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65
약먹는 천재마법사 465화
약속이 교차하는 곳(6)
레녹은 하이레아가 내려놓은 자루를 덥석 집어 드는 대신,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명이 직접 준비한 물건. 그 말의 의미가 이전보다 훨씬 더 무겁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광대가 부탁했던 보상이라고 하던데, 이번 일의 성패로 너한테 넘어가기로 결정이 됐나 봐.”
그런 레녹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면을 응시하며 하이레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밖에도 그 안에 든 물건들. 작전 도중에 죽은 녀석들 몫까지 다 네 거니까 사양하지 말라고.”
방금 레녹에게 서슬 퍼런 경고를 받은 뒤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정신력은 인정할 만하다.
그제서야 레녹도 피식 웃으면서 자루를 열고 내용물을 살폈다.
당장 자루 위에 수북하게 쌓인 것은 레녹의 눈에도 익숙한 화려한 광채.
“보석류와 소모성 아티팩트라…… 현물 위주인 건 나쁘지 않군. 뭐야, 이건 마약인가?”
자루 안쪽에 따로 케이스로 보관된 가루를 꺼내든 레녹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이레아가 그것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릭이라는 환술사가 요구한 거야. 그쪽 계통에게 유용한 환각제라고 하던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 밖에 건틀렛 재료로 보이는 설계도, 연금술 레시피 등으로 보이는 서류 몇 장이 자루 안의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카이우슈에 잠입했던 초인들이 요구했던 다양한 종류의 대가들. 본신의 성취나 개인적인 욕구와 관련된 물건이겠지.
레녹은 그런 물건들을 대충 확인만 한 뒤 곧바로 자루 가장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쿵!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새카만 큐브. 품안에 수납이 가능할 정도로 작은 크기.
희미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다른 아티팩트나 촉매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겉모습은 당장 그것을 손에 쥔 레녹이 살짝 놀랄 만큼 특이한 것이었다.
다방면으로 구성된 입방체가 큐브 안쪽에서 꽃이 피어나듯 계속해서 솟아오른다.
안쪽에서 확장되며 일그러지는 도형과는 별개로, 큐브의 크기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외견. 아마 이것이 명이 따로 입수해서 레녹에게 전해주었다는 물건일 테지.
“이건…….”
“펜터랙트(Penteract)라고 하더라.”
하이레아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같이 그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5차원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도형을 현실에 구현한 구세계의 유물이라고 하던데, 나도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어.”
“…….”
“원래는 광대가 명한테 부탁했던 물건인데, 이번 일의 공헌을 따져서 네게 넘기기로 결정된 모양이야.”
“……구체적인 기능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원래라면 유물의 기능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일은 없겠지만, 그만큼 지금 그의 손에 들어온 이 물건은 아주 난해한 종류의 귀물이었다.
애초에 3차원 공간에서 5차원의 물건을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구세계의 유물이 WORLD 3.0으로 넘어오며 만들어진 기적이겠지만, 신비가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공간축의 개념이 어떤 식으로 해석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노릇.
하이레아 역시 펜터렉트에 대해 그렇게 깊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떨떠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명의 말에 따르면 마력을 주입해서 무작위로 다른 공간축의 결과물을 재현하는 매개체라고 하더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
짐작이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직접 시도해 보는 것보단 못하겠지.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려 큐브 안쪽에 때려박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스펀지처럼 마력을 받아들인 펜터렉트가 그 자리에서 꿈틀거리며 순식간에 외견을 뒤바꾸기 시작한다.
레녹의 손안에서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가는 그 모습에, 하이레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자, 잠깐만……. 빅터, 그런 물건을 이런 성당 안에서 대뜸 사용해 버리면……!!”
쿵!!
순식간에 레녹의 눈앞에 나타난 새카만 천칭의 모습. 크기는 레녹의 키와 비슷할 정도다.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던 큐브 형태와는 달리, 지금은 선명한 힘을 흩뿌리고 있다.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리는 천칭을 보고 레녹이 턱을 매만졌다.
“이런 느낌이군.”
“이게…… 뭐지?”
하이레아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레녹이 입을 열었다.
“주력을 매개로 작동하는 주술도구의 일종이다. 무게를 재는 능력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다만……”
“아니, 그야 천칭의 형태니까 그런 능력을 가졌겠지만…… 다른 공간축의 결과물을 가져온다는 게 이런 의미였다고?”
“마력을 주입하면 무작위로 특정한 아티팩트나 물건으로 변형되는 유물인 듯 하군.”
그제서야 펜터렉트가 무슨 능력을 지녔는지 이해한 하이레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광대가 이 물건을 그렇게 원하던 이유가 있었네.”
레녹도 내심 동의했다.
자신의 능력과 위계까지 운이라는 변수에 맡기는 광대라면, 이 유물을 아주 잘 써먹었을 테니까.
‘문제는 명이 이걸 광대가 아니라 내게 넘겼다는 사실이다.’
그 괴물같은 흑마법사가 광대의 능력을 모를 리가 없음에도 레녹에게 이것을 넘겼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녹 역시 이것을 잘 써먹으리라 기대하지 않고서야 별 쓸모가 없는 보상일 터.
‘단순히 무작위로 아티팩트를 뱉어내는 형식은 아닐 가능성이 높아.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겠군. 하지만…….’
복잡한 입방체의 형태로 돌아오는 큐브를 손에 쥐며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큐브의 기능과는 상관없이 명이 레녹에게 보내는 호의가 아무리 생각해도 예상했던 것 이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
다소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레녹을 무장시키려는 듯한 명의 노골적인 태도.
심지어 이번 작전이 끝났음에도 이런 식으로 보상을 챙겨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어쩌면 이번 작전이 명이 진정으로 레녹을 원한 이유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명이 이런 식으로 레녹에게 다양한 조언과 호의를 베푸는 것이, 그만큼 그에게 바라는 것이 많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당연한 일.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이 돌이킬 수 없는 빚이 되어 레녹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레녹은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펜터렉트를 품 안에 넣고 자루를 챙겨 들었다.
“좋아. 이번 일은 이걸로 마무리 짓지. 다음 일은 언제지?”
“그쪽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대륙 곳곳에서 작전을 진행하고 있어서 어디 투입해도 큰 문제는 없어.”
하이레아는 그렇게 말하며 예배당 테이블 안쪽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게 지형을 그려놓은 듯한 물건이지만, 그 안쪽에서 각양각색의 점들이 천천히 꿈틀거리며 대륙 곳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도 한쪽 구석을 짚으면서 자연스럽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장 급한 건 중앙전선이지만, 최근에 심상치 않은 소문이 돌고 있으니 제외. 동부 쪽 작전을 원한다면 이보크에서 작전에 들어갈 예정…….”
“아니, 언제라도 괜찮다면 여기서 일단 끝내지.”
하이레아의 말을 끊은 레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처 위성도시에서 구세계의 유물을 두고 점검할 계획이 있다고 들었다. 그때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겠군.”
“……그쪽 일정, 제대로 확정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소식이라는 거 알고 있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린 하이레아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짚고 있던 지도를 거둬들였다.
“도대체 어디서 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어. 당신 역시 카이우슈의 일 때문이라도 참가할 명분은 있는 셈이니까.”
레녹이 꼭 그것을 원하고 광대의 말을 유심히 기억해두었던 것은 아니다.
거둬들인 구세계의 유물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정리한 뒤 분배하는 자리.
그 사이에서 나돌게 될 아티팩트에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선에서 직접 움직이는 판데모니엄의 주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일.
물론 명이나 크로켄처럼 다른 모든 초인을 압도하는 괴물이 찾아올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럼에도 의미가 있다.
청의 눈과 판데모니엄 양측에 발을 들인 레녹의 입장에서 두 조직의 모든 것을 봐두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
명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었음에도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는 것 자체가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증거일 터.
그렇다면 레녹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확인하면 그만이다.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하이레아가 건네준 자루를 마력사로 휘감아 들어 올린 뒤 등을 돌렸다.
하이레아는 그런 레녹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살짝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을까?”
“뭐지?”
“편람의 우물에서 마지막까지 광대와 함께했다고 들었어.”
하이레아는 레녹의 가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곳에서 혹시…… 승천에 대한 진실을 보고 온 거야?”
“…….”
살짝 놀랐다.
의중을 읽을 수 없던 이 이중인격자에게도, 이 세계의 진실은 갈망의 대상인 것일까.
아니, 레녹은 하이레아의 시선을 천천히 뜯어본 뒤 그것이 갈망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단지 알고 싶을 뿐이다.
이제와서 승천에 도전할 일은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어떤 의미로 그 목적에 상당히 가까운 조직의 일원이었으니.
정말로 판데모니엄이 그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목표를 이룬다면, 그리고 그 미래의 끝에서 다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기약할 수 없는 희망이 그녀의 앞에도 드리울 수 있는 것인지.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더라도 알고 싶어 하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아니라, 재능 있고 오만한 마법사라면 진실을 들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레녹은 이것이 언젠가 온 세상에 흘러넘칠 갈망의 편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언젠가는 자격을 갖추지 않은 이들조차 결말이 머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틀림없이 인지할 수 있는 시간 단위 안에 들어온 개천의 순간을 모두가 기다리게 되겠지.
그것이 다가오기를 바라든, 거부하든 그 순간을 한참 전에 인지하고 깨달은 레녹조차 실감할 수 없는 종말을.
하이레아의 말에 답하기에 앞서, 레녹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가 알고 지낸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을.
잠깐의 침묵 끝에 레녹이 코웃음을 쳤다.
“별거 아니다.”
하이레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별 게, 아니라고?”
“오래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지. 깊게 생각해 봤자 매몰될 뿐이다. 억지로 생각하고, 번민하며 고통받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 정도면 충분해.”
레녹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하이레아는 멍하니 그런 레녹의 모습을 바라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오만한 생각이네. 내가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
“하지만 당신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란 건 알겠어.”
그녀는 힘없이 예배당의 의자에 주저앉으며 레녹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음 점검 일정이 정확하게 정해지면 연락할게. 오늘은 즐거웠어.”
레녹은 대꾸하지 않고 성당을 나섰다.
습한 수증기가 뿜어져나오는 공장 뒤쪽 수도관 사이를 거닌다. 흩날리는 연기 사이로 가면을 벗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치익!
시야가 탁 트이면서 피부 위로 닿는 공기의 온도가 확 변했다.
며칠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맨 얼굴로 느껴지는 감각이 어색하게 변했다.
“후우…….”
텁텁한 맨얼굴을 매만지며 근처에 깨진 유리창을 거울삼아 얼굴을 들여다본다.
며칠간 도시 밖에서 야영을 했음에도 무거운 피로외에는 큰 내상이 없다는 것이 레녹을 놀랍게 만들었다.
대천사의 눈물을 복용하며 신체 나이를 뒤로 감아버리면서, 체내에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부상과 노폐물을 전부 몰아낸 효과.
체감보다 역체감이 심한 몸의 감각을 생각하면 이 기분이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밀림에 들어가 승천자들의 육탄전 사이에서 부대끼는 와중에도, 컨디션 자체가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실감하지 않았던가.
당장이라도 바뀐 컨디션과 체내 마력 회로 효율을 연구해 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판데모니엄이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것과는 달리, 그 끝에서 얻은 질문은 여전히 레녹의 안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외해의 풍경과 계백의 마지막을 전부 목도했던 레녹이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단 하나의 질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 도시에 있다.
레녹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40번대 구역 미개발지구로 걸음을 옮겼다.
* * *
“반, 너무 오랜만에 찾아오는 거 아니냐?”
레녹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첸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몇 번 연락을 했는데 좀처럼 연결되는 일이 없더라. 얼마나 바빴던 거야?”
음지의 거물, 삼두령 중 하나였던 팔굉성채.
윌터 마르티네스의 사도강림을 저지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던 뒤로 이곳에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다.
세력을 지탱하던 가문 중 일원과 이본을 잃고 육방성채로 이름을 바꾼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살아남아 버티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자리한 균열을 관리해 줄 인원은 여전히 시정부에게 있어 필요하고, 기존의 인력이 무탈하다면 그들에게 책임과 소지를 떠넘길 필요가 있기 때문.
삼영가주 오렌이 채주로 올라선 뒤, 여러 견제와 논란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그들의 성세는 아직 건재했다.
아니, 레녹이 보기엔 적어도 일원과 이본이 무너졌던 그 순간에 비하면 훨씬 멀쩡해 보였다.
레녹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첸이 내민 손을 잡았다.
“많은 일이 있었지.”
첸이 웃더니 시선을 쓱 돌렸다.
“성채 밖의 소식은 계속 전해 듣고 있어. 시정부 고위층과 한판 붙었다는 소문이 돌던데.”
“음.”
“너도 한동안은 요양에 집중할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생각보다는 컨디션이 괜찮은가 보지?”
그렇게 말하는 첸의 표정은 어딘가 신기하다는 것처럼 변해 있었다.
“다들 네가 이미 죽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더라. 거 참, 나도 성채에서 벌어진 일을 몰랐다면 개소리라고 생각했겠지.”
“…….”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일단 저택으로 가자고.”
레녹은 마지막으로 첸과 만났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레녹은 사도를 토벌한 대가로 일원가주의 저택과 부지를 인계받았고, 그것을 첸에게 임대해 주었다.
성채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는 레녹에게는 저택에 위치한 비처의 균열만 확보하면 상관이 없었기 때문.
첸은 그렇게 빌린 가주의 부지를 이용해 준비해 온 사업을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우르르릉!!
일원가주의 고풍스러운 나무 저택 근처 거리에 자리 잡은 빌딩 건물 수채.
아래쪽으로는 막대한 크기의 중장비가 널찍한 앞마당을 주차장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트럭이 쉴 새 없이 드나들며 화물을 운반하는 대열이 성채 바깥 대로까지 이어져 있을 정도.
레녹의 시선을 눈치챈 첸이 씩 웃었다.
“생각보단 괜찮아 보이지?”
“괜찮은 수준이 아니군.”
“인건비와 유지비가 상당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매출이 꽤 나와.”
첸이 자랑하듯 마구 어깨를 으쓱거렸다.
“금제율령이 풀리면서 도시의 시설파손이 심각해서, 덕분에 우리가 손 댈 건수들도 썩어 넘치지. 건설업계에 때아닌 호황이 불어 닥쳤다 이거야.”
“…….”
“예전부터 이런 사업을 구상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 성채의 이름을 달고 있으니까 중립이라고 생각하는 놈들도 많거든.”
운이 좋아서만 가능한 일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첸 정도로 영민한 사람이라면 레녹에 대한 소문과 구체적인 정황에 대해 듣지 못했을 리가 없을 터.
레녹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일관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비범한 성정이다.
기존의 이해관계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외부의 정보를 일체 감안하지 않는 사람.
사업을 벌이는 데 있어 미련하지 성격이라 해야 할까. 레녹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도 보기 힘든 재능 중 하나였다.
“누님은 잘 지내시지? 그쪽 일이 잘 맞는지 요즘은 연락도 잘 안 되더라고.”
“제니 말로는 가장 바쁜 프리랜서들 중 하나라더군.”
레녹이 대답했다.
“무인다운 성정과 실력이 눈길을 끌었는지, 다양한 곳에서 의뢰가 들어온다고 들었다.”
수련의 경우에는 제니가 관리하는 프리랜서들 중에서도 가장 근면성실한 편이라, 그만큼 평판이나 보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고 들었다.
레녹이 마법을 가르쳐주겠다 말했을 때도 겨우 시간을 내서 찾아왔을 정도였으니 평소에는 아예 얼굴도 보기 힘들겠지.
“그건 다행이군. 조만한 연가를 한번 낼 예정이라, 미리 누님께 연락해서 일정을 비워놓아야겠어.”
옅은 미소를 지은 첸이 문지방에 걸린 자물쇠에 열쇠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양지쪽으로도 사업을 좀 확장하려면 싫어도 발품을 팔아야겠더라고.”
“세바스찬을 연결해 주지. 그쪽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브로커라 인맥을 이어줄 수 있을 거다.”
“소개 수수료는 네가 받아 챙기려고?”
첸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레녹도 웃었다.
“당연한 말을.”
끼이익……!!
문이 열리고 저택 가장 깊숙한 곳의 비처가 두 사람의 앞에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수풀이 무성한 새파란 벌판, 그 위에 자리한 새카만 관짝 한 구.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릿하게 흘러가며 조용하게 가라앉은 비처의 분위기.
팔굉성채가 존재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 거대도시에 존재하는 세계의 균열.
첸이 뒤로 슬쩍 걸음을 물리면서 말했다.
“방해받고 싶지 않을 테니 이만 가볼게.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달라고.”
“고맙다.”
“……그런데 이번엔 균열에서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언질만 들어도 될까?”
머쓱한 안색으로 첸이 웃었다.
“그, 뭐냐……. 꼭 알고 싶다는 건 아닌데, 사업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좀 문제가 생기면 미리미리 준비해두면 좋거든.”
“걱정하지 마라. 아마 그렇게까지 소란이 생기진 않을 테니까.”
레녹은 희미하게 웃으며 시선을 비처 안쪽으로 돌렸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어쩌면 이번 기회에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뭐?”
카이우슈에서부터 시작된 복마전의 일은 모두 끝났지만, 아직 레녹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다.
외해의 저편에서 마주했던 풍경의 진실.
레녹은 바로 그 의문과 해답을 이 자리에서 파헤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