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67
약먹는 천재마법사 467화
약속이 교차하는 곳(8)
무수한 사선을 건너온 레녹에게도 긴장되는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강인한 마법사의 정신력으로 이성을 붙잡고 있을 뿐, 레녹 역시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
내면의 약한 마음과 부정적인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떨쳐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하지만 술집으로 향하는 지금 이 순간이 밀림으로 향하던 그 때만큼이나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지금 제니의 술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은, 레녹으로서도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
저녁 노을이 지는 49구역을 지나쳐, 술집으로 향한다.
이제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계단을 지나쳐, 낯이 익은 바의 어두운 풍경.
단 한 명의 손님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제니가 레녹을 알아보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반, 여기야.”
“…….”
그런 제니의 맞은 편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환한 금발의 여성.
먼 여행을 다녀오기라도 한 것처럼 단정한 코트를 걸친 채, 발치에는 작은 가방을 내려놓은 행색.
풍성한 머리칼을 하나로 질끈 동여맨 모습은 레녹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제니가 그런 레녹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쪽은 리첼렌 교수님. 방위군 반란 사건때 같이 일해봐서 알지? 따로 소개는 해줄 필요 없겠네.”
아리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레녹 역시 작게 숨을 내쉬고 살짝 떨어져 앉았다.
자리 하나를 비워두고 바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모습.
“……?”
제니 역시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어색한 분위기를 곧바로 알아차린 듯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그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레녹의 앞에 서서 셰이커를 톡톡 두들겼을 뿐.
“뭐 마실래? 크레바스, 페일더, 바누샤……. 최근에 창고를 한번 싹 갈아엎어서 신제품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그동안 안 먹어본 걸로 하지.”
“두 사람이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면, 일단 그쪽 본론부터 먼저 이야기할까?”
제니가 자연스럽게 뒤쪽 선반에서 술병 몇 개를 꺼내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하며 물었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야?”
“…….”
레녹은 그 말에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옆에 앉아 있는 아리스의 존재를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제니 역시 살짝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나 보네. 급한 일이면 지금 바로……”
“아니, 괜찮아.”
원래 레녹은 성채의 균열을 대대로 관리해 온 가주의 혈육에 대한 정보들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이 도시에서 외해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받아들인 자가 있다면, 태어날 때부터 균열 가까이서 자라온 성채의 귀족들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레녹은 술집으로 찾아오는 길에 생각을 정리하며, 그 방식이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녹이 외해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한 것은 성채의 균열이 아니라 편람의 우물에서 있었던 일.
오늘 균열을 찾은 것은 어디까지나 외해의 가능성을 좀 더 명확하게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균열을 찾아 영역을 전개해 보기는 했지만, 외해의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한 만화경에 무언가 비추리라고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던 바.
오히려 한 번의 시도로 결과물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그 결실이 레녹의 예상과는 지나치게 달랐던 것이 생각을 어지럽히고 있다.
다른 외부 요인을 찾아 나서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레녹이 지닌 분기점에서 소실되어버린 또 다른 가능성의 풍경.
외해의 가능성으로 뻗어나간 분기점의 자신이 어째서 존재조차 하지 않았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결국 레녹 자신을 깊게 파고드는 수밖에.
처음부터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음지에서 제일가는 의사를 찾아줘. 할 수 있겠나?”
“…….”
침묵하는 제니와 아리스를 두고, 레녹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기왕이면 신체정보를 수치화할 수 있는 검진분야 쪽이면 좋겠군. 이런 저런 가능성을 생각하면 역시 혈액이나 유전자를…….”
“잠깐만, 반……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어?”
레녹의 앞에서 고개를 낮게 숙인 제니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 나한테는 단 한 번도 그런 사람을 찾아달라고 말한 적 없었잖아.”
“……그렇지.”
물론 그건 레녹의 비밀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페널티의 존재 때문이었지만, 그 사실을 제니에게 말한 적은 없다.
그녀가 이렇게 심각하게 나올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레녹이 살짝 고개를 기울인 그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아리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드리치 오니온 때문인가요?”
“…….”
침묵이 흘렀다.
그제서야 제니와 아리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레녹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알리바이 때문이군.’
판데모니엄의 작전을 위해서 오래 자리를 비운 동안, 그 핑계를 마드리치와의 전투로 인한 부상으로 내 두었다.
견뢰와 마드리치 오니온이 전투를 벌여 큰 여파가 일었다는 소문이 도시 바깥에까지 널리 퍼졌을 정도.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레녹이 의사를 찾는 이유가, 오니온과의 전투로 인한 부상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수한 전투를 치르면서 한번도 의사를 찾지 않았던 레녹이, 갑자기 의사를 찾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약선을 만나 약을 처방받는데 그쳤던 마법사가 검진을 필요로 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정해져 있었다.
“……나중에 설명해 주지.”
영역 내부의 풍경 떄문에 자기 자신을 보다 정확하게 검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여기서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렇기에 레녹은 적당히 부정하고 설명을 미루려 했지만, 그 수상쩍은 태도에 두 사람은 오히려 그 사실을 확신한 것처럼 보였다.
셰이커를 내려놓은 제니가 곧장 바 안쪽의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돌려버린 것이다.
“딥웹에 마스터 등급의 무기명의뢰를 넣어놓을게. 거기다 지인들한테 연락 돌려서 추가로 정보 매입하면 36시간 이내로 결론을 낼 수 있어. 조든?”
“……옛 동기들에게 연락해 보지. 아직 중앙전선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는 녀석도 있을 거야.”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조든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고, 방 안쪽에서 제니가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기 그지없는 일처리. 시작과 동시에 일이 절반은 끝난 듯한 숙련된 언동.
제니와 조든이 이번 일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 모습에서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었다.
레녹은 이 시점에서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고 양해를 구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당장 판데모니엄의 작전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레녹이 마드리치 오니온과의 전투로 부상을 입고 요양 중이라는 핑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거대도시 음지에서 견뢰라는 이름은 이제 그 정도 알리바이가 아니라면 가릴 수 없는 지경까지 커져 버린 지 오래다.
아직 제니나 아리스에게도 모든 신분과 목적을 털어놓을 수 없는 지금, 레녹 스스로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높았다.
당장 저렇게 열심히 의사를 찾아준다는데 만류하기도 어려운 상황.
결국 레녹은 빈 술잔을 두들기다, 잠깐 미뤄두었던 문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멍하니 레녹을 바라보고 있던 마법사, 아리스 리첼렌을 향해.
“방위군 작전이 끝난 뒤로는 처음이군요.”
“……그렇죠.”
“하실 말이 있다면 여기서 들을까요?”
“…….”
주저하는 그녀의 모습에 레녹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리를 옮겨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아뇨, 괜찮아요.”
결심을 굳힌듯한 아리스의 표정을 보며, 레녹 역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이 시점에 레녹이 아니라, 49구역의 반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레녹 역시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 리첼렌은 레녹과 반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반쯤 확신하고 있지만, 직접 그 모습을 확인하고 진실을 전해 들은 것은 아니다.
레녹과 반의 신분 사이에 존재하는 그 미묘한 경계선.
반이 레녹 본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레녹 본인에게 직접 털어놓을 수는 없는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굳이 제니의 술집까지 찾아와 반을 찾은 것이 아니겠는가.
방위군의 사태가 끝나고,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그날 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말로는 담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지만 레녹은 여전히 잊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다시 한번 재회하게 된다면, 이런 식의 만남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은 것은 레녹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는 바 안쪽에서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키보드 소리.
“친구에게 실수를 했어요.”
한참을 망설이던 아리스가, 양 손으로 술잔을 꾹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기뻐했고, 그 이유를 깨닫고 당황했죠. 이 도시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믿었어요.”
“…….”
“오만이었죠. 고작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무언가였다면, 그렇게 숨기고 고민해야 할 이유도 없었을 텐데…….”
레녹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특유의 짙은 푸른 눈동자는 여전하다.
그 눈동자 안에서 이전보다 더 강인한 의념과 심상이 흘러넘치고 있다는 것을 레녹은 모르지 않았다.
마탑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아리스 역시 나름의 성취를 계속해서 쌓아 올리는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을 전하려고 돌아온 겁니까?”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없는 사이 여러가지 문제를 떠안았다는 이야기였죠. 그게 걱정이 돼서 잠깐 시간을 내보려 했지만…….”
서글픈 시선으로 레녹을 바라보던 아리스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더군요.”
그녀는 트렌치 코트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레녹의 테이블에 밀어놓았다.
작은 책갈피의 형태. 하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어지간한 아티팩트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복잡하게 꼬여 엉킨 마력이 책갈피 안쪽에서 선명한 의념으로 변해 물질화하고 있는 듯한 기세.
마치, 심상을 직접 흘려넣은 듯한 강렬하기 그지없는 소망의 결정체처럼 느껴진다.
한동안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던 레녹이 물었다.
“이건……?”
“마탑에서 방법을 찾는동안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아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이미 방향성은 확인했어요.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더라도, 보다 근본적인 시점에서 방도를 찾을 여지가 있을지도 몰라요.”
“……”
레녹은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마탑에 갔던 이유가, 레녹의 비밀과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말인가.
영민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몇마디 말만으로 거기까지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을줄은 몰랐다.
말로는 결코 전할 수 없는 의미, 아직 제대로 정하지 못한 감정.
주고받지 않은 비밀과 번민 사이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있을 뿐이다.
아리스나 레녹 역시 엉키고 꼬인 채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나름의 방법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
레녹은 조용히 손을 뻗어 책갈피를 집어 들었다.
“친구분께는 제가 확실하게 전해드리죠.”
“……고마워요.”
아리스가 힘겹게 웃었다.
* * *
아리스는 그 뒤로 제니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떠났다.
여행에서 막 돌아온 차림처럼 보인다 싶었더니, 마탑으로 돌아갈 채비를 전부 끝내고 찾아왔던 모양.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제니의 확답을 받고 난 뒤, 레녹은 곧장 술집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섰다.
판데모니엄의 작전이 끝난 뒤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상황.
하루의 시간이라도 좀 휴식을 취해두는 편이 좋겠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물결에 멍하니 시선을 맡긴 채로 생각에 잠겼다.
‘교차검증이 필요한 시점일지도 모르겠군…….’
그동안 레녹은 아무리 큰 부상이나 피해를 입더라도 병원이나 치유술사의 힘을 빌리는 것을 극도로 기피해 왔다.
아직 여물지 않은 그의 성장과 위계에 비해, 그 재능과 가능성은 터무니없이 거대했고.
그의 몸을 살펴보게 된 누군가는 레녹의 비밀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레녹은 그동안 신분을 비롯한 자신의 신체정보를 철저하게 은폐하고 관리해 왔지만, 이제는 사정이 좀 달랐다.
‘그래도 반의 이름이라면 부담은 훨씬 덜하겠지.’
견뢰가 최소 8레벨에 준하는 고위계 마법사라는 사실은 이미 이 도시에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
만약 반의 이름으로 건강검진을 받았다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큰 소란으로 번질 가능성은 낮다.
처음 이 거리에 발을 내디뎠을 때와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레녹 본신의 힘과 위상은 물론이고, 연을 맺은 거대 세력들, 다양한 조력자들의 존재.
그들이 언제까지고 미온적인 조력자로 머무리라 믿지는 않지만, 반이라는 신분의 위상을 공고하게 만들기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의료시설들에 예약을 넣을까요?]그런 레녹의 의중을 확인한 다비가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면서 물었지만, 레녹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가능하다면 제니의 연락을 기다리는게 좋겠지.”
[어차피 그 브로커가 구해다주는 건 죄다 무면허 돌팔이일 게 뻔하다구요.]“무면허라도 상관없으니 실력이 확실한 사람이 우선이야. 오히려 음지 쪽에서 사람을 구하는게 보안 면에서는…… 잠깐, 뭐하는 거야?”
레녹이 손안에서 멋대로 움직이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저번에 갔던 정령 클리닉을 예약하려고 한 건가? 그쪽 수의사가 진찰대 위에 인간이 앉아 있으면 기겁을 하겠군.”
[그, 혹시 모르잖아요.]“뭘?”
다비가 슬쩍 레녹의 눈치를 보고 중얼거렸다.
[마스터한테도 사실 숨겨진 꼬리가 달려 있을지도…….]“…….”
다비가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하던 레녹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클리닉에 한번 더 가고 싶다면 언제든 이야기해. 그런데 투자하는 비용을 아낄 생각은 없으니까, 또 억지로 숨기고 있지 말고.”
[아니, 제가 말한 건 그런 느낌이 아니라.]“추가적인 능력 발현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리스가 돌아온 다음에 연구를 해보자. 그러고 보면 고위계 정령술사 중에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령과 몸을 융합한 천재들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있었지.”
[……제 말을 들을 생각이 없죠?]다비가 그렇게 말하며 콧방귀를 끼려던 그 순간.
끼이익……!!
셰이크를 내려놓고 일어선 레녹의 눈앞에서 누군가가 굴러떨어져 지면 위로 쭉 미끄러졌다.
시뻘건 혈흔을 보도 위로 점칠하며 미끄러진 사람이 허둥지둥 일어나 도망치려던 그 순간,.
바로 뒤에서 나타난 다른 길쭉한 인영이 그대로 그것을 낚아채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쾅!!
“크학……!!”
“어딜 도망치려고. 그걸 마시고 멀리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나?”
차갑게 뇌까리는 청년의 목소리에, 도망치던 사람이 소리쳤다.
“씨, 씨X…… 난 몰랐어!! 그 새끼들이 나한테 억지로 그걸 먹인 것뿐이라고!!”
필사적으로 발악하면서 청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인영의 모습.
눈앞에서 뻔히 벌어진 소란에도 불구하고 레녹은 심드렁하게 빈 잔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반도, 빅터의 얼굴도 아니다.
레녹의 신분으로 귀찮은 일에 끼어들었다가는 추후 수습하기 어려워진다.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자리를 떠서 의료기관에 대한 정보를 수습하기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열려던 그 순간.
[어라, 마스터?]다비가 어리둥절해 하며 저기서 발버둥치는 무언가를 앞발로 가리켰다.
[저 사람한테서 마스터가 가진 거랑 비슷한 단말신호가 뜨는데요?]“뭐?”
[해독코드 라얀 아이터. 브로커의 술집에서 일하는 혈법사의 단말이에요.]“…….”
그제서야 다비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 레녹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소년의 모습에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지금와서 보니 핏물을 뒤집어쓴 얼굴도 눈에 익다.
단말까지 라얀의 것이라면 거의 확실할 텐데도, 그럼에도 저 소년이 라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레녹의 마력감지와 감응력으로 한번 기억한 생명반응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그럼에도 라얀 아이터의 반응을 레녹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라얀의 생명반응이 못 본 사이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변질되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혈마법을 다루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던 라얀이 다른 무언가로 변해 버렸다면 거의 틀림없이…….
“……흡혈귀가 된 건가?”
[가장 최근에 기록된 데이터에 비해 신진대사가 80% 감소했어요. 근처 센서에 측정된 체온은 15.4도. 혈류속도 413.33% 증가. 마력량은 12% 감소했네요.]다비는 레녹의 말에 직접 대답하지 않았지만, 정령이 전해준 그 자료는 다른 어떤 대답보다도 확실한 정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흥미롭군.”
오래전의 의뢰 때문에 라얀을 만나서 그를 프리랜서 일에 끌어들이긴 했지만, 설마 못본 사이에 흡혈귀가 되어 있을 줄이야.
레녹은 라얀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보다는, 그가 흡혈귀가 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안 그래도 요즘 레녹 자신의 신체와 혈액에 대한 테마에 집중하고 있던 찰나.
마침 이 시점에서 마담이 오래전에 전해주었던 편지 한장이 생각나는것은 과연 우연일까.
라얀이 정말 완전히 다른 종족으로 다시 태어났다면, 그 전말을 한번쯤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레녹은 얼굴에 손을 가져다대며 다비에게 말했다.
“제니에게 따로 연락해서 상황 알려줘. 필요한 정보 있으면 갖다달라고 하고.”
[흡혈귀 퇴치방법에 대한 저술자료가 649건 등록되어 있는데, 지금이라도 브리핑 해볼까요?]“필요없어.”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한발 앞으로 내디딘 순간, 어깨를 감싸고 새카만 코트가 쭉 떨어져 내린다.
마력을 회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기를 타고 전율하는 뇌전의 광채.
파지지지직……!!
“두들겨 패다 보면 알아서 다 불어줄 테니까.”
실로 오랜만에 손끝에서 피워올린 전광을 보며 레녹이 씩 웃은 그 순간.
키릭, 키릭……!!
느닷없이 레녹의 품 안에서 그 마력을 고스란히 흡수한 흑색 입방체, 펜터렉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