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31
약먹는 천재마법사 731화
마법사와 마탑(8)
[루시포스 필리온. 발칸 원로원 2서기장. 전직 혈려서기 관리직.]혈려서기의 페이지 위로 피로 물든 문자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아무런 감정이나 동요도 없이 쓰인 메시지는, 루시포스라는 인간에 대한 기록을 가감 없이 두 사람 앞에 드러내고 있었다.
[마키나 기록관 95차 커리큘럼 차석 수료. 발칸 설립 초창기 공식문헌 기록과 관리를 도맡아 처리. 35년간의 재직을 끝내고 은퇴.]“이, 이게 어떻게……!!”
동요를 감추지 못해 입술을 떠는 루시포스를 두고,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페이지를 응시했다.
혈려서기는 역대 관리인들에 대한 정보가 접근 불가능한 종류라 설명했음에도, 그를 무시하고 레녹이 명령을 입력한 이유.
그건 예전에 레녹이 카이세의 시신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당시, 이미 관리인에 대한 인적 사항을 받아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정보라 해도, 승천자로 대우받는 레녹의 혈액이라면 허락되지 않은 기록도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 혈려서기를 다루어보았다는 루시포스의 자신감을 무너뜨리고, 그 지식의 저변을 낱낱이 파헤치기에는 충분했다.
“아, 안돼!!”
루시포스가 무너져내린 표정으로 수첩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장막에 가로막혀 멈춰 선다.
레녹이 바로 옆에서 실드를 펼쳐 그 움직임을 막아버린 것이다.
필사적으로 실드 표면을 두들기는 루시포스를 두고 레녹이 다음 페이지에 적힌 정보를 확인했다.
[동족흡혈을 수차례 시도하고 관련 기록을 주기적으로 남김.]“그렇군.”
그제서야 루시포스가 이렇게 혈려서기에 집착하는 이유를 깨달은 레녹이 웃었다.
“흡혈귀가 되고 싶어서 방법을 찾고 그 기록을 혈려서기에 남겼었나? 그래서 이 물건의 존재에 민감하게 굴었군.”
“…….”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다 말하면서도 모호하게 대답을 피하던 이유. 이상할 정도로 혈려서기에 대해 집착하던 그 태도.
루시포스는 애초에 프로젝트보다도, 레녹이 지닌 혈려서기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 혈려서기의 관리인으로 재직하던 당시, 자신의 태생에 한계를 느끼고 방법을 알아보았던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같은 인간인 레녹 역시 혈려서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같은 인간의 피까지 빨아 기록을 남겼을 줄은 몰랐군. 당신 같은 경력을 지닌 권력자가 그런 희망에 매달려야 할 정도로 몰린 건가?”
레녹의 회사에서 일하는 혈법사 라얀 아이터가 흡혈귀가 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일반적으로 평범한 인간이 흡혈귀가 되어봤자 진짜와 같은 장생과 영락을 누리는 것은 어렵다.
루시포스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흡혈귀가 되려 했던 것이겠지.
하지만 루시포스는 그런 레녹의 냉소에도, 어깨를 떨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질문할 차례일세. 배리어를 치워주게나.”
“그러지.”
이렇다 할 변명이나 대답을 포기한 루시포스의 말에, 레녹은 천천히 실드를 치워주었다.
프로젝트의 관계자들 모두가 고상한 의무나 사명을 위해 움직인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나 탐욕, 사적인 동기로 프로젝트에 참가한 이들도 상당했을 터.
카이세가 한 일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결코 하나로 뭉칠 수 없는 능력자들을 결말이라는 명분 아래 규합한 것에 가까웠다.
그의 사후 관계자들이 이런 식으로 뿔뿔이 갈라져 제각기 생존을 도모하고 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입을 꾹 다문 루시포스가 혈려서기에 대뜸 피로 문자를 적어넣었다.
레녹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 아니라, 혈려서기 자체에 질문하기 위한 행동.
그만큼 지금 혈려서기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의미일까.
[포혈공이 어째서 외부인에게 정보 열람을 허락한 것이지? 계약대로라면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미리 권한을 설정해 두었을 텐데?] […….]하지만 혈려서기는 루시포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대답을 늦추고 있는 듯한 미묘한 반응.
루시포스가 레녹을 기다리지 않고 재차 문자를 적어넣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루시포스의 질문에 반응하지 않는 듯한 모습.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보던 루시포스의 표정이 순간 멍하게 변했다.
“서, 설마…….”
레녹이 혈려서기를 사용하기 직전에 가장 먼저 걸어 넣었던 명령.
[자이블. 쓸데없는 수식어는 빼고 내 질문에만 대답해라.]혈려서기 자이블은 그 명령에 따라 말 그대로 레녹의 질문에만 응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기의 관리인이었던 루시포스보다도, 레녹의 존재가 혈려서기 내부에서 우선순위가 높다는 믿기 어려운 현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 루시포스를 두고, 레녹이 말했다.
“명령어 입력을 실수했군. 이걸로는 이제 문답이 어렵겠어.”
한번 입력해 넣은 기록은 혈려서기가 작동을 멈추기 전까지는 수정이 불가능하다.
이대로 루시포스가 혈려서기에 질문을 적어봤자 혈려서기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을 터.
하지만 루시포스는 그런 레녹의 말에 오히려 허탈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실수? 자네가 이 시점에서 말실수 따위를 했을 리가 없지. 이걸로 문답을 끝내고 여지를 아예 남기려 하지 않은 것 아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군.”
“혈려서기를 보여준 시점에서, 소유권을 확실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어느 쪽의 권한이 위에 있는지 확인할 생각도 있었을 테고.”
“…….”
저 마법사가 고작 명령어 입력을 실수해 거래를 끝낼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처음 명령을 적어넣을 때부터 루시포스의 지식을 이용해 어디까지 명령어가 먹히는지를 알아낼 생각이었겠지.
그 결과 루시포스는 혈려서기의 집필자가 포혈공이며, 프로젝트 관계자들이 그와 계약했다는 사실까지 뱉어내고 말았다.
레녹은 거기까지 확인한 뒤 설정한 명령어로 루시포스의 질문을 거부, 이른 시점에서 문답을 강제로 끝내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서로 더 캐내봤자, 딱히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겐가.”
서기장의 노쇠한 눈동자가 번뜩였다.
“이미 자네는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군. 그렇지?”
“글쎄…… 다만 의존할 생각이 없다는 건 틀리지 않다.”
레녹은 루시포스의 말에도 딱히 긍정이나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팔짱을 낀 채, 강하게 다가오는 노인의 시선을 정면에서 받아냈을 뿐.
“혈려서기의 능력은 꽤 유용해 보이지만, 그 한계 역시 분명하니까.”
“뭐……?”
“기록장치이자, 검색의 도구이기 때문에 결국 단면적인 정보만을 골라 보여줄 수밖에 없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진실을 호도하기도 한다.”
그렇게 말한 레녹이 천천히 루시포스를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아무런 마력도 사용하지 않고, 그 어깨에 손을 올린 것만으로 서기장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녹은 노인의 어깨를 짚고 그의 귓가에 조용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이곳에서 만난 프로젝트 관계자. 애초에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었겠지?”
“……!!!”
“접선 목적 자체가 프로젝트 관계자의 피살 때문이라 말했지만, 그것만으론 다른 접선자가 이곳에 같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
떨리는 루시포스의 눈을 바라보며 레녹이 말했다.
“6번 구역의 접선 자체가 살해당한 관계자의 시체를 넘겨받기 위한 일정이었던 것으로 보이는군.”
혈려서기 자이블이 전해주었던 6번 구역에서 프로젝트 관계자들끼리의 접선.
하지만 그 정보는 접선한 관계자들이 생존한 상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레녹의 존재를 인지하고도 루시포스 혼자 모습을 드러냈던 이유.
접선의 목적 자체가 관계자의 피살에 대해 논의를 나누기 위해서였음에도, 다른 관계자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
애초에 이곳에서 만났던 또 다른 접선자가, 이미 살해당한 관계자 본인이기에 성립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정확하게 조건을 걸어 검색하지 않는다면 흘려넘기기 쉬운 오류.
하지만 그건 자이블이 진짜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검색장치에 가까운 존재이기에 벌어진 일이겠지.
레녹은 대답하지 못하는 루시포스를 두고 물었다.
“살해당한 프로젝트 관계자의 시체. 여기에 있지?”
* * *
6번 구역 내부에서도 꽤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자료실.
연원이 오래된 문서들을 보관하는 탓에, 엄격하게 관리되는 지하 냉동 자료보관실의 뒤쪽에 숨겨진 방.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 프로젝트 관계자들끼리 서로 긴밀한 유대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더군.”
서기장의 뒤를 따라 걷던 레녹이 말했다.
“서로 적대하거나, 오히려 증오를 불태우고 있는 경우도 상당했다. 당신 역시 살해당한 관계자와 깊은 사이는 아니겠지.”
“…….”
“그런데도 관계자의 시체를 회수하기 위해 직접 나선 이유가 뭐지?”
“자네의 말대로 프로젝트는 완전히 끝났네. 이제는 서로 같은 곳에 서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
루시포스가 힘없이 대답했다.
“관계자들끼리 죽이고 적대하는 경우도 상당해.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의 시신을 수습한 이유는…….”
끼익……!!
문을 열어젖힌 루시포스가 중얼거렸다.
“그가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지.”
“…….”
비좁은 밀실 한복판에 자리한 묵색의 관.
관 아래 안치되어 있는 것은 평범한 인간의 시신이 아니었다.
겨우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뿐, 썩어가는 살가죽과 곳곳에 드러난 뼛조각이 기괴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엉망진창으로 난도질당한 듯한 시체의 모습.
하지만 레녹은 그 시신의 외견에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상태를 살폈다.
“부패한 살가죽과 바스러지는 골격…… 인상적인 특징이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군.”
직접 손으로 건드리는 대신, 마안을 살짝 뜨고 조용히 그 모습을 응시하던 레녹이 말했다.
“정강이에 부목을 대고, 쇄골 아래로 솜을 채워 넣었어.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하고, 평범하게 보이려 노력한 증거. 외형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것으로 보이는데.”
레녹이 시신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시체에 가까운 형상. 그럼에도 지성을 지니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생명종.
루시포스가 이 자의 사망 자체를 특기사항으로 정의하고 시신을 회수했던 이유.
레녹의 기억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울이군. 그렇지?”
서기장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레녹이 물었다.
“사령계나 군령계 술사의 최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생자의 영육을 탐하는 괴물이 되지.”
“…….”
판데모니엄의 중간결산 당시, 레녹은 위성도시 바이루츠에서 그곳을 맴돌던 구울들을 상대해본 적이 있다.
성령계열 최상급 유물인 대천사의 연민을 사용해 비교적 쉽게 처리하고 나오기는 했지만,
그 이질적인 기운과 두 눈에 가득 어려 있던 굶주림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바.
하지만 설마 고문서들을 보관하는 6번 구역의 밀실에서 구울의 시체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구울의 시체를 보며 레녹이 중얼거렸다.
“영기가 가득한 지역에 묻힌 시체에 혼이 깃들어 형성이 된다고도 들었지만, 프로젝트의 관계자라면 그럴 가능성은 낮을 테고…….”
레녹이 시선을 돌렸다.
“죽지 않아야 할 구울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을 회수하기로 결정한 건가?”
“……그렇네.”
루시포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멀더는 관계자들 중 누구보다도 죽지 않았어야 할 자였으니까. 그 중요성을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지. 때문에 특례를 인정받을 수 있었네.”
“……그리멀더?”
혈려서기 자이블이 카이세의 시신을 숨겨둔 장소를 설명할 때 했던 메시지.
[포혈공(怖血公)의 협조 아래 위치를 선정했고, 그리멀더의 자문을 구해 보관 방식을 결정했죠.]시신을 보관하는 방식을 결정하기 위해 자문을 구했던 당사자, 그리멀더가 바로 이 구울이란 말인가.
레녹의 말에 오히려 루시포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멀더에 대해 알고 있군. 그를 만나본 적이 있나?”
“카이세의 시신을 보관할 방식에 대해 조언을 주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
“다만 구울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군. 설마 카이세의 시신 역시 이런 방식으로…….”
표정을 찌푸린 레녹이 루시포스에게 묻다가, 그의 반응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레녹의 말을 듣자마자 루시포스의 얼굴이 마치 시체처럼 창백하게 굳은 채,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
그것이 목숨을 위협하는 속박이 발동하기 직전의 전조라는 사실을 레녹 역시 직감했다.
지금 이 대화만으로 금제가 발동해 서기장을 옭아매기 직전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카이세의 죽음에 대한 질문들이, 프로젝트의 비사를 관통하는 주제이기 때문이겠지.
“……음.”
고민하던 레녹이 이내 한숨을 내쉬며 루시포스의 어깨를 짚었다.
마력을 회전시켜 서기장의 체내에 흘려 넣자, 뻣뻣해졌던 노인의 몸이 천천히 풀렸다.
“헉……!! 쿨럭!!”
그대로 비틀거리며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서기장의 모습.
레녹이 팔짱을 낀 채로 루시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경계를 억지로 자극해서 근육을 이완시켰으니, 제대로 서 있기 어려울 거다.”
“……!!”
“금제에 직접 손을 댔다가는 좋은 꼴을 보기 어려울 테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그리멀더에 대해 더 말해봐라.”
하지만 레녹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이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카이세의 시신을 어떤 식으로 보관하기로 결정했는지. 그 과정에 그리멀더의 자문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레녹은 이 정보를 혈려서기 자이블에 검색해서 손에 넣었다.
하지만 루시포스가 이 사실에 대해 자각하는 것만으로 금제에 걸릴 정도라면, 어째서 혈려서기는 이 사실을 레녹에게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일까.
‘혈려서기는 수십 년 전에 자신이 소멸했다, 다시 만들어졌다고 말했었지.’
한번 소멸했다 재창조된 과정이, 금제의 발동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면.
레녹에게 이 정보가 전해진 것이, 사실 레녹이 아니라 다른 승천자를 위한 정보공유였다면.
집필자인 포혈공이 금제를 피해 승천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기 위해 혈려서기를 다시 만들었다면 어떠할까.
“…….”
흥미로운 가설이지만 당장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리멀더는 우리 중 누구보다 죽지 않았어야 할 자였지만, 또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하기도 했네.”
힘없이 벽에 기댄 채, 지팡이를 붙은 루시포스가 말했다.
“그래서 사령술을 익혀, 스스로 구울이 되는 업을 받아들였지. 그런 그가 이렇게 살해당했다는 건…….”
구울은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괴물.
육신의 죽음을 이미 지나쳐, 영혼만이 살아 있는 존재를 죽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리멀더의 몸이 아니라, 영혼 자체가 소멸당했다는 말이군.”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일세. 원한다면 마음껏 그의 시신을 보다 가게나.”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선 루시포스가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렸다.
혈려서기에 대한 권한에서 밀렸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로, 그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리멀더가 어떻게 살해당했는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 내 소관이 아닐세.”
“당신이 서기장의 직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그래…… 그때도 그랬지.”
루시포스가 힘없이 웃었다.
“내가 할 일은 지켜보고,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이었으니까.”
“…….”
서기장은 그 말을 끝으로 비틀거리며 먼저 밀실을 떠나 버렸다.
프로젝트의 기록을 회수해 보존해두는 것이 그에게 남은 임무이기에, 이곳에 두었다는 것일까.
그리멀더의 시신을 오래된 고문서들을 보관하는 6번 구역에 보관해 둔다는 그 사고방식은 일견 섬뜩하게 느껴졌지만,
바로 그것이 프로젝트에 연루된 관계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질감임을 레녹은 알고 있었다.
“구울의 죽음이라…….”
이 대륙에서 육신만을 남겨둔 채, 영만을 깔끔하게 건드려 소멸시킬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레녹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품 안에서 외알안경을 꺼내 한쪽 눈 위에 얹었다.
밀라가 반쯤 뇌물 삼아 선물해 준, 마력의 투사율을 다르게 비춰볼 수 있는 아티팩트.
그를 통해 그리멀더의 시신을 다시 보자, 그의 목덜미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문양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동전만 한 작은 크기지만, 그 안에 그려진 문양의 정교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울부짖는 유령의 파도가, 수십겹씩 압축되어 몰아치는 듯한 아름다운 곡선.
문양 아래 존재하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고대문자의 형상.
레녹은 곧바로 혈려서기를 들고 그 안에 그 문자를 그대로 베껴 적어넣었다.
[해석본 기록이 1건 존재합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루시포스와의 거래를 이른 시점에 끊어버려, 아직 한 번의 여유가 남았다.
다시 말하자면 혈려서기를 통해 단서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당분간 이것이 마지막.
하지만 고작 그 한 번의 검색만으로 충분했다.
피로 물든 문자가 페이지 위로 떠오른 순간, 레녹은 그리멀더를 죽인 이들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대의를 농락한 죄인에게 벌을 내렸으니, 그 최후를 속세에 내걸어 모두가 볼 수 있게 하리라.]“군령도시…….”
이 세상의 모든 영과 저주를 그러모은다는 군령도시 요르타.
누군가 그곳에서 이미 실패한 프로젝트의 관계자를 살해하고, 그 영혼을 빼앗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