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62
약먹는 천재마법사 562화
자문자답(4)
누군가의 기억을 엿보는 것은 레녹에게 있어서 처음이 아니다.
그것이 자의였든 타의였든, 이미 흘러간 시간을 지켜보는 일은 익숙했다.
멀쩡하게 의식은 깨어 있으면서도, 느릿하게 흘러가는 강물 사이에 몸을 내맡긴 것처럼 흐물거리는 감각.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면서도 정작 감각은 기억 저편을 향하는 알 수 없는 기시감.
하지만 설마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 본인이 이런 식으로 스스로의 기억을 직접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칠채보의 마안을 각성하고 그 힘을 손에 넣은 그 순간, 그녀 스스로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을 손에 넣기라도 한 것일까.
“…….”
생각에 잠긴 사이 눈앞에 펼쳐진 카이세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싸구려 커피를 들고, 낡은 가운을 걸친 채 떠들썩하게 레녹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카이세는 언제나 그런 사람들의 한복판에 서서, 매번 다른 사람과 활발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레녹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카이세의 외견이 레녹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늙어 보인다는 사실일까.
희끗희끗한 머리와 숨길 수 없는 주름살, 덥수룩한 수염과 노회한 시선까지.
틀림없이 과거의 올리비에라 그녀 자신의 기억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카이세의 외견은 레녹이 기억하는 것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카이세 바쥬르가 아주 오래전부터 답을 찾아 헤매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멀어지는 카이세의 뒷모습을 보며, 레녹이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그 모습을 직접 본다고 딱히 무언가를 알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마치 그 질문에 반응이라도 하듯, 시간의 흐름은 계속해서 빨라져 갈 뿐.
레녹의 눈앞을 다시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
하지만 카이세를 둘러싼 이들의 숫자는 어느새 조금씩 줄어들어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없어진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실패에 대한 비관으로, 결말에 대한 절망으로.
그에게 화를 내고, 눈물을 터트리며, 애원하고 용서를 빌며, 끝내는 생명을 다해서.
곁을 지키는 가족과 친구, 연인이 사라질 때마다, 카이세의 얼굴에 드리운 웃음은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연구원과 동료들은 어느새 나이를 먹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지만.
반대로 카이세의 얼굴에 남아 있던 주름은 조금씩 없어져 간다.
희어 있던 머리는 검게 변하고, 굽어 있던 어깨가 곧게 펴지며,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 계속해서 젊어져 간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걷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
레녹이 그 의미를 깨닫고 숨을 살짝 들이켠 그 순간, 올리비에라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얼마 안 남았군.]“뭐……?”
대답은 없었다. 대신 카이세를 비추는 시간의 속도가 천천히 느려져, 현실과 가까운 속도로 돌아왔을 뿐.
열의에 차 연구를 지속하던 카이세는, 이내 연구실 한구석에 처박혀 머리를 숙이고 있는 일이 많아졌다.
수북이 쌓여 있던 논문과 연구자료에는 먼지가 쌓이고 함께하던 이들 역시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지지만
카이세는 아직 남아 있었다.
마치 그 스스로 시간을 거꾸로 걷기라도 하듯, 이전보다 훨씬 젊어진 듯한 남성의 얼굴로.
레녹과 처음 입자 발전소에서 대면했던 그 날처럼.
[…….]홀로 남은 카이세가 멍한 표정으로 고요한 연구실을 둘러본다.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있던 논문까지 내려놓고, 허리를 펴고 일어선 그가 레녹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물끄러미 레녹이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다, 이내 공허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 남아 있었군, 올리비에라.]“…….”
[정말로 도움 한 번 없이 내 실패를 구경하기만 할 줄은 몰랐지. 어때, 이제 좀 속이 후련해?]틀림없이, 올리비에라는 이 시점에 무어라 카이세에게 대답을 건넸겠지.
하지만 그녀의 대답이 들리는 일 없이, 카이세는 그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말을 이어나간다.
[그래, 그 말이 틀리지 않지……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새로운 후견인을 찾았다.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어딘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야. 아니, 그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표정이 살짝 흐려졌던 카이세가 이내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그곳을 토대로 삼아 마지막으로 프로젝트를 구성할 생각이다. 어때, 관심 있나?]그 순간, 지금까지 들리지 않던 올리비에라의 대답이 들리기 시작했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이름?] [세계를 바꾸겠다 말하면서, 계획의 이름 하나 생각해 두지 않은 것이냐?]카이세가 턱을 매만지며, 초췌한 기색으로 생각에 잠겼다.
[딱히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데…… 따지자면 우리는 결국 멸망 너머의 존속이라는 억지를 부리는 입장이니까. 세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진상 손님에 가깝지.]“…….”
그 순간, 웃는 얼굴의 카이세가 레녹의 눈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기억의 재생이 끝나버린 그 이질적인 풍경의 끝.
[프로젝트의 이름은 블랙컨슈머.]레녹의 등 뒤에서 올리비에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는 수십 년 전부터, 허락되지 않은 자격과 권리를 꿈꾸며 억지를 부리고 있었지.]“…….”
레녹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일곱가지 광채를 번뜩이는 마안을 손에 넣은 올리비에라가, 형형한 시선으로 레녹을 조용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심경의 변화…… 라기에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군. 처음부터 이걸 위해서 날 기다리고 있었어.”
레녹이 물었다.
“지금의 당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아직 모르겠군. 이 기억을 내게 보여준 이유가 뭐지?”
[글쎄……. 하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올리비에라는 가만히 시선을 들어 거대한 연구실의 공동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동시에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정답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나는 너를 통해, 인과에 간섭하기 위해 새로운 가능성을 개안한 것이다.]“…….”
그 비정상적인 확답에 레녹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는 지금 레녹이 보여준 마안을 통해 영감을 얻고 칠채보의 마안을 각성했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디 수십 년 뒤에야 위계 하락을 감수해가며 손에 넣어야 했을 칠채보의 마안.
단지 그 힘의 편린을 미리 목격하고 확인한 것만으로, 그 시간을 뛰어넘어 정답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녀가 지닌 재능과 역량이 규격을 뛰어넘은 괴물의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 단서만으로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낼 줄이야.
하지만 레녹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내심 자신의 결론을 부정했다.
‘아니, 그게 아니군…….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거야.’
레녹이 개안한 오른눈의 마안은 칠채보의 마안을 본떠 여러 가지 이능을 수납할 수 있게 만들어진 마안.
인과를 폭주시키는 능력은 틀림없이 강력하고 이질적인 힘이지만, 어디까지나 본질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래의 올리비에라가 지닌 칠채보의 마안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 역시 사실.
올리비에라는 그 마안을 미래의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힘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마안을 각성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미래의 그녀가 언젠가는 찾아낼 가능성이기 때문에, 지금의 그녀에게 보여준 것만으로 성장을 말도 안 되게 가속화시켜 버리고 만 것인가.
하지만 올리비에라는 스스로가 손에 넣은 힘의 가치를 알면서도, 칠채보의 마안으로 레녹을 죽이려 들지는 않았다.
대신 물끄러미, 카이세가 사라진 연구실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올리비에라가, 자조하듯 코웃음을 쳤다.
[하, 여기까지 와서 유약한 감상 따위에 잡아먹히다니…….]힐끗 레녹을 바라본 카르텔의 회장이, 이내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팔짱을 낀 채 멈춰선 그녀가 베일을 젖히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거울벽을 따라 걷다보면 출구가 보이겠지. 카이세에게 가는 길은 저쪽이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방금 전까지 레녹을 붙잡아놓기 위해 그렇게 공을 들였으면서, 이제 와 아무런 미련이 없어진 듯한 그녀의 태도.
칠채보의 마안을 활용한 인과조작으로 레녹을 죽이려 들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카이세와의 기억을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순순히 레녹을 보내주려는 그 태도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올리비에라는 그 말에 잠깐 침묵하다, 이내 날이 선 음색으로 냉소했다.
[칠채보의 마안을 손에 넣는 순간,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이 마안을 각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이 눈으로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니 알 수 있구나. 이 능력과 발상은, 지금의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 인과의 결실이다.]그렇게 말하는 올리비에라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프로젝트의 실패를 직접 지켜보지 않고서는……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의 산물이지…….]“설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레녹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올리비에라는 순전히 스스로의 연구만으로 칠채보의 마안을 개안했던 것이 아니다.
그녀가 마안을 개안하고 계통을 바꾼 것은, 프로젝트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카이세가 죽음을 맞이한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인과에 개입하는 힘을 지닌 칠채보의 마안이기에, 그 눈을 습득한 계기조차 알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올리비에라는 그를 통해 자신이 마안을 개안한 사유 자체가, 지금 이 시공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직 실패하지 않은 프로젝트가 실패한 뒤에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마안의 힘.
그 어긋난 시간의 괴리 사이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은 오직 하나뿐이다.
[의심할 만한 부분은 충분히 있었지. 이 시점에 너와 같은 강자들이 라마할 구역에 나타나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인 일. 내전으로 치열한 전장의 상황을 생각하면, 애초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언동과 행적, 시대상에 어긋난 기술과 전투능력. 그 모두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미래 저편에서 도달한 것이라면 납득할 수 있겠지.]올리비에라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조용한 전성으로 말했다.
[나 자신이 과거에 남겨진 존재이자, 그 일부라는 것 역시…….]카이세처럼 곧바로 진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니지만, 올리비에라는 레녹과 싸우는 와중에도 간간이 느낀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모인 어색함과 이질감을 흘려넘기는 대신, 하나씩 기억하고 그러모아 끝내 이 순간에 완벽한 정답을 찾아낸 것이다.
수동적으로 지금 당장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대신, 머릿속 한편에 쌓인 단서들을 통해 부정하고 싶은 진실에 도달한다.
비록 그 끝에 놓인 것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딜 수 없는 결론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갈 만큼, 강인한 마음과 정신력을 갖추고 있었다.
[시간의 상대성은 곧 절대성. 서로 다른 시간선에서 살아갈 수는 있지만, 이미 지나온 시간선에서 마주한다면 둘 중 하나는 가짜일 수밖에.]올리비에라가 웃음기 어린 음색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진실이고 누가 거짓인지는 명백하지 않겠느냐.]“……그 사실을, 당신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카이세는 그 사실을 일찌감치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올리비에라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몸을 틀어 비켜섰다.
마치 레녹에게 길을 열어주려는 것처럼.
[그건 결국 우리의 존재로서 의미를 남기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 존재하기 때문일 터.]스스로의 표정을 감추려는 듯, 베일을 뒤집어쓴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놈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것만이 거짓에 가까운 이 시공에서 다음으로 향할 유일한 방법이라면…… 나는…….]“…….”
그 말은 옳지 않다.
그녀 역시 진짜 올리비에라이기에, 한때는 틀림없이 진실된 시공에 존재했던 올리비에라 자신이기에.
그렇기에 자신이 과거의 시공에 괴리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에 숨겨진 모순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각오.
그것은 한때 프로젝트를 위해 성심을 다하던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 본인에게도 틀림없이 존재하던 진실된 마음.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을 말해주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걸음을 돌렸다.
이제 와서 그런 말로 올리비에라를 위로해 주어봤자, 하등 의미 없는 일일 뿐.
그녀 역시 그런 동정을 바라지는 않겠지.
쩌저적……!!
거울의 장벽 사이로 균열이 퍼져나가며, 그 너머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마 그녀의 심상영역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출구.
[아마 넌 미래의 나와도 어느 정도 연을 유지하고 있겠지.]말없이 올리비에라를 바라보던 레녹이 등을 돌리고 발을 걸친 그 순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네 마안은 그 사실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성립될 수 없는 인과의 결실이다.]“그건…….”
얼굴을 가린 베일 너머로, 올리비에라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의미 없는 일이군.]“…….”
[수십 년 뒤의 나라면, 틀림없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을 테니까.]파아아앗!!
동시에 거울의 시공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부서진 거울의 파편들이 올리비에라의 육신 위로 쏟아져 내리며, 그 모습을 완벽하게 감추었다.
쿠과과과과!!!!
순식간에 무너져 사라지기 시작한 심상영역을 말없이 바라보던 레녹이, 이내 곧바로 등을 돌렸다.
이내 거울의 미로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남지 않게 되었다.
* * *
피폭현상을 막기 위해 폐쇄구역에 들어온 이후부터, 예상할 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을 뿐.
하지만 그만큼 이 격리된 시공에 남겨진 기억은 레녹으로서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발칸 시정부가 어째서 이 구역의 존재를 기밀에 붙여 잊힌 역사 속에 격리시켜 두었는지.
어째서 이 구역에 들어온 이들 모두가 살아나가는 일 없이 기억 속에 매몰되었는지.
이제 그 답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레녹은 그럼에도 그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걷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할 수 없었던 기적의 연속.
스스로의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는 칼날 위를 걸으며,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러 가면서도.
한편으로 그를 향해 알 수 없는 친근감을 자신을 인지하고 있었다.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이다.
레녹이 걷던 길을 조금이나마 앞서 걷던 사람이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진 그 의지의 흔적만으로, 지금도 그의 이름이 도시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그가 괴로워하고 갈망하던 고민과 소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고 느꼈기에, 레녹은 이곳에 있다.
콰아아아아!!!
직경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발전소 배출구.
거대한 탑처럼 보일정도로 장대한 크기. 그 끝에 위치한 환기구 옥상.
환기구 정상에서 솟아오른 눈부신 광채가 흐릿한 하늘 위로 내달리며 거대한 빛의 기둥을 그리고 있다.
마치 발전소의 배출구를 포신으로 삼아, 에너지를 통째로 발사하는 듯한 장관.
빛의 기둥 한복판에는, 거대한 꽃잎처럼 활짝 펼쳐진 시공간 고정장치의 형상이 비춰졌다.
그리고 그 빛의 끄트머리에 걸터 앉아 이쪽을 내려다보는 흑발의 청년.
“기다리고 있었다, 반.”
카이세가 웃고 있었다.
“너라면 금방 찾아올 줄 알았지.”
“…….”
“고정 장치의 동력 수급을 감당할 정도로 막대한 화력이 모이는 장소는 지하 동력실과 최상층 화력 배출구뿐이거든.”
장치 위에서 천천히 걸어내려온 카이세가 레녹을 보며 말했다.
“회선을 연결해서 작동을 유지시키는 건 어렵긴 했지만, 발전소 내부 시설을 잘만 조작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대답하지 않는 레녹을 보며 카이세는 배출구 탑 외곽을 따라 걸었다.
수십미터 저편으로 내려다보이는 폐허가 된 입자발전소의 풍경.
저 멀리에서 연달아 굉음과 충격파를 터트리는 유령함선과, 새하얀 신형의 격돌.
후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절삭음과, 정문 공터를 등지고 터져 나오는 폭발까지.
“이상한 일이지.”
카이세가 말했다.
“입자 발전소가 이렇게 시끄럽고 또 무너져가는데, 아무도 돌아올 생각을 안해.”
“…….”
“전선에 나가 있는 동료들과도 연락이 닿지 않지. 기척도, 흔적도 느껴지지 않아. 발전소 내부의 이상현상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카이세는 그렇게 말하다, 이내 말을 끊고 한참을 침묵했다.
어딘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지상을 굽어보던 카이세가 물었다.
“올리비에라는 어땠지?”
“알고 있더군.”
레녹이 대답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그렇군.”
카이세가 웃었다.
“강한 사람이야. 항상 그랬지만, 매사에 초연한 그 모습에 내심 위안을 받았던 걸지도 몰라…….”
“…….”
“모든 것을 설명해 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렇게 말한 카이세가, 레녹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내린 결론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 괜찮겠지?”
“시간은 충분한가?”
“그것까지 포함해서.”
“……좋아.”
그 순간, 카이세가 레녹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