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66
약먹는 천재마법사 466화
약속이 교차하는 곳(7)
첸을 돌려보낸 뒤, 레녹은 문을 닫고 관이 자리한 풀밭 위로 걸음을 옮겼다.
먼지 쌓인 낡은 관뚜껑을 조심스레 밀어내자 느릿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끼이익……!!
마모된 관 안쪽 깊은 곳에 자리한 희미한 균열의 모습.
단순히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씩 꿈틀거리며 안쪽에서 자리를 바꿔가고 있다.
레녹은 그것이 단순히 관에 새겨진 흠이 아니라, 이 세계에 남겨진 얼마 되지 않는 균열 중 하나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팔굉성채가 만들어져 존속하는 근본적인 이유이자, 성채에 아직까지 남아 보호받는 세계의 균열.
외해와 직접 이어질 정도로 크지는 못하더라도,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면을 관찰하고 연구하며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사도 윌터 마르티네스를 상대한 뒤, 레녹은 이곳에서 시공간의 이해도를 높이고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손에 넣기 위해 골몰했지만.
‘시간을 조작하는 감각만큼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
“…….”
지금이라면 그때 포기했던 시간선에 대한 감각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당시 사도를 처치했던 레녹과, 지금의 레녹 사이에 놓인 간극은 스스로도 실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니.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뻔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당장 시간선에 손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올라온 뒤에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시간이 얼마나 섬세하면서도, 또 상대적인 개념인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체내의 컨디션을 회귀시켜주는 대천사의 눈물을 한번 복용해 보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
투자해야 하는 자원에 비해 터무니없이 결실이 적고 부당하면서도, 또 위험하기 그지없는 능력.
판데모니엄의 명왕조차, 시간선을 조작하는 일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화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레녹은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시간조작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털어버리고, 본래 하려던 일에 집중했다.
균열 사이에 손가락을 매만지듯 쓸어내고, 그 사이로 마력과 의식을 깊숙하게 흘려보낸다.
키이잉……!!
인과의 순환이 멈춰버린 닫힌 세계. 그 세계에 자리한 아주 희미한 균열.
하지만 아주 자그마한 균열이라도 존재한다면, 그것을 정말로 닫혔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외해와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관문] 역할을 하는 편람의 우물은, 레녹이 보기에 굉장히 기이한 개념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그런 관문들이 우물 하나가 아니라 몇군데 더 존재한다면, 어째서 승천자들 모두가 이 세계가 닫힌 채 끝을 기다린다고 말한단 말인가.
한번 멈춰 버린 인과의 흐름은 관문을 통해서는 순환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의미없는 질문이군.’
인과의 흐름, 혹은 관문의 존재에 대해 명쾌한 지식이 없는 이상 호기심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이다.
레녹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원래 목표에 충실하고자 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세계를 구성하는 토대를 관측할 수 있는 단면이자, 어떻게 보자면 외해로 이어지는 통로인 셈이다.
물론 레녹이 지닌 위상과 체구로는 이 바늘 틈조차도 되지 않는 균열로 무언가를 내보내거나 들여올 수도 없지만, 보는 것이라면 다르다.
왼쪽 눈을 매만져 자색의 마안을 전개한 뒤, 그렇게 공유된 시각을 그대로 균열 안쪽으로 밀어넣는다.
동시에 레녹의 의식이 순식간에 점멸하면서 저 멀리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키이잉……!!
“윽…….”
무심코 내뱉은 신음조차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느릿하게 늘어진다.
의식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이는 균열의 틈 사이에서, 천천히 수인을 맺고 마력을 끌어올린다.
우우웅……!!
끓어넘치는 마력이 블록처럼 조립되어 쌓아올리는 기이한 감각과 함께, 열쇠가 맞춰지는 듯한 소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고.
그렇게 마련된 무채색의 파동 위에 레녹 자신의 심상을 조금씩 흘려 넣는다.
[자성영역 전개 : 분기점 관측]파아아앗!!!
그 순간, 레녹의 발아래서 터져 나온 공허가 비처 전체를 뒤덮고 거대한 암흑의 공동을 피워올렸다.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암흑의 공허.
발아래로 퍼져나오는 황금빛의 파문과 그 옆에 놓인 관의 모습만이 공허 저편에 남겨져 있을 뿐.
영역을 전개한 시점부터 미친듯이 소모되는 마력을 온전히 실감하며, 레녹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성영역을 처음으로 각성한 뒤로 쓰러뜨려야 할 상대 없이 영역을 전개한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나 마찬가지.
숱한 강적과 난관을 뒤로하고 이 시점에 한번 더 심상을 투영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계획을 주도했던 광대 본인조차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던 계백의 마지막 기아스.
‘다시한번 승천에 도전하라.’
어째서 계백은 승천에 도전하라는 기아스가 깨어난 그 순간, 망설임 없이 우물 밖으로 몸을 던졌을까.
어째서 외해 밖으로 뛰쳐나가 종말을 향해 스스로를 탄환으로 삼았는가.
어째서 그렇게 장대한 계획이 별다른 사전작업 없이, 숨겨진 마지막 기아스를 발동시키는 것으로 진행되었는가.
머릿속 한켠으로 계속해서 되뇌고 생각하며, 결국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천에 도전하는 방법이, 단순히 위계를 초월해 자격을 거머쥐는 것 하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계백은 틀림없이 그 시점에서 승천에 다시 한번 도전하기 위한 가장 가까운 방법을 골랐고, 기아스에 따라 움직였다.
그 방법이 외해 밖으로 뛰쳐나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종말을 향해 스스로를 던지듯이 내미는 것이었을 뿐.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천천히 곱씹으며 실감할수록, 레녹은 판데모니엄의 진정한 목적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명이 레녹에게 일러주었던 말은 단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다.
두 승천자들의 격돌. 외해로 향하는 통로의 개방과 종말의 목도.
그 사이에서 레녹은 판데모니엄의 수뇌부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이해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찾아오는 결말은 외해의 종말들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불가해의 힘과 저력을 지니고 외해를 유영하는 그 괴물들만이, 다가올 멸망을 피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판데모니엄은 단순히 다음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세계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단장이 바라는 것은 끝없이 순환하는 세계를 넘어 외해 밖의 종말을…….
“……”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멈춰 세운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오래 고민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하이레아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레녹이 지금 시도하는 일은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로 시도해서 성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전력을 다해 마련한 판 위에 남아 있는 심상을 모조리 투영한다.
어두운 영역의 공허 사이로 눈부신 황금빛의 만화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비행기의 엔진 수십 대가 동시에 회전하며 터져나오는 듯한 소음이 공허 사이로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레녹의 주위를 둘러싸고 내려다보듯, 머리 위에 떠오르기 시작한 수십 갈래 만화경.
하지만 레녹은 그 눈부신 황금빛의 정경 사이로 비추는 풍경을 무시하고 발아래 놓여 있는 낡은 관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관 안쪽에서 조금씩 꿈틀거리는 세계의 균열. 그 한줌조차 되지 않는 희미한 흔적 사이로.
레녹의 심상을 투영하는 만화경은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을 끌어오는 전능의 힘이 아니다.
영역의 주인인 레녹 본인과 연이 닿아 있는 가능성과 분기점을, 미래 시점에서 관측하고 돌아보며 현현하는 힘.
그렇기 때문에 그간 레녹이 사용해 왔던 영역 역시, 레녹 자신과 연이 닿아 있거나 보유했던 힘의 연장선에서 구현되지 않았었나.
마찬가지다.
그동안 풍문으로만 들어왔을 뿐 단 한번도 직접 볼 수 없었던 외해의 풍경과, 그 전말을 한번 확인하고 돌아왔기에.
이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가능성이 무슨 의미인지 진정으로 실감했기 때문에.
레녹은 바로 외해의 힘과 관련된 가능성을 전제로 자성영역을 전개하려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채의 균열에 찾아온 것은 편람의 우물과 가장 환경적으로 유사한 장소가 이곳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
외해를 직접 비추지도 못할 만큼 작은 균열이라 하더라도, 이곳이 어떤 의미로는 가장 세계의 바깥과 연관되어 있는 장소라는 것은 틀림없다.
만약 레녹이 생각한 대로 외해의 가능성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구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구현된 미래 시점에서 레녹 자신이 나아갈 길과 분기점을 확인할 수 있다면.
레녹 자신이 어째서 이 세계에서 눈을 떴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 역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겠나.
양 손을 균열 위에 교차시킨 뒤, 심상을 그러모아 그대로 균열 위로 퍼트린다.
후우우웅!!
레녹이 교차시킨 양쪽 손 너머에서 떠오른 만화경이 순식간에 거무칙칙한 흑색으로 물들며 불타오르고.
균열을 촉매로 삼아 외해의 가능성을 전달받은 만화경 안쪽의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지직……!!!
“설마…….?”
한 번의 시도로 유의미한 결과를 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건만, 만화경 너머의 풍경이 변질되며 무언가를 비추려 하고 있다.
레녹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외해의 가능성을 받아들인 만화경을 응시했다.
새카맣게 점칠된 만화경 안쪽의 풍경이 조금씩 비틀리다 걷히는 것과 동시에, 레녹의 눈에 그것을 비추기 시작했다.
글자였다.
이 대륙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을만큼 기이하게 비틀린 글자.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그 형상과 구조를 바꾸는 새카만 진흙으로 만들어진 글자들이, 만화경 너머에서 사납게 날뛴다.
[어디인가.]놀랍게도 레녹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 [나를 부르라.]드문드문 이어지는 글자들이 살아움직이며 그 의미와 의지를 바꾼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부름. 레녹이 눈앞에 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하다.
그 순간, 만화경 안쪽에 비춰진 글자가 삽시간에 그 갯수를 부풀리며 수백, 수천 개로 늘어나 만화경 안쪽을 빼곡하게 뒤덮었다.
[약속을지키지않는구나내이름은어디에 있느냐위대한의지를거역했다배가고프구나너무나춥다너를저주한다가시밭길을걷고 있다왜느껴지지않는거지의식은어디에 있는거야짊어진것을내놓아라약속한것을바치거라]만화경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쏟아져나오는 강렬한 글자들.
그 힘만으로 새카맣게 비틀린 채 회전하던 만화경의 경계선이 일그러지고, 밖으로 글자들이 튀어나올 듯 경련했다.
으지지직……!!!!
“빌어먹을……!!”
당장이라도 머릿속을 뒤덮고 침범해 역으로 잡아먹으려 드는 듯한 강렬하고도, 끔찍한 의념.
레녹은 그제서야 눈앞에서 펼치지는 기현상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이를 악물었다.
만화경의 힘을 자의로 뚫고 튀어나오려 드는 것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너무나도 강대하고 초월적인 의지의 집합체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 사이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의지를 투영하고 있을 뿐.
이건 레녹 자신이 예상했거나, 기대하고 있던 결과가 아니다.
남아 있는 마력을 모조리 끌어올려 심상을 전력으로 전개, 만화경의 통제권을 순식간에 되찾아 그대로 되감아 수복시켰다.
이 공간은 레녹 자신의 절대적인 의지와 심상으로 구현된 자성영역.
일단 손에 넣은 가능성이라면, 레녹 자신의 힘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칙칙한 흑빛으로 비틀린 만화경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안쪽의 풍경 역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 사실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안쪽에서 비춰지는 글자들이 마구 발악하며 알 수 없는 전성을 토해냈다.
끼이익……!!
만화경의 문을 완전히 닫아 취소시키는 것은 전개하는 것보다 몇 배로 부담스러운 작업.
레녹의 남은 마력을 모조리 소모해서 간신히 분기점의 문을 닫아버린 그 순간, 자성영역의 전개가 끝나며 레녹의 몸이 너른 풀밭 위에 내던져졌다.
풀썩!!
“우욱……!!”
속에서 올라오는 구역질을 삼키며 레녹이 그대로 균형을 잃고 쓰려졌다.
균열 끝에 닿아 있던 손끝이 파리하게 질린 채, 차갑게 굳어 있다.
레녹은 멍하니 자신의 손가락 끝에 남겨진 공허의 흔적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없었어…….”
균열을 촉매로 삼아 분기점을 열었음에도 정작 레녹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만화경 너머에 자리한 것은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알 수 없는 의념들 뿐.
그들이 도대체 누굴 찾아 헤매고 있었는지.
원망과 증오, 애정과 경이, 절망과 비탄을 담아 부르던 사람이 누구인지.
레녹은 알고 싶지 않았음에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외해의 가능성을 분기점으로 삼아 선택한 레녹은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그 결실로서 만들어진 무수한 감정과 잔해들뿐.
그동안 분기점을 여러번 관측했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처음이다.
그것은 외해의 분기점을 선택해 세계 밖으로 나간 레녹이, 이미 죽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미 그 가능성이 미래 시점이 아니라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가.
“…….”
소름이 끼치는 듯한 공포. 죽음과는 궤가 다르면서도 그에 필적하는 두려움.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정외의 가능성.
“빌어먹을…….”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선 레녹이 비처 밖으로 나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제니, 나야.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한 달 만에 전화해서 하는 이야기가 그거야?]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제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녹이 힘없이 웃었다.
“부탁해도 될까?”
[……잠깐만, 그것보다 먼저 손님이 한 명 와 있어. 일단 술집으로 와 볼래?]“뭐?”
수화기 너머로 제니가 살짝 곤란한 기색으로 속삭였다.
[아리스 리첼렌이 널 찾고 있어. 할 이야기가 있나 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