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89
89. 돌체 (Dolce, 부드럽고 아름답게)
특훈을 시작했다.
모리스가 공지해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기도 했고, 지은이는 과제 곡이 공개된 지 3일 만에 연습을 시작했기에 쉴 틈이 없었다.
“황제.”
“왜?”
내가 택한 지정곡을 묻길래 순순히 답하자 지은이는 다시 질문했다.
“월광은 민호의 색이 너무 강해질 것 같았고 피아노 소나타 17번은 이해도가 좀 떨어지거든.”
사실 다른 솔리스트들은 보통 협주곡보다 소나타를 선호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야 협주곡에 대한 경력보다는 피아노 단일 연주 경력이 더 많기에 당연히 소나타가 더 편하겠지.
하지만 나는 솔리스트로서의 완성도 보다는 오케스트라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던 사람이다.
그러니 협주곡을 골랐다는 것은 지은이에게 꽤 당황스러운 선택으로 비쳤을 것이다.
“이해도···. 그런 문제인가 그게?”
역시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만 짓고 있는 지은이.
“자, 자. 쉴 틈 없습니다. 다시, 간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고는 다시 연주 시작 신호를 보냈다.
“후우. 그래.”
피곤하다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지만, 군말 없이 건반 위로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참 지은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훈,
이름은 거창하게 언급했으나 나와 지은이는 현재 한쪽에서 연주하고, 다른 쪽에서 바로 피드백을 주는 방식으로 연습을 진행 중이었다.
냉정함을 되찾은 지은이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할머님에 대한 일도 모두,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을 품자 지은이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황제’는 좀 더 강하고 웅장하다는 인상이 강한 곡이잖아. 나는 이전 연주가 더 좋았어. 그러니까, 프레스토는 아니지만, 그 악상에 깊이를 줄 때···.”
그렇게 가감 없이 해주는 조언과 사소한 지적을 듣다 보면 내 안에 수많은 주법 중에서 어떤 연주법에 어떤 특성이 이 곡과 잘 어울리는지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웅장함···. 그러면 이런 식은 어때?”
나는 이전의 솔리스트 적인 면모를 강하게 풍기던 주법에 반주자의 부드러움을 섞었다.
그러면서도 지은이가 직접 언급해준 부분에서 손끝을 튕기듯이 연주해 음색을 돋보이게 꾸몄다.
“헐···. 어, 어떻게 한 거야?”
내가 그렇게 유동적으로 주법을 눈앞에서 바꾸자 지은이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얼굴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다른 주법을 선보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으나, 부분, 부분마다 주법을 섞는 것으로 음색에 변화를 주니 확실히 반응이 좋았다.
“귀에 너무 거슬리거나 그러진 않았어?”
반응이 너무 좋은 바람에 내가 오히려 반대로 나쁜 점을 물어보자 지은이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물을 터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라 좀 귀여웠다.
“아니? 전혀, 너무 좋던데? 특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금 연주에 대한 찬사를 보내주는 지은이.
“고마워. 이번에는 네 차례야.”
그런 지은이에게 나는 방끗 웃어 보이며 피아노를 비켜주었다.
두 사람이 차례로 의자에 앉다 보니 좀 묘하게 연습 흐름이 끊기는 느낌도 있었으나 우리는 오늘부로 둘 다 지정곡과 자유곡을 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걸 정하는 데 있어 믿음직한 팀원의 의견은 큰 도움이 되다 보니 지은이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간다?”
지은이는 그렇게 물었고, 나는 ‘응’하며 답했다.
그녀가 연주하는 월광, 템페스트, 황제는 M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던 과거의 지은이가 들으면 자신이 연주하는 것이라고 믿지 못할 만큼 다채로운 선율을 뽐냈다.
과거, 국영수 위주로 공부해서 서울대를 들어가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악보를 획일적으로 이해하던 사람이 지은이였다.
물론 그 기본이라는 놈은 정말 중요한 놈이지만, 같은 악보도 연주하는 이에 따라 천차만별의 소리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의 레벨이 아니라 프로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한 악보가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감을 잃고, 자존감을 상실했던 지은이는 이를 ‘인지’조차 못했었지만, 현재의 지은이는 달랐다.
“이번 템페스트는 어때?”
이미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를 아홉 번째 연주 중인 그녀는 혼자서 같은 곡을 다르게 연주하는 식으로 곡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있었다.
“전전 연주랑 비슷한데 혹시 의도한 거야?”
“어? 응.”
“왜?”
솔직히 전전 연주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었는데, 마침 지은이가 ‘전전 연주’와 비슷한 풍으로 다시 연주하니 그 의중이 궁금해져 내가 묻자 그녀는 살짝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때, 네 표정이 제일 좋았으니까···.”
즉, 내 얼굴을 보고 주법을 결정했다는 말이었다.
“어?”
예상외의 답변에 내가 놀라며 말을 잇지 못하자 지은이는 물 한 잔만 마시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습실을 나가버렸다.
내가 일부러 물을 가득 담아온 텀블러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말이다.
“크흐음···.”
나도 지은이가 잠깐 바람을 쐬고 오는 게 목적이란 것을 인지했기에 나가는 그녀를 잡진 않았다.
우리들의 특훈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
결국, 지은이는 지정곡에서 템페스트를 골랐다.
아무래도 내 표정이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았지만 굳이 직접 묻지는 않았다.
그 후로 연습을 진행하면서 지은이와 곧잘 눈이 마주쳤지만, 우리는 서로 별말 없이 넘겼다.
음, 뭐라 말하기 어려운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루는 함께 서로에게 피드백을 주고 그다음 날은 각자 연습실로 들어가 지적받은 부분을 교정하고 완성도를 높이는 식으로 특훈은 진행되었다.
특훈이라 해놓고 의외로 평범한 방식으로 연습을 진행했기에 그게 뭐가 특훈이냐는 말도 들었는데···.
“음···. 6시부터, 10시까지 연습만 하니까요?”
내게 질문했던 M스튜디오의 강사분들은 의아한 얼굴로,
“겨우 4시간으로 괜찮겠어?”
라고 다시 물었지만, 이어지는 내 대답을 듣자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요. 4시간이 아니라 16시간이에요. 밤 10시라고요.”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한다고?!”
삽시간에 비명 같은 목소리를 내뿜으며 되묻는 강사분들.
그러자 이번에는 체력적으로 괜찮겠냐는 둥, 컨디션 관리도 실력이라는 둥.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 16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제일 미친 시절에는 연습실에서 자고 19시간씩 피아노만 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연습에 매진하던 중,
모리스 슈만에게 메일로 그가 작곡한 곡을 받게 되었다.
정말 정석 선배가 말해주셨던 것처럼 지정곡과 자유곡을 영상으로 찍어 보내라는 메일을 받고 이를 행동에 옮긴 뒤, 정확히 이틀 후에 날아온 악보였다.
“호오.”
악보를 보내온 메일에는 결선까지 본인만 악보를 보아야 한다는 규정이 빨간 글씨로 적혀 있었다.
같이 레슨을 진행해주는 선생님에게도 보여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연습을 하라는 건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모리스 슈만이 작곡한 곡을 연습하기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와아.”
담아내야 하는 감정은 내가 숨 쉬듯 자아낼 수 있는 고독과 절박함이었다.
악보를 보고, 건반을 누른다.
귀로 들었을 뿐인데 이 악보에 담긴 감각을 명료하게 알 수 있었다.
이 악보는 전생에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곡이었으나, 나는 10년 이상 연주해왔던 곡처럼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모리스 슈만의 곡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 대단했다.
내가 받은 악보는 음표 사이의 간격과 음의 배열까지 전부, 나를 위해 작곡되었다고 믿어도 될 만큼 내 몸에 맞춰진 상태였다.
“미친···.”
잘 쓰지 않는 욕이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지경이었다.
과거 연주했던 모리스가 작곡한 ‘겨울을 위하여’의 경우 이미 김민호의 호흡으로 완성된 것을 내가 흉내 냈던 것이라면,
[Maurice: Schnee im Herbst](모리스: 가을의 눈)
내가 방금 연주했던 ‘가을의 눈’은 무언가에 나를 맞출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연주할 수 있는 곡이었다.
“하하.”
새삼 모리스가 어째서 거장의 반열에 든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가 작곡한 곡은 정말 대단했다.
“받았어?”
“모리스 선생님이 주신 곡?”
“응.”
이후 지은이와 점심을 먹으며 나는 모리스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예린이는 지금도 모리스와 함께 이번 콩쿠르를 위해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다니고 있다는데, 이젠 내가 이런저런 간섭을 할 레벨을 넘겨버렸기에 최근에는 이렇다 할 연락도 하지 못했다.
“아 진짜?”
그런데 지은이와는 밤마다 이런저런 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뭐, 두 사람 모두 학교에서 그리 인맥이 넓은 편이 아니었기에 서로의 존재가 꽤 소중하리라.
나도 외톨이였던 적이 있기에 잘 안다.
전생의 내게는 이수정이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대상이 민호였다면, 이수정은 바로 내 옆을 지켜줬던 존재.
아, 그러고 보니 걔한테도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최근에는 봉사 센터 일이 끝난 뒤,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질 못하고 있다.
똑바로 해야겠지.
“그렇구나···. 예린이가 나한테만 연락하는 거였구나.”
“응? 그렇긴 한데···. 너 왜 그렇게 웃고 있어?”
“웃어? 아니야. 나 안 웃었어.”
아주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던 지은이는 내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급히 무표정이 되었다.
아마 나보다 더 예린이와 친근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퍽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둘이서 통화하면 무슨 얘기 하는데?”
“어? 음. 우리 집 모모 얘기나, 내 근황이나···.”
역시 강아지 얘기를 나누는 건가.
확실히 작고 털 달린 생물은 매력이 넘치니까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은이는 부자연스럽게 꾹 다물었던 입을 열고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리고 네 얘기 정도?”
“내 얘기?”
“어···. 가끔 물어봐, 너 어떻게 지내는지나 요즘 뭐 하는지.”
“그걸 왜 너한테 물어보는 거야···?”
“어어······. 그게 조금 복잡한데.”
내 얘기를 지은이한테 묻는 이유가 복잡하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나는 계속 말해달라는 느낌으로 지그시 지은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지은이는 내 눈을 피하면서 말하기를 주저하는 눈치였다.
“왜 그런 건데, 말 좀 해줘. 궁금해서 연습에 집중 못 하겠네~ 아고, 이거 큰일인데?”
내가 일부러 더 유치찬란한 말투를 쓰며 지은이가 어영부영 대답을 피하는 걸 막자. 그녀는 계속 주저하다가 홍당무처럼 벌겋게 얼굴을 물들이고는 말했다.
“그······. 오해하고 있는 거 같더라고.”
“어떤 오해?”
“우리가 그, 사, 사귄다고 생각해서 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그런 거.”
아,
그런 거였구나.
왠지 저번에도 봉사 센터에 갔을 때 계속 따로 있으려 하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거였구나.
그런데, 그런 오해는 사실 지은이나 내가 사귀지 않는다고 말만 하면 금방 풀릴 오해 아니겠는가.
왜 지은이는 그동안 나랑 사귀지 않는다고 말을 하지 않은 걸까.
말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없, 지 않은 건가?
없지 않다면 그 말은 즉, 으으음.
나는 얼굴이 화끈화끈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눈앞에 지은이를 쳐다봤다.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고 얼굴만 붉힌 채 눈만 굴려 나를 흘낏거리며 보는 지은이.
그러다 눈이 마주치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혹시 지은이는 나를···.
으으음.
지난 생에 이런 쪽으로는 인연이 없던 만큼 나는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왠지, 지은이를 직시하는 게 좀 힘들어졌다···.
“가, 갈까?”
“어? 어어. 가자.”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M스튜디오 돌아가는 길···.
나는 끝까지 지은이와 눈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
연습은 차분히 진행되었다.
연습실만 나서면 얼굴이 붉어지는 지은이와 덩달아 익숙하지 않은 달콤쌉싸름한 공기에 말이 없어지는 나였지만, 연습실 안에서는 연주자로서 서로를 대했기에 ‘그쪽’ 이야기가 덜 신경 쓰여 괜찮은 것 같았다.
아무튼, 우리는 끝없는 피드백과 연습의 향연을 펼치며 전보다 더 날카롭고 단단한 연주자로서 자신을 벼려냈다.
하루 16시간이라는 강행군을 견뎌내며 무뎌졌던 감각을 살려내고, 표현력을 극한으로 키워낸 것이다.
또한, 나는 지은이와의 연습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었다.
현재의 나는 아직도 전생의 자신보다 체구도 키도 작다.
한창 성장 중이긴 했으나, 아직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반주자의 나와 솔리스트의 나.
사이의 완벽한 중간 지점을 찾는 것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대신, 나는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연주 방법을 찾아냈다.
며칠 전, 지은이와 함께 연습했을 때 그녀가 가장 격하게 놀란 반응을 보였던 그 연주법.
악보를 보다 세분화시켜, 힘을 실어주고 주고 싶은 부분을 정해 그 부분만 강한 주법으로 그 외의 부분은 부드러운 주법을 유지해버리는 것이다.
이전에 ‘필살기’는 이와 똑같은 상황에 음색 자체를 반전시켜 아예 다른 색을 보여주려 노력했다면, 이번에는 색을 급변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라데이션처럼 부드럽게 색을 바꿔나가는 유려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것이 모리스에게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분명 이전보다 발전된 나를 뽐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렇게 고된 결선 준비를 끝낸 나와 지은이는 연습 마지막 날 밤에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모리스 슈만 콩쿠르, 결선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