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36
약먹는 천재마법사 736화
저공비행(4)
손가락을 움직이자, 거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지면을 두들긴다.
퉁!!
그 가벼운 손짓만으로 레녹이 서 있는 땅이 울리는 듯한 묵직한 기척.
손목을 따라 돌리자 거인의 손이 그 자리에서 꺾이고, 팔 근육에 힘을 주자 제 손을 다리삼아 일어섰다.
쿠웅!!
“으, 으으……!!”
공포에 질린 듯한 죄수들을 무시하고 레녹이 고민에 잠겼다.
“이딴 흉물이 왜 이런 지하감옥에 숨겨져 있는 거지?”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애초에 이런 물건이 감옥에 있는 것 자체가…….”
무언가 특정한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마련된 수단이 아닐까.
어쩌면 이 주변에 그 용도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감지를 꼼꼼하게 한번 더 돌려봤지만, 당장 별다른 이상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여기서 죽치고 있다가는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겠군.”
짜증스레 중얼거린 레녹이 손을 움직이자, 거인의 팔이 그를 따라 손바닥을 활짝 폈다.
그대로 팔을 한 번 휘두르자, 거인의 팔뚝이 제자리에서 격렬하게 회전.
콰아아앙!!
그대로 기사의 시체와 철창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쓸어 수로 저편에 던져버렸다.
“으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는 죄수들과 숨이 끊어진 기사의 시체가 빠른 속도로 물살을 타고 사라진다.
순식간에 거인의 팔 한짝을 제외한 다른 모든 흔적을 청소해버린 레녹이, 마력사 연결을 끊고 발길을 돌렸다.
거인의 팔을 여기 놓고 간다고 잠깐 사이에 사라질 리는 없으니, 일단 본래 목적부터 신경을 써야 했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마력을 담아 간단한 마킹을 박아넣은 레녹이 지상으로 연결되는 통로 쪽으로 걸었다.
“6왕자가 주시자를 만나러 간다 그랬던가.”
거인의 성채에 찾아온 두 세력이 만나는 자리라면, 질리언 역시 그 자리에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
레녹은 통로를 빠져나가 곧바로 성채 메인 홀 너머으로 진입했다.
수백 명을 수용가능한 메인 홀과 복잡한 성채 사방으로 이어지는 넓은 복도.
성 안으로 들어오자 마력의 압박이 강해지고, 실력있는 초인들이 여럿 보인다.
개인장비를 착용한 채로 아무렇지 않게 성내를 돌아다니거나, 제 할 일에 집중하며 대화를 나누는 이들.
하지만 레녹은 그걸 알면서도 바깥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사악!!
로비 위로 걸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레녹의 신형이 희미하게 흩어져 사라진다.
그림자 로브 위로 불가시 마법을 씌우고 소리와 기척을 차단하자 흔적도 남지 않는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지나친 레녹이 곧바로 고성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복도마다 수십 개의 문이 달려있던 다른 층과는 달리, 최상층에는 단 세 개의 문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세 갈래 문 앞에는 중갑을 입은 기사들이 한 명씩 서 있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알현실만 확인하면 충분하겠지.’
성의 주인이 업무를 보기 위해 주로 손님을 맞이하는 알현실. 저곳에 질리언이 있는지 확인하면 행동에 나설 수 있다.
문제는 저 기사들의 감각이나 마력의 압박이 생각 이상이라, 그림자 로브와 불가시 마법만으로는 완전히 숨을 수 없다는 사실.
그렇다고 다른 계통의 마법을 사용했다가는 지켜보는 아그네타에게 빅터의 정체를 짐작할 여지를 주겠지.
차라리 여기서는 중갑기사 셋을 동시에 제압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 같았다.
레녹이 고민에 빠진 사이, 아그네타 역시 그 이유를 짐작한 듯했다.
[도와줄게.]촤악!!
허공에서 뻗어 나온 얇은 마력사 한 가닥이 빠르게 복도 바닥 아래를 파고들었다. 레녹조차 바로 앞에서 확인한 게 아니라면 놓쳤을 법한 희미한 기척.
순식간에 복도를 가로지른 마력사가 알현실 문 아래로 조용히 스며든다.
[자. 받아.]아그네타가 모습을 감춘 채로 마력사 반대쪽 끝자락을 레녹에게 내밀었다.
레녹이 그것을 손으로 잡은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멈칫거렸다.
내시경 카메라로 반대편을 내다보는 것처럼, 마력사가 침투한 방 안의 풍경이 비춰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
“이건…… 시야공유 쪽은 아니군. 마력사를 통한 감각의 편향인가?”
방 안의 풍경이 비춰 보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색감이 없고 노이즈가 일렁이며 움직이는 듯하다.
광각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시야를 확보하는 듯한 느낌.
아그네타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마력사에 잡히는 진동을 감지하고, 방 안에서 나오는 것만 걸러서 시각화하는 거야.]“잡히는 진동이 너무 난잡하고 무분별할텐데. 그걸 마력사 한 가닥만으로 일일이 걸러낼 수 있다고?”
[우와, 진짜 바로 알아듣는구나?]아그네타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다른 조작술사들한테는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듣던데. 역시 네가 특별한 게 맞는 것 같아.]“…….”
[확실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하다 보면 대충 어떤 정보를 걸러내야 할지 감이 오더라고. 요령을 알려줄 테니까 직접 해볼래?]작전보다 조작술식을 알려주는 일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이는 아그네타의 모습.
레녹 역시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아그네타가 말한 방식을 따라 마력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마력사를 통해 인지한 진동을 걸러내는 일. 필터링을 거친 진동을 시각화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은 아니다.
눈을 감은 채로 아그네타가 알려준 요령을 따라 반복하던 레녹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됐다. 이런 느낌이군.”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방 안의 풍경.
아그네타의 능력을 빌리는 것보다, 레녹이 직접 손을 대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
요령을 깨우치는 과정이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감을 잡고 나면 재현률은 비교할 수 없이 레녹이 더 높은 것이다.
[좋아, 아주 좋아. 뽑아낸 결괏값 자체는 나보다 훨씬 정교하잖아.]아그네타 역시 그것을 깨닫고 신이 난 것처럼 레녹의 주변을 마구 돌아다니면서 말했다.
[이 섬세한 조율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단 말이야.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술식인데,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줘.]“헛소리. 가치를 몰라주는 게 아니다.”
레녹이 코웃음을 쳤다.
“어떤 느낌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조작술식의 묘리는 생명체의 감각이나 본능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으니까.”
다른 술사나 초인들이 조작술식의 가능성이나 효용성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원리나 요령만 알고 있다면, 어떤 물리법칙이나 원하는 형상도 간접적으로 구현이 가능한 특질계 술식.
세상의 모든 술식을 분류하고도 그 특이성을 담지 못해 번외로 분류되는 술식이니, 그 가능성이 얼마나 무궁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이야기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흉내를 내는 것조차도 공상의 영역.
“마력사라는 기준을 잡고도 이 모양인데, 다른 이들이 그 조율감을 이해할 수 있겠나?”
무엇을 어떻게, 누가 어디서 조작하느냐를 매번 설정해 주어야 하는 특질계 술식.
똑같은 결과를 내려 해도 장소와 시간, 환경과 컨디션에 따라 그 과정이 천차만별로 뒤바뀐다.
조작술식을 사용하는 술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배움이나 교본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과정을 재편해가며 결과를 조율해가는 천부적인 감각.
지금까지 깨달은 요령이나 습관을 한순간에 내다 버리고 새롭게 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조작술식을 사용하는 술사가 그렇게 희귀하고, 또 특별한 대접을 받곤 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태생에 좀 더 감사하는 게 좋겠군. 그 재능이나 감각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엑.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아그네타가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시끄럽군.”
궁시렁대는 아그네타를 무시하고, 레녹이 마력사 끝에 귀를 기울였다.
손님을 응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접견실 안에, 세 사람이 앉아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팔짱을 낀 채로 문에 기대 서 있는 남자와 의자에 앉은 여자.
그리고 두 사람의 맞은 편에 몸을 기댄, 온몸에 천을 휘감은 6왕자.
[질리언 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저희끼리 먼저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군요.]왕자의 담담한 말에 여성이 곧바로 대답했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주시자의 신병을 내줄 생각이 없습니다. 주문연맹의 요구에는 유감을 표합니다.] [저 역시 계속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그 답변에는 오류가 있습니다.]왕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연맹에 소속되었던 모든 술사들은 사후 전원 그 시신을 연맹에게 양도해야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그 말에, 문에 기대 서 있던 남자가 발끈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건 좀 웃기는 말이군, 아저씨. 렌스가 죽지 않았는데 왜 그 녀석을 받아가겠다 지껄이는 건데?]주문연맹. 렌스.
레녹은 이 두 가지 키워드를 듣자마자 상황을 이해했다.
‘주문연맹에서 질리언을 찾아온 모양이군. 청의 눈과 거래를 할 생각인가.’
저주술사 렌스. 항하사미궁에서 레녹과 함께했던 주시자이자, 주문연맹을 탈퇴해 청의 눈에 들어온 술사였다.
렌스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도, 그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주문연맹에서 사람을 보냈단 말인가.
왕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머지않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이 자식이 진짜…….]남자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으르렁거렸다.
[너희 대장이 시킨 일이냐?] [그럴리가요. 당신은 연맹에 대해 잘 모르는군요.]왕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애초에 연맹의 일에…… 됐습니다.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왕자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좋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그가 미련없이 방을 나서려던 그 순간,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여성이 말했다.
[조만간 휴전 협정이 풀린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 [이리 급하게 움직이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형편이 그리 좋지는 못하신 모양입니다.]교단과 연맹의 전쟁을 대놓고 암시하는 발언. 천천히 돌아선 왕자가 대답했다.
[모른다면 말을 아끼는 것이 현명한 일일 텐데요.] [죽지 않은 사람의 시신을 양도받으려 찾아오신 건 괜찮다는 말인가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성 역시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문 앞을 막고 선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오, 보내드려. 렌스가 살아 있는 한, 그는 질리언 님의 손님이어야 할 테니까.]피오라 불린 남자가 말없이 문에서 비켜서자, 왕자가 문을 벌컥 열고 걸어나왔다.
그제서야 레녹은 복도 저편에서 진짜 왕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온몸에 붉은 천을 두르고 있기는 하지만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인상.
불쾌한 듯 찌푸린 표정과는 달리,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압박감은 상당하다.
스스로를 주문연맹의 사절단이라 언급한 만큼, 그 역시 상당한 경지에 다다른 고위 술사일 터.
그가 복도를 내리 걷는 사이, 등 뒤로 유령처럼 경호원들이 나타나 뒤를 따랐다.
얼굴을 보이지 않고 기척조차 희미한 형체. 아마 저들이 바로 주문연맹의 술사들이겠지.
복도 벽에 기댄채로 조용히 그들을 응시하던 레녹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마법사가 의외로 많지 않군. 오히려 다른 쪽이…….’
주력과 영력은 물론이고, 레녹조차 처음 느껴보는 알 수 없는 힘을 다루는 술사도 두어 명 정도 섞여 있을 정도.
오히려 사절단 일행 중 비율로만 따지자면 마법사의 숫자는 고작 둘 정도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주문과 술사들을 그러모은다고 하더니, 그 범주 역시 마력에 국한되지는 않은 것인가.
스스로의 힘을 대놓고 과시하는 것 자체가, 전원이 현장에서 작전수행이 가능한 전투인원이라는 증거.
마법사들 중 워메이지가 섞여 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희귀한 동력을 다루는 술사들 중 전투가 가능한 이들을 모아두었다는 건 상당히 놀랍다.
레녹이 그들의 동력흐름과 패턴을 기억해 두는 사이, 주문연맹이 사라지고 청의 눈이 뒤따라 알현실을 걸어 나왔다.
“빌어먹을, 질리언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피오, 너무 화내지 말아요. 원래 대공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눈을 감은 채 지팡이를 짚고 걷는 여성과 그런 여성의 옆에서 투덜거리며 걷고 있는 남성 주시자.
여성은 처음보는 얼굴이지만, 남성은 레녹 역시 아는 주시자였다.
주시자 피오. 레녹과 함께 귀도교단 극동지부 공략작전에 참가했던 변이술사로, 동조술사인 지오와는 쌍둥이 형제.
본인부터 위계를 완성한 7레벨의 성위능력자인만큼 그 실력은 확실하다. 이곳에는 저 여성을 경호하기 위해 따라온 것이겠지.
“마리사, 우리가 찾아온 게 아니라 질리언이 부른 거잖아. 이래놓고 주문연맹이랑 우리를 저울질하겠다니, 이게 맞는 거야?”
“여섯 번째 등대의 후보지로 제안을 건넨 건 우리 쪽이잖아요.”
클레어라 불린 눈을 감은 여성이 차분하게 말했다.
“대공은 마드레아 님과의 인연으로 인해 주시자의 이름을 받아준 것 뿐, 그동안은 이쪽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가 협력할 의사를 비쳤다면 한 번쯤은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클레어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눈을 감은 채로도 마치 주위의 풍경이 보이는 듯한 몸짓.
“이 성은 대공에게는 저주나 다름없지만, 외부인인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비경…… 이곳을 등대로 삼을 수 있다면 라피스 님의 공능에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뭐, 네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피오가 삐딱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이 성에서 일하는 놈들. 하나같이 질이 안 좋은 새끼들이야. 알고 있지?”
“…….”
“질리언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놈들을 부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생각 이상으로 뒤가 구린 놈들이 섞여 있다. 아마도 전쟁에서-”
피오가 그렇게 말하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무슨 말을 더 하겠어. 일단 다른 주시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지.”
“피오, 대공의 나이는 당신보다 훨씬 더 많아요. 앞에서는 부디 말을 조심해야…….”
서로 핀잔을 주며 사라지는 주시자들을 보자마자 레녹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로 따라갈 생각?]질리언이 알현실에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여기서 굳이 더 확인하겠다고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터.
차라리 주문연맹이나 청의 눈 둘 중 하나의 뒤를 밟아 단서를 찾는 것이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녹은 이번에도 아그네타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그 자리에서 마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주문연맹과 청의 눈이 연달아 알현실을 나서며 기사들의 감각이 흐트러진 찰나.
허공에 흐릿하게 퍼지는 기척에 마력을 섞어 흩뿌리면 그 경계심의 빈틈을 찌를 수 있다.
“질리언이 평소에 사용하는 알현실이라면, 성의 지도나 비상통로 같은 시설이 숨겨져 있겠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꺾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안에 존재하는 걸 싹 털고 나면, 좋든 싫든 반응이 오지 않겠나?”
우우웅……!!
레녹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그 육신을 거꾸로 붙잡고 허공에 꽂아 넣듯이 비틀어버린 찰나.
[점멸(點滅)]파밧!!
공간을 뛰어넘은 레녹의 신형이 순식간에 알현실 문 너머로 이동했다.
아슬아슬하게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텅 빈 알현실 안으로 진입한 레녹의 신형.
딸깍.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춘 채로, 조용히 주변의 반응을 살핀다.
숨조차 쉬지 않고 천천히 넓은 알현실 내부를 응시하던 레녹이, 천천히 한발을 앞으로 내디딘 순간.
“음?”
한참 알현실을 뒤지고 있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
레녹보다 먼저 알현실에 입성해, 마치 제 물건을 찾는 것처럼 시원스레 벽장과 장롱을 깨부수는 손짓.
그 와중에 테이블에 놓여 있던 다과를 훔쳐먹는 모습마저 무척 자연스럽다.
하지만 레녹의 시선을 끈 것은 그 경박한 행동이나 반응 따위가 아니었다.
얼굴에 새하얀 분칠을 한 그 모습이, 레녹의 기억 속에도 아주 인상 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
[…….]아그네타 역시 뭐라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문 사이, 상대방이 머쓱한 듯 뺨을 긁적였다.
볼이 미어터져라 물고 있던 다과를 퉤 뱉은 그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저기, 그…… 네가 왜 여기 있습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레녹이 가면을 고쳐 쓰며 황당한 듯이 반문했다.
“광대. 여기서 뭘 하는 거냐?”
편람의 우물에서 작전을 주도했던 미치광이이자, 위계에 장난질을 치는 강력한 환술사.
판데모니엄의 광대, 아트렌 키자드가 레녹의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