 모든 곡은 충분한 대중성을 확보한 곡들이라는 것.
그런데 그런 곡들을 처음 본다고, 아무리 짧아도 피아노 경력이 10년은 넘을 사람이 과연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내 예상대로 그녀는 누가 입을 막은 것도 아닌데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연습량이 부족해서 좀 서툴렀을지라도 브람스가 폭발적인 카덴차를 살려보려는 노력이 있었어요.”
그냥 안정권에 들기 위해 딱 봐도 방어적으로 연주하는 사람과, 능숙하지 않더라도 이상적인 선율을 자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모리스 선생님 성격에 누굴 더 좋게 볼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겠죠?”
모리스는 세간에서 이미 완성된 연주자라 불리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시도를 권유하는 사람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당연히 결과는 불 보듯 훤했다.
모리스는 유명인인 만큼 아주 잠깐의 검색만으로도 그의 성형을 추측해볼 수 있는 기사는 많이 있었다.
즉, 현재 떨어진 네 명은 그런 적은 노력도 게을리한 사람이었다는 소리다. 정말, 아마추어보다 못한 사람들.
“푸하하하하하!”
그때 아직도 무대 위에 그대로 있던 모리스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정말 흡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
달이 밝은 밤이었다.
이제는 짐만 좀 빼고 나면, 더는 방학 동안 찾아오지 않을 장소인 기숙사.
나는 지은이와 함께 늦은 시각 학교로 돌아왔다.
“오늘 정말 고마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최지은.
그녀를 대신해 이런저런 말을 했던 것이 꽤나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지은이는 계속해서 내게 감사를 표해주었다.
“벌써 세 번째야. 감사 인사도 계속하면 효과가 반감되는 법이라고.”
“그래도 너무 고마워서···. 솔직히 나도 내가 결선에 올라갈 줄은 몰랐으니까.”
“오늘 연주도 아주 좋았어. 본선이 기습만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들을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들었을 거잖아.”
“그랬으려나?”
“그래. 내가 아는 최지은이라면 분명히.”
내가 신뢰하는 눈빛으로 지은이를 응시하자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으···. 고마워.”
예전에는 이럴 때마다 화를 내며 투덜거리기 일쑤였는데, 요전번에 M스튜디오에서 긴 대화를 나눈 뒤로는 반응이 좀 변했다.
조금 더 솔직해졌다고 해야 하나?
막연히 칭찬하다가 뜬금없이 욕을 먹는 일이 없어져서 다행이기도 했다.
“턱걸이구나···.”
지은이는 기숙사를 향해 걷던 중 그렇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좀 애잔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다행히도 마지막 순번으로 결선에 올라선 것을 안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지은이는 자신감의 잔향이 엿보일 만큼 이번 일을 기회로 받아들이고 노력을 다짐하는 그런 얼굴을 짓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인 그녀의 입장에서 아직 프로의 영역이란 머나먼 경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만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라면 나는 지은이에게 꼭 해줄 말이 있었다.
괜히 사람들이 지은이를 천재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미 고등학생의 나이로 대학생들과 견줄 수 있는 실력자.
용기를 가지고 당당하게만 해나간다면 당장 한두 번 넘어졌던 것이 우습게 여겨질 만큼 그녀는 빛을 내리라.
정작 이런 생각을 그대로 그녀에게 말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옥의 티였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성현아.”
그녀는 기분 좋은 표정 그대로 나를 부르더니 한걸음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얼굴에 난 솜털까지 다 보일 정도였다.
“어?!”
지은이는 내가 당황하자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모르는 사이에 키 엄청 커졌네?”
“어? 어어.”
“히히, 왜 그렇게 놀래.”
“누, 누가 놀랐다고 그래.”
지은이의 돌발 행동에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 그녀는 내 머리를 톡톡 건들고는 다시 멀리 떨어져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평소 같지 않게 땅을 보고 걸으면서 귀가 좀 빨개진 것 같았는데, 자기가 더 부끄러워할 거면서 왜 그런 행동을 한 건가 싶다.
조금 더 걸으니 기숙사가 나왔다.
“내, 내일 봐.”
태연한 척 인사를 했으면서도 고개를 휙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최지은.
“하, 하하.”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홀로 남자기숙사까지 밤공기를 맡으며 걷다가 문득 깨달았다.
의식하고 보니 확실히 지은이와 마주 볼 때 눈높이가 좀 변한 것 같기도 했다는 걸.
주로 내가 커진 쪽으로 말이다.
드디어 180cm까지 크는 내 성장기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
“성현아~ 양치하면서 돌아다니지 말라니까”
“예에~”
3일 뒤,
칫솔을 입에 물고 아버지가 보고 계신 TV를 보던 중, 나는 깜짝 놀라 입에 있던 치약을 그대로 뿜어버릴 뻔했다.
-…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신비주의 콩쿠르를 마침 올해부터 공개적인 콘서트처럼 진행하자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마음을 바꾸게 된 건 한 학생이 SNS에 올린 동영상 덕분이었습니다······
TV 화면에 다름 아닌 모리스가 출현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채널은 케이블 방송사였고, 시청률도 그다지 높지 않은 시사 프로그램이긴 했지만 그래도 2010년에 TV에 나온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모리스 당신,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서, 성현아? 저 테레비에 할아버지가 모리스 슈만이라고 하던데 설마 네가 결선에 올랐다는 그···.”
아버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더듬으셨고, 심지어 모리스는 대화의 중점으로 계속 ‘한 학생’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와아! 그러면 그 학생이 어르신에게는 일종의 은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군요?
-하하하. 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네요.
뭔가, 세브란스 플래시몹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깜짝 놀랐는데 그래도 내 이름을 정면으로 언급하는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방송에서 언급된다는 게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내 동의 없이 신상정보를 오픈한다는 것도 썩 내키지 않고 말이야.
그렇게 대충 이미 SNS를 이용하는 사람들만의 ‘아는 사람만 아는’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리라는 생각에 마음을 놓고 입을 헹구고 돌아왔는데, 내 귀에는 믿기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 이성현 학생이, 대학생이 아니라 미향예고 1학년이라고요?!
당혹감으로 물든 사회자의 목소리와 거실에 계신 부모님의 경악으로 물든 표정.
“아, 아들?!”
“정말이야? 방금 들었지 여보! 내가 말했잖아 우리 성현이 얘기가 맞다니까!”
듣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놀라고 계신 부모님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모리스 이 양반이 진짜?’
정말 어처구니없이 TV에서 언급되는 것으로 내 이름은 일파만파 퍼지게 되었다.
그것도 내 예상보다 훨씬 큰 반응을 일으키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