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07
늘 그렇듯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고 또 떠들기를 좋아한다.
아리스의 수업준비를 도와주면서 엿들었던 이야기들 뿐이지만, 레녹은 이미 그녀가 어떤 배경에 어떤 마법을 다루는지도 전부 알고 있었다.
학부 2학년에 불과한 그녀가 벌써부터 여러 연구실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
레녹이 그녀를 알아본 것처럼, 실라 역시 그를 알아본 듯 미묘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말없이 수건을 건네자, 그녀가 빠르게 손을 뻗었지만 레녹은 손을 뒤로 빼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연스레 실라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뭐하는 거죠?”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녀의 뒤를 가리켰다.
수건이 떨어지면서 주머니에 담겨져있던 내용물이 같이 딸려나왔는지, 그녀의 뒤를 따라 온갖 물건들이 바닥에 일렬로 줄을 서고 있었다.
“………”
실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뒤돌아서 빠르게 소지품을 주워담았지만, 레녹은 그녀의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액정이 깨진 핸드폰, 뚜껑이 없는 립글로즈, 한쪽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이어폰.
주워담는 물건들을 보아하니,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꽤 허술한 성격인 듯 하다.
정작 처음에 흘린 수건마저 잊어먹고 돌아서는 그녀를 붙잡아세우고 몸을 돌리는데, 그녀가 레녹의 등 뒤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교수님과 당신이 나눈 대화를 들었어요.”
“예?”
“마력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신다고.”
살짝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실라의 시선에 레녹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리스와 마력관련된 주제로 대화를 나눈적이….. 최근에 한번 있었군.’
그녀의 강의 준비를 종종 도와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그 와중에 나눈 대화를 우연히 엿듣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실라가 말을 이었다.
“조심하는게 좋을거예요.”
“……….”
“조교수님이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자연스레 물어뜯는 사람도 많아질테니.”
예상치 못한 말에 레녹이 가볍게 웃었다.
저 차가운 표정에서 나올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지금 저를 걱정해주는 겁니까?”
“…..저는 리첼렌 교수님의 연구실에는 큰 흥미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를테니까요.”
“그렇군요.”
레녹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을겁니다. 특히, 제가 이 곳에 있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네?”
숨기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대학교에서 학생들과 부대기는 와중에 마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리스는 레녹을 조교수로 학부처에 등록시킬때 마력이 없는 비술사로 등록했을테니, 이미 입이 싼 직원들 사이에서는 어느정도 소문이 나 있겠지.
그런 와중에 다른 이들이 작정하고 레녹의 신상을 캐기 시작한다면 그가 마력이 없는 일반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금방 드러날 수밖에 없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허술한 위장신분.
그것이 바로 에반 바일런이라는 세번째 이름의 실태였다.
실라는 그런 레녹을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슬쩍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제 언니는 마력을 다루는데 재능이 없어서 이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갔어요.”
“……….”
“물론, 그쪽이 알아서 할 일에 불과하지만….. 그런 사람을 두번이나 보고 싶지는 않네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녹은 싱글거리는 미소를 유지하면서 대답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테니까요.”
“………”
“또, 제가 여기 학생분들과 어울리다보면 언제 마력을 각성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뜻하지 않은 선의를 마주할때마다, 다시금 아리스와의 만남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계기였는지를 실감한다.
철저한 거래나 이해관계가 섞이지 않은 호의는 레녹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또 쉽게 외면하기는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양지에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앞가림은 혼자서 해낼 줄 알아야겠지.
그런 음습한 감정이나 수작에 대처하는 일은, 레녹에게 있어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실라는 그런 레녹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몸을 홱 돌렸고,
레녹은 말없이 그녀가 잊어버린 수건을 흔들었다.
“프리실라, 수건 잊었어요.”
“………”
이제보니 허술한 것도 모자라 건망증도 있는 것 같았다.
소동
“레녹 당신에 대해서 학부처에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
실라에게서 낌새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아리스가 벌써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고 있을 줄이야.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리스 리첼렌은 그렇게 무능하지도, 또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니까.
문제를 뻔히 인식하고도 눈앞에서 외면해버리는 그런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짙은 나무 향기가 풍기는 원목. 널찍한 사무실에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초목들.
너른 책장에 빼곡하게 꽃혀있는 온갖 서적들과, 책상위에 아득하게 쌓여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류더미.
“하아…..”
그 사이에서 아리스가 골치아프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제 실수가 맞아요.”
“뭐가 말입니까?”
“당신을 제 연구실로 데려올때, 그 여파를 고려하지 않은 점…. 반응이 이렇게까지 격렬할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건 제 실수예요.”
“음……”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레녹은 처음부터 그녀가 그런 것을 고려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레녹이 아무런 마력을 가지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능력만을 보고 연구를 권할만큼, 그녀는 사람을 온전히 본질로만 바라보는 사람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웬만하면 선의를 가지고 다가가는 그런 사람이, 다른 학생들이 가지는 부정적인 감정까지 헤아리기는 어려웠겠지.
“행정처에 통보를 넣었으니, 그쪽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일괄적으로 공지를 발행할 거예요. 특히 마력이 없는 일반인을 상대로 어떤 방식으로든 해를 입히는 경우에 대해는 제적까지 가능한 징계를 발부하기로 결정했어요.”
“…… 굉장히 과감한 수군요.”
“당신의 능력과 재능이 쓸데없는 곳에 소모될 이유는 없어요. 그걸 막아주는 것도 제 연구원을 위해 마땅히 지켜내야 할 책임이겠죠.”
아리스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더불어서, 이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하게 본보기를 보이도록 할게요.”
“……….”
그녀는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고분고분하고 순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수준높은 마법사답게, 기본적으로 적이라고 생각되면 상당히 가차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당연하겠지.
하지만 레녹은 아리스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교수님이 나서면 오히려 여론은 더 안 좋아질겁니다.”
“……네?”
아무리 아리스가 레녹의 이론연구능력을 보고 스카우트를 진행했다고 하나, 일단 조교수로 들어온 이상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일들이 몇가지 있다.
그녀를 도와 수업 준비를 한다던가, 관련 실험이나 견본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수업 전에 설명을 한다던가.
적어도 대학이라는 틀에 소속 되어있는 한, 필연적으로 학생들과 부대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행정처를 통한 공지는 도움이 되겠지만, 아리스가 직접 노골적으로 레녹을 감싸고 도는 일은 괜스레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던 이들에게도 반감을 사기 쉬워진다.
차라리 지금은 가만히 내버려두고, 시간이 지나면서 레녹을 탐탁치 않아하는 학생들을 골라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아리스 역시 레녹이 말하는 바를 곧바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제 평판까지 고려하면서 현실적인 해결방법을 찾겠다는 말이군요. 제가 사람을 잘못 본게 아니었어요.”
그녀는 레녹의 마음씀씀이에 다소 감동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단지 그녀는 학생들을 마냥 안좋게만 볼 수 없으니 쉽게 떠올리기 힘든 발상이었을 뿐.
“네.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대로 호신용 아티팩트 정도만 챙겨주신다면 어렵지는 않을 듯 합니다.”
….겸사겸사 괜찮은 아티팩트도 그녀에게 얻어내고 말이다.
결국 레녹은 아리스에게 아주 만족스러운 확답을 듣고 나서야 그녀의 서재를 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3번 강의동에서 아리스의 강의가 예정되어 있다.
마법 시연이 필요하기 때문에 레녹이 준비해야 할 몇가지 물품들이 있기는 했지만, 매뉴얼은 이미 전부 암기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터.
이번 강의에서 사용될 예정인 보석 촉매를 카트에 싣고 강의동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레녹을 불러세웠다.
“바일런 조교수님.”
강의실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던 여학생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름이….. 아마 베이라라고 했었나.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어서 이름만을 간신히 기억하고 있는 수준이다.
“볼일이 있습니까?”
“네. 오늘 강의에서 사용될 시연장비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아서요. 한번 조교수님께서 확인해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어요.”
“……….”
그 말만 들어도 그녀가 수작을 부리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뻔히 보인다.
레녹이 피식 웃자, 그녀의 입가에 걸려있단 예의바른 미소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강의동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의식한 탓일까, 끝까지 처음의 태도를 유지한 베이라가 느릿하게 돌아서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나풀거리는 블라우스 자락을 따라 걷자 강의실 안쪽, 널찍한 칠판 아래 위치한 침대만한 크기의 커다란 장비가 눈에 띄었다.
새하얀 금속광을 내뿜는 몸체에, 검은 무광으로 칠해진 접합부. 내부를 비추는 유리에서 새어나오는 푸른 마력광까지.
사전에 매뉴얼을 숙지한 만큼 레녹이 이 장비가 무엇인지는 대충 알고 있다.
이 장비는 아리스 리첼렌이 원소계열 마법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공수한 마도공학설비의 산물로, 주입된 마력을 쪼개서 조합하는 과정을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가시화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아리스가 이런 복잡한 고도의 장비를 직접 설계하고 디자인할만큼 마도공학에도 소양이 있다는 점이 놀라웠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학생들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그녀의 마음씀씀이겠지.
그녀를 선망하는 학생들과, 그 연구실에 입실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 역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장비 앞에는 다른 학생들이 바글바글 몰려서 어떻게든 장비를 작동시켜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척 보아하니 학생들이 강의 전에 멋대로 작동시키다가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비용을 지불하든 징계를 먹든 할 수밖에 없겠지.
자연스럽게 나타난 조교수에게 시선이 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학생들과 살짝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는 프리실라의 모습을 확인한 레녹이 장비를 향해 눈을 돌렸다.
“이 장비를 확인해달라는 말입니까?”
“네.”
생글생글 웃는 베이라의 얼굴을 본 레녹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장비를 직접 망가뜨린 건 아니군.’
마법이 발달한 이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흔적을 남겼다가는 오히려 제 목을 조르는 악수가 될 뿐이다.
학생의 책임으로 끝날 일을 자연스럽게 레녹을 끌어들여서 책임소지를 나눠지려는 영악한 시도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상황을 이용해서 적절하게 원하는 바를 성취하려 드는건가. 마법사답군.’
문제는, 장비에 생긴 문제가 어느정도 수준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인데….
‘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레녹은 슬쩍 아리스와의 거리를 가늠해보고는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숱한 전투로 다져진 레녹의 마력운용능력은 이미 칼날보다 날카롭고 소리보다 은밀했다.
당연하지만 베이라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은 레녹이 눈앞에서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파지직…!!
그대로 장비에 마력을 뻗어서 한바퀴 쭉 돌리고, 안쪽의 회로를 파고들어가면서 그대로 문제를 살핀다.
레녹이 가지고 있는 마도공학에 대한 이해도와, 마력조작능력이 어우러져 장비의 상태를 파악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2초.
장비의 구체적인 부품과 명칭따위는 하나도 알지 못하지만, 어떤 기능에 문제가 생겼는지 깨닫는것은 순식간이다.
아리스가 직접 설계한 장치인 만큼 그 내부 환경이 굉장히 정밀하고 예민하게 디자인되어있다.
그녀가 직접 장치를 다룰때는 뛰어난 마력조작능력으로 작동을 시킬테니 문제가 없었겠지만, 학생들이 호기심으로 만져대다가 사단이 난 모양이었다.
“어디 문제가 생겼는지 아시겠나요?”
“마력 주입과정에서 움직임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바꿔주는 변환회로가 엉켰군요. 주입가능한 용량 이상의 마력을 들이붓는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한 모양인데.”
“……..네?”
다소 늦게 들려오는 베이라의 대답.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다른 학생들의 얼굴.
저 멀리서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실라의 모습을 본 뒤에야 레녹이 실수를 깨닫고 내심 혀를 찼다.
‘장비를 만져보는 시늉 정도는 했어야 했는데. 실수했군.’
장비 내부 설계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꽤 흥미로워서 잠시 주변 상황을 잊고 있었다.
마법사와의 대결에서도 그랬지만, 가끔씩 이렇게 레녹 스스로의 탐구심이나 호기심이 이성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레녹이 느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장비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기울여보면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