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13
약먹는 천재마법사 713화
빈집털이(6)
중앙전선 외곽. 데드라이즈 후방 보급부대.
위성 제작 작전이 시작되기 며칠 전.
발칸으로 떠나기 하루도 채 남지 않은 시점, 스탁턴은 부대로 복귀해 누군가를 만날 약속을 잡았다.
“데이머스 님.”
“왔군. 일단 앉지.”
스크린이 은은하게 빛나는 어두운 방 안.
데이머스는 스탁턴을 돌아보지도 않고 의자를 가리켰다.
스탁턴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자, 그제서야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몸을 돌린다.
피곤한 기색으로 미간을 문지른 데이머스가 물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나? 좀 더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을 텐데.”
“출정 전에는 즐길거리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스탁턴이 담담하게 대답하자, 데이머스가 픽 웃었다.
“그리스번의 밑에선 가장 근면한 편이라더니 소문대로군.”
“오히려 지휘관님께서 후방에 와 계시는 것이 무척 드문 일이라 생각됩니다만.”
스탁턴이 눈을 빛냈다.
“사령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데이머스는 데드라이즈 전 부대를 통틀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현장 지휘관들 중 하나.
중앙전선에서도 가장 유지비용이 높은 특수기동 6군단을 지휘하고 있어, 후방에는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오늘 이 만남이 이루어진 것 자체도 순전히 작전 시작 전에 데이머스가 후방에 빠져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스탁턴이야 본격적으로 발칸에 파견되기에 앞서 숙련된 지휘관에게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좋은 일이지만.
지금 데이머스가 이렇게 후방에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 긍정적인 신호는 아닐 터.
하지만 스탁턴의 질문에 데이머스는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인 일 때문이라 해두지. 따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실없는 소리는 됐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자. 그걸 묻기 위해 날 찾아온 건 아닐 텐데?”
데이머스가 그렇게 말하며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스크린 화면이 켜지며 누군가의 프로필이 비치기 시작했다.
“원래 발칸 쪽은 내 관할이 아니지만, 최근에 전선 바깥에 존재하는 위험인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기회가 있었지.”
데이머스가 그렇게 말하며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대룩 사방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변수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부류를 꼽자면 이 자가 가장 필두에 위치해 있을 거다.”
삑!
누군가의 프로필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 프로필 란에 적혀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사진도 없는 공허한 빈칸. 암호문으로 적혀 있는 여러 문자들도 간간이 비워져 있고.
오히려 가장 아래쪽 특기사항에 빼곡하게 무언가가 적혀 있을 뿐.
“견뢰. 고작 이것이 현재 발칸에서 가장 호전적인 마법사를 상대로 파악된 정보의 전부다.”
데이머스가 그것을 보며 설명했다.
“이름, 출신, 나이처럼 확인이 불가능한 정보들을 제하고, 교차검증을 통해 파일링이 끝난 특기사항은 다음과 같지.”
데이머스가 곧바로 프로필 가장 아래쪽 특기사항을 가리키며 말했다.
“순수술식계 마법사. 전투특화 전격계통 사용자. 극도로 희귀한 다중속성 보유자. 8레벨의 극위능력자. 선천이능 마안보유자.”
“으음…….”
듣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단어들의 연속.
그 마법사를 수식하는 말 하나하나가, 전선에서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뿐이다.
데이머스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격술에 조예가 있는 데다, 바이크를 비롯한 장비 조작능력도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첨단 기술에 거부감이 없는 수준을 넘어, 전문가보다 그 영역을 잘 다루는 것으로도 추정된다.”
“…….”
“하지만 견뢰의 진짜 가치는 그런 부차적인 능력이나 재능에 있는 것이 아니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는 스탁턴에게 데이머스가 말했다.
“지금껏 견뢰의 마법체계에 대해 알아내려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정보를 얻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관련된 작전 생존자가 극도로 적은 탓에 유출되는 정보의 수준 역시 마땅치 않지.”
“…….”
“쌓아온 실적과 고과, 지난 몇년간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지독하리만치 전투에 몰두한다는 사실만을 짐작할 수 있을뿐…… 함께하고 상대했던 이들의 출신이나 성향이 모두 달라서 의중을 판별하기 어려워.”
데이머스가 리모컨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마키나에서 큰 부상을 입고도 그만치 난리를 피웠을만큼, 심성과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자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접촉을 피하고, 자극하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겠지.”
“작전 중 조우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스탁턴 역시 가능하다면 견뢰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이번 작전 자체가 음지에 해당하는 59구역에서 진행되는 만큼, 견뢰의 활동반경을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한 바.
행동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그 마법사가 언제 자신들을 눈치채고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다.
행여나 견뢰를 마주치게 되었을 때, 그를 상대해 무사히 빠져나올 수단이나 대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데이머스는 그런 스탁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중령. 8레벨에 이른 대마법사가 피에 미쳤다는 소문을 달고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라 생각하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전투와 피에 몰두하는 심성을 기반으로 삼아 위계를 초월한 시점에서, 이미 갱생의 여지조차 없는 광인에 가깝지.”
데이머스가 시선을 돌렸다.
“따라서 견뢰와 조우했을 시 정상적인 대화가 성립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설령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가 받아들이는 의미는 전혀 다르겠지.”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한 스탁턴이 혀를 내둘렀다.
“같은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군요. 그 정도 심성으로 아직까지 그 마경에서 살아 있는겁니까?”
“본디 양립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를 어기고도 멀쩡히 살아 위계를 초월한 자다.”
데이머스가 무심히 대답했다.
“온갖 괴물과 천재들을 적으로 만들고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상리를 초월한 재능이 그곳에 있기 때문아니겠나.”
“…….”
나지막이 숨을 삼키는 스탁턴의 반응.
그만큼 데이머스는 견뢰가 미쳐 있다 단정하면서도, 반대로 또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일까.
표정이 살짝 흔들리는 스탁턴을 두고 데이머스가 스크린을 껐다.
“견뢰를 포함해 발칸 음지에서 활동하는 고위계 초인들의 프로필을 보내주지. 추후 그리스번에게도 공유해 줄 수 있도록. 어차피 읽어보지도 않겠지만.”
“감사합니다.”
데이머스는 고개를 숙이는 스탁턴을 무표정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변수를 대비하려 하는 자세는 훌륭하지만, 우선순위를 착각하지 않도록 해라.”
“우선순위 말씀이십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데이머스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답했다.
“파일링된 정보를 공유해 준 것은 견뢰를 상대하거나 공략하라고 준 것이 아니야. 조우한 시점에서 작전을 염두에 두지 않는 편이 좋겠지.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중요한 것이라면……”
“내가 지휘관으로서 현장에서 가장 우선시 여기는 덕목이지.”
데이머스는 스탁턴을 바라보다, 미련 없이 방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살아남는 것.”
* * *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아무리 충고를 듣고 대비한다 해도, 최악의 가능성이란 언제나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나쁘게 다가온다.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회상이 저물기도 전에, 스탁턴의 오른발이 통째로 으깨졌다.
으지지직!!
균형이 무너진 대검이 빗나가 참격을 저 멀리 헛날리는 순간, 충격파에 휩쓸린 듀렌이 뒤로 튕겨 나가 처박혔다.
콰아앙!!
“크학!!”
“……!!”
어깨가 반쯤 함몰된 듀렌이 제대로 일어서지 못한 채 경련하고, 한쪽 발이 뭉개진 스탁턴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삼켰다.
다친 곳을 손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두 사람의 모습.
그런 두 사람의 시선 끝에, 듀렌이 쏘아 올린 불꽃의 회오리가 몰아치며 지상을 녹여 내렸다.
화아악!!
작열의 회오리를 커튼처럼 태연하게 헤치고 걸어나오는 마법사의 모습.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주변을 둘러본 레녹이 웃었다.
“둘 중 하나만 살려둘 생각이었는데, 마음처럼 잘 안되는군.”
스탁턴이 그 말에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괴물이……!!”
위계를 완성한 고위계 초인 둘. 그것도 금기병장으로 무장하고 호흡을 맞춘 이들이다.
금기병장의 효과로 마력을 계속해서 공급받으며 제한 없이 소우주를 휘두르고 있다.
이 정도로 낭비와 효율을 고려하지 않고 싸워본 전투는 스탁턴과 듀렌 역시 거의 없을 정도.
그럼에도 홀로 저편에 서서, 제한된 마력을 휘두르는 저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이 고작.
오히려 점차 열세에 빠져가는 전황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크, 흐악……!!”
으직!!
주저앉은 어깨뼈를 맨손으로 끄집어내 맞추는 듀렌과.
대검의 불길을 망가진 오른발에 붙여 지혈하는 스탁턴의 모습에 레녹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친 방법을 쓰는군. 지혈제 정도는 던져줄 수 있는데.”
“아까 당신에게 지껄였던 말. 전언 철회하지.”
스탁턴이 무거운 눈빛으로 레녹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선택하는 사람이군.”
“…….”
셀 수 없는 전장을 거쳐온 그들이기에, 레녹이 보여주는 무위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인지하기 전부터 쌓아 올린 노력과 연습의 결과물이 그곳에 있었다.
주고받는 공방 사이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경험과 시간이 여지없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레녹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해 도달한 자라는 사실을, 그들 역시 깨닫고 있던 것이다.
“운명을 선택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으직!!
뭉개진 오른발로 강하게 지면을 내디딘다.
발끝에서 시작된 고통이 척수를 타고 치닫아 뇌리를 저릿하게 흔들지만, 스탁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죽을지 정도는, 나 역시 선택할 수 있어!!!”
쾅!!
뭉개진 오른발로 한 번, 멀쩡한 왼발로 한 번.
두 번을 박찬 스탁턴의 전신에 작혼의 불길이 달라붙으며 공간을 짓누르는 거압으로 변했다.
살아남는 것.
결국 데이머스의 조언을 무엇 하나 지키지 못했지만, 스탁턴은 일이 이렇게 된 시점에서 결말을 직감하고 있었다.
데이머스 역시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기에 언질을 주었을 뿐, 실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병단에 입적해 군인으로서 살아온 매사가 그러했다.
레녹은 스탁턴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이군. 이해한다.”
한 손을 들어 올린 레녹의 손끝으로, 차가운 냉기가 동시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빙결계열 고유마법
성질변화 초과부하
[죄백(罪白)]쩌저저적!!
작혼의 불길과 죄백의 한기가 엇갈려 폭발해, 지상 위에 붉고 하얀 꽃을 피워 올렸다.
“허억……!!”
온몸을 새하얀 서리로 뒤덮은 채 뻣뻣하게 굳어버린 스탁턴의 모습.
흘러나오는 피를 비롯해 혈류의 흐름까지 얼려 붙여 그 움직임을 억누르는 구속.
레녹이 손목에서 염주의 형태로 이뤄진 정토신해진언을 빼내, 스탁턴의 목에 걸어 넣으려던 그 순간.
파아아아앗!!
“아직, 아직 안 끝났다……!!”
제 살을 태워 먹는 불길을 손에 쥔 채로, 필사적으로 수인을 맺는 듀렌의 모습.
발아래서 꿈틀대는 무채색의 파문을 바라본 레녹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영역이군.”
한번 작혼을 빼앗긴 듀렌이 다시 그것을 쥐고 있을 리는 없으니, 자기희생을 담보로 한 자성영역 전개.
듀렌의 마법을 생각하면 강력한 신기루 환술을 사용해 레녹을 이 자리에 묶어둘 생각이겠지.
“나는 인신공양이 얼마나 비틀린 술식인지 알고 있다. 인간을 재료로 삼는 것만으로도, 술자의 통제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변하기도 하지.”
지팡이를 발아래 꽂아두고, 왼팔의 붕대를 매만지며 레녹이 말했다.
“때론 술자가 죽은 뒤에도 작동하며, 스스로 살아 있는 것처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이제와서 내 마법이 경계된다고 지껄일 생각이냐!!”
“아니.”
날선 어조로 말을 끊는 듀렌의 반응에, 레녹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너를 죽일 기회가 몇번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는 거지.”
“……!!”
“행여나 신기루 술식이 폭주하는 바람에 주변의 광각이 꼬여서, 공장의 위치를 제때 포착하지 못한다면 낭패라고 생각했거든.”
“그게 무슨 오만한……!!”
“그러니까.”
레녹이 왼손을 들어 올려 듀렌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성영역은 허락하지 않겠다. 이제와 다시 신기루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차륵!!
팔뚝에 묶여 있던 붕대가 풀리는 것과 동시에, 붉은빛의 파동이 시공을 관통했다.
단순히 달아오르는 열기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화염을 팔에 매여둔 형상.
형태는 달라졌지만,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봉황전의 진체라는 것을 깨달은 듀렌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 그 순간.
화르르륵!!
듀렌의 발아래서 회전하던 무채색의 파동이, 이내 그 움직임을 멈추고 거꾸로 염주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이, 이게 무슨!!”
영역전개 영창을 타의에 의해 강제로 취소당하는 반동이 온몸을 내달린다.
전신의 피가 거꾸로 뒤집히고, 혈압과 마력회전이 급격하게 높아지며 모공에서 피를 내뿜었다.
“타, 탑주…… 권한…… 끄륵……!!!”
급격한 혈압 변화를 이기지 못한 듀렌의 신체 곳곳이 망가지고, 그 여파가 순식간에 심장까지 거꾸로 내달렸다.
영역전개가 취소당한 반동으로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춘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듀렌의 몸이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은 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오오오……!!
얼어붙은 스탁턴. 찢겨나간 솔시어. 숨이 멎은 듀렌.
레녹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스탁턴을 향해 걸음을 옮긴 그 순간.
쐐액!!
저편에서 새하얀 물체가 날아와 스탁턴을 가둬둔 얼음덩어리를 그대로 박살 내버렸다.
콰아아앙!!
“…….”
점멸로 그 공격을 피해낸 레녹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그 투척, 어지간한 반응으로는 피할 수 있는 속도와 궤적이 아니었다.
얼음을 노리기보다는 레녹의 반응을 확인하려 한 듯한 범상치 않은 일격.
레녹이 그것을 깨닫고 시선을 들어 올린 순간, 안개 저편에서 싸늘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너무 늦었군.”
[크르르르……!!!]동시에 레녹의 발치에 쓰러진 새하얀 물체에게서 터져 나오는 괴성.
“메릴다.”
새하얀 갈기 군데군데가 찢어져 피를 흘리는 거대한 늑대의 형상.
아직 투지를 잃지 않고 눈을 형형히 빛내고는 있지만,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듯한 모양새.
마치 누군가와 한창 싸우다 강제로 튕겨 나온 것처럼, 곳곳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다.
하지만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메릴다의 시선은 안개 저편을 향해 또렷이 고정되어 있었다.
화악!
그 적의에 응답하듯, 안개를 스치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여성의 모습.
이렇다 할 특별한 인상은 없으나, 그 표정만큼은 냉엄하다 못해 섬찟하다.
말없이 주변을 둘러본 여성이 스탁턴과, 듀렌. 그리고 처참하게 죽어 있는 솔시어의 시체를 보고 웃었다.
“다들 날 빼고 아주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나 본데, 안 그래?”
“쿨럭, 쿨럭!! 소장님…….”
부서진 얼음 사이로 쓰러진 스탁턴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에……!!”
“아니, 죄송할 것까지야.”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툭 던졌다.
“끄륵…….”
메릴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피투성이가 된 무언가.
간신히 숨을 내쉬고만 있을 뿐인 그것이 늑대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레녹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피범벅이 되다 못 해, 죽기 직전까지 으스러져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킬리안의 모습.
쓰레기처럼 킬리안을 던진 여성이, 레녹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쳤다.
“미안해야 할 건 오히려 내 쪽이지. 하등 단순한 도발에 넘어가,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했으니까.”
“…….”
대답하지 않는 레녹을 두고, 여성의 시선이 더 강해져만 간다.
여성 역시, 이 자리에 나타나기 전부터 레녹이 누구인지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47구역 카지노에서 즐겼던 잠깐의 여흥.
대답조차 듣지 않았던 약속.
사소한 일로 흘려넘겼던 그 모든 기억들이 한데 모여, 지금의 이 파국을 이루었다는 사실까지.
“그래. 슬롯을 당기던 강운, 봐줄 만한 대전실력, 마음에 들었던 배짱까지…… 모두 이유가 있었단 말이지.”
씹어뱉듯이 중얼거리는 여성의 등 뒤로, 희끄무레한 형체가 휙휙 스쳐 지나간다.
잠깐의 감정 동요 사이에 귀신이 들렸다 사라지는 듯, 기이한 한기와 귀곡성이 울려 퍼지고.
이 자리의 모두를 얼어붙게 할 만큼 사늘하고 한적한 바람이 불었다.
휘오오오오!!
한 손으로 어깨를 매만진 그녀가 천천히 목을 풀었다.
“자리를 옮기지, 견뢰.”
푸른 영체의 형상을 등 뒤로 떠올린 여성이 히죽 웃었다.
“그때 카지노에서 못다한 승부. 오늘 내기로 결정했잖아?”
8레벨의 육체능력자, 귀희(鬼姬) 페이샤 그리스번.
승부를 핑계로 카지노에 발을 묶어두었던 괴물이, 작전이 끝나지 않은 이 시점에 돌아온 것이다.
“……괜찮겠나?”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페이샤와 정면으로 대치한 레녹이 냉소했다.
“여기선 패배해도 게임을 이어나갈 코인 따위는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