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61
“후우….”
검붉은 손으로 쥔 흉측한 모습의 대검은 상당히 잘 어울렸다.
이리나의 손에서 그렇게 피를 토해내던 대검은, 어째서인지 딜런의 손에서는 우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으으으…. 너희 돌아가면 꼭 나한테 인센티브 얹어줘야한다.”
초능력을 너무 과용한 탓인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쥔 밀라의 퉁명스런 말에,
레녹은 피식 웃으면서 천천히 무너진 저택의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경매장에서 시작된 작은 분쟁이 도화선에 불을 지폈고, 결국 레녹은 그 불씨가 커지기 전에 진화하는데 성공했다.
아라샤크 유적탐사단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이리나가 흘리듯이 중얼거린 그 말만으로도 단서를 짚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까.
귀도(鬼道). WORLD 2.0의 세계관에서 등장했던 정체불명의 교단의 이름.
아마 그녀는 귀도라는 교단 쪽 관련 인물로서 교단과 관련된 유물을 회수해서 교단에 넘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으로 인해 탐사단을 주기적으로 갈아치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대검은 그런 그녀의 일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물건이자, 귀도 교단의 물건이었겠지.
그리고 딜런은 이 자리에서 그것을 마주하고 이리나에게서 그것을 빼앗는데 성공한 것이다.
교단의 일원으로 보였던 그녀가 쥐었을때도 계속해서 피를 탐하던 마검이 딜런의 손에서 잠잠한 이유에는 분명 숨겨진 사정이 더 있겠지만….
레녹은 굳이 딜런에게 그 사정에 대해 깊게 캐묻지 않았다.
그들은 용병이자, 프리랜서였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오늘 레녹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보상을 내걸고 의뢰를 거는 정도라면 충분했다.
지금 레녹이 해야 할 일은 귀도라는 교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탐사단과의 대립에 결착을 지은 지금.
마침내 레녹의 시선이 저릿한 방해물을 지나 그 너머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제니에게….. 대답을 들으러 갈까.”
마약왕. 주스마스터.
마약유통.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그 막대한 규모의 사업.
대륙 전체에서 일어나는 그 타락한 욕망의 40%를 거머쥐고 있다는 최고의 거상의 금고를 털기 위해 움직일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수습
“끝났군.”
제니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 너머로는 방금 전 까지 쉴 새 없이 번뜩이던 뇌우가 가라앉고, 폐허가 된 별장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관찰을 시작한 터라, 저 안에서 레녹이 어떤 마법을 사용했는지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제니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짓거리를 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반이라는 마법사와 적지않은 시간을 일하면서 그녀 나름대로 마법에 대한 안목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그저 멍청하게 날아오는 일만 착실하게 물어다주는 식으로는 결코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소속된 프리랜서의 업무환경과 작업시간의 선호도와 같은 사소해보이면서도 중요한 것들을 알게 모르게 물밑으로 컨트롤하고, 프리랜서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기반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대단하지 않아?”
제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
들려오지 않는 대답을 무시하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렇게 막대한 화력을 일발에 투사한 뒤에도 저택의 형상은 처음과 거의 다를바가 없어.”
그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휘두르는 힘을 거의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지 않고서야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휘두른 검에 피 한방울도 묻지 않는 것처럼, 레녹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반은 자신의 마법 실력에 대해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지만, 그 재능이 평범한 종류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아. 단순한 마법사의 자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승부사에 가깝다는 것도.”
말하지 않아도 주머니를 뚫고 튀어나온 송곳은 모두가 알아보는 법이다.
스스로에 대해서 아무런 평가도 내리지 않는 냉담한 태도.
그러나 그 특유의 압도적인 능력와 완벽한 일처리는 그런 차가운 자존심조차 굳건한 신뢰로 보이게 만든다.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지 1년만에 이뤄낸 성과는, 브로커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던 그녀조차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난 알아. 반은 이런 생활에 만족할 생각이 없다는 걸.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일이지. 애초에 이만한 인물이 하루아침에 뒷골목에 나타난 것부터 말도 안되는 일이잖아. 사정이 있고, 이 생활은 결국 그에게 있어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겠지.”
“…..그래서?”
제니와 마주하고 있던 이의 입이 열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제니? 설마 지금 네 동업자를 자랑하고 싶어서 나를 부른건 아니지?”
“그럴리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조만간 이 거리의 판도가 바뀔지도 모른다는거지.”
“……….”
그 말에 처음으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몸을 깊게 기울였다.
“좀 의외인데.”
“………”
“넌 그런 말을 입에 담는걸 아주 질색하는 편이라고 생각했거든. 그 남자가 그렇게까지 네 마음에 들었나?”
오직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 이 발칸의 음지 세력권에 파도가 칠 거라는 말은 쉽게 담기 힘들다.
이 거리에 묻힌 어둠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이라면 더더욱.
에이전트의 필두, 현궁 이벨린 마르시아조차 손을 대지 못할만큼 힘과 욕망이 흘러넘치는 곳.
그 깊이로만 따지자면, 프리랜서는 단순히 발을 담근 수준에 불과하다는 걸 그녀가 모를리가 없을 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에게 이런 말을 꺼낼만큼, 제니가 반이라는 마법사에게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겠지.
제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까 힘을 빌려달라고.”
“힘이라…..”
“사람 일이 어떻게 될 지 모른다고는 하지만, 나는 반을 중심으로 내 사업을 전면적으로 개편할 생각까지 하고 있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협력이 가능할 유능한 투자자와 동업자를 찾고 있지.”
“제니.”
“지금 속도대로라면 반은 순식간에 프리랜서의 범주를 벗어나게 될 거야. 이미 다이크 기업과 에이전트와도 얽히면서 은원을 만들었으니, 거대도시의 외곽구역을 지배하는 놈들과 부딪히는건 시간문제겠지. 그 전에 준비를 마쳐야 해.”
“………..”
제니의 단호한 말에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카이세와 제니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녀가 브로커 일을 시작할 때부터 오랜 시간동안 지켜봐 왔으니까.
그녀가 반에게 협조하면서 이루고 싶어하는 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때는 그 기대가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남자가 훗하고 웃었다.
“딜런 녀석이 말을 꺼낼때 한번 만나봤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게을렀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당장 대답을 주기는 어려워. 알고 있지?”
“물론이야.”
제니가 대답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부정적인 대답을 듣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만큼 그가 이 거리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적극적인 협력이 아니라도 괜찮다. 적어도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만이라도 얻어낼 수 있다면…
그런 제니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술집을 나서기 전 빙긋 웃고는 손을 흔들었다.
“또 보자. 오랜만에 봐서 즐거웠어.”
“그래, 자주 놀러오라고ㅡ”
친절하고, 항상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작 그 미소의 이면을 읽어내는 이는 많지 않다.
자기 자신을 오롯이 증명할 무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는 이라는 말도 많았지만.
그런 평가가 무색해질만큼 그는 오랜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하는 일이 그의 도화선에 불을 붙일 수 있을까.
시도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안타레스.”
안타레스 용병단의 수장.
전쟁용병 출신으로 대륙을 떠돌다 두 주먹 하나만으로 발칸 용병업계의 정상에 오른 권사.
단순한 무력만으로는 시정부의 괴물들과도 능히 비견되는 압도적인 실력자.
움직이는 것만으로 업계를 술렁이게 만드는 음지의 거물.
애매모호한 행보로 인해 옹호와 비난을 한몸에 담는 독특한 인물이지만, 적어도 제니가 아군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
좌중을 내리누르는 묵직한 기세가 사라지고 나서야 제니가 털썩 바에 주저앉았다.
“괜찮겠나?”
옆에 서 있던 조든의 물음에 제니가 힘없이 장초를 물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무슨 말을 해도 자기가 직접 판단하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않는 놈이야. 어련히 알아서 알아보겠지.”
“카이세가 죽는 순간까지도 전혀 반응하지 않던 남자다. 그 심계의 깊이를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겠지. 자칫 잘못하면 역으로 잡아먹힐수도 있어.”
“내 눈을 믿어.”
그녀가 대답했다.
흐릿한 연기속에서, 제니의 눈동자만이 선명하게 빛났다.
“반이라는 마법사에게서 본 걸, 저 남자도 분명 똑같이 보게 될 테니까.”
#
레녹 일행은 완전히 망가진 별장에서 몸을 추스리고 얻은 수확들을 적당히 정리했다.
탐사단이 가지고 있던 많은 아티팩트들이 레녹이 일으킨 역류로 인해서 망가졌지만, 의외로 쓸만한 물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과부하로 인한 폭발로는 망가지지 않은 고급품들이 일부 존재하고 있었으니.
이리나 페스필드의 시체에서 나온 생명반응과 기척을 혼동시키는데 사용되는 닉스의 휘장.
날이 비틀린 단검과 끝에 금색 솔이 달린 지휘봉.
신발에 달려있던 작은 솔과 어깨 위쪽에 매달린 장신구까지 떼어내고 나서야 밀라가 혀를 내둘렀다.
“무슨 움직이는 보물창고네, 뭐 이렇게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던거야?”
애시당초 역류로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 부터가 상당히 고등급의 아티팩트라는 증거인데, 다른 탐사단원들이 하나도 가지고 있기 힘들 물건을 다발로 매달고 있으니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뚱뚱한 남자가 쥐고 있던 묵직한 로켓해머와, 비쩍 마른 여자가 들고 있던 유리검, 그 밖에 다른 탐사단원의 손에서 멀쩡하게 남은 반지 세 개 정도가 그 수확이겠지.
“전투 도중에 꺼내든 아티팩트는 대검 하나였다는걸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착용했을때 부가효과를 가져다주는 아티팩트가 대부분이겠지.”
딜런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는 어느샌가 그 굵직한 대검에도 익숙해진 듯 능숙하게 칼날을 땅에 꽃아 기대고 서 있었다.
“영리한 선택이고, 또 어찌보면 주제를 잘 알았다고 할수도 있겠군. 근접전투를 진행하는 도중에 다른 무구를 꺼내 쓸만큼의 여유를 만들수 없다는 걸 알고 있던거야.”
그렇게 말하는 딜런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 씁쓸하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귀도 교단의 관계자를 죽인 것에 대한 심경이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좋아! 다 정리했다!”
“고생했어.”
벽에 기대 앉아있던 레녹이 그렇게 말하자 밀라가 그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말했다.
“저기, 나 그래도 이번에 좀 잘하지 않았어? 아무리 그래도 인센티브는 좀 줄거지….?”
“………”
그녀가 무엇을 바라고 이런 말을 하는지는 안봐도 뻔했다.
이리나 페스필드의 소지품에서 나온 아티팩트 중에서 탐나는게 있기라도 했던건가.
레녹은 잠깐 생각하는 척 하다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거절했을때 밀라의 반응을 보는것도 재미는 있겠지만, 이번 일로 얻은 아티팩트가 꽤 되는데도 탐욕을 부릴 이유는 없다.
딜런처럼 그녀가 원하는 아이템 하나 정도는 양보를 해주는게 앞으로 부려먹는데도 큰 도움이 되겠지.
그녀가 가진 초능력 뿐만 아니라, 특유의 재기발랄한 전투감각은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된다.
샷건이라는 근중거리 화력투사 무기를 들고 검사의 사정거리 안쪽으로 망설임없이 뛰어드는 과감성은 레녹이 보기에는 아주 큰 무기였다.
결국 딜런이 이리나와의 전투에서 한끗 차이로 승리하게 만들어준 것 역시 결정적으로 밀라가 시선을 이리저리 끌면서 이리나의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
대천사의 연민을 비롯한 온갖 자기보조술식으로 스스로를 버프하고 전투에 임한 이리나 페스필드가 생각보다 허무하게 무너져내린 것 역시, 밀라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투방식 덕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샷건 하나만을 울궈먹으면서 초능력의 구체적인 능력을 숨기고 있는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거야 뭐 본인의 의사니 존중해줄 수밖에.
레녹의 허락을 받자마자 얼굴이 환해진 밀라가 쪼르르 달려가 헐레벌떡 브로치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 이거!! 나 이거면 돼!”
“발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지닌 아티팩트인 것 같은데. 흠, 반이 너 따위에게 양도해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물건이 아닌지…”
“입 닥쳐, 이 자식아!!”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합을 맞춰서 이리나를 상대할때는 언제고, 다시 쌍욕을 내뱉으면서 투닥거리기 시작한 두 용병.
어찌보면 레녹이 생각한 용병의 이미지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이들이 바로 이 두 사람이었다.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한다는게 말은 쉽지만, 막상 목숨이 오가는 싸움터에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본능과 이성의 영역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스스로를 증명하기 충분한 실력자라는 의미였다.
다시 레녹에게 다가와 연신 손바닥을 비적대는 밀라를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귓가에 나타난 다비가 레녹에게 말했다.
[고개를 조아리는 자세가 일품이군요. 마스터, 저는 이 인간이 마음에 듭니다.]“……….”
다들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다.
이 혼란속에서 레녹이라도 정신을 잘 차리고 있을 수밖에.
세 사람과 한마리 정령은 그렇게 얻은 아티팩트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좀 행동을 빨리해도 좋았겠지만, 레녹의 마력이 회복되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