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54
약먹는 천재마법사 754화
일인극(6)
라바테논에서 사고를 친다는 1번 배당이, 별일 없을 거라는 2번 배당을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상황.
레녹을 두고 도박을 하고 있던 것도 황당하지만, 그 결과조차도 기가 차다.
게시글 아래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댓글들이 조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을 뿐.
실제로 달려가는 댓글들은 하나같이 가관이 따로 없었다.
└2번 고른 놈들은 대체 뭐지…… 그냥 눈이라는게 없나?
└누가봐도 사람 처죽이러 가는거잖아. 저 도살자 새끼가 지금까지 처리한 초인들이 몇명인줄 알아?
레녹의 성정을 당연하다는 듯 깎아내리는 댓글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라바테논까지 가서 사람을 죽일 이유가 없음. 이건 진짜 사업적인 접근으로 보는게 타당함.
└나도 이쪽에 동의한다. 마탑을 세운 시점에서 생각없이 미친 마법사는 아니야. 미쳐도 아주 영리하게 미친거지.
반대로 꽤 냉정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상식적인 의견을 남기는 댓글들.
└쓰레기들만 도축하다보니까 슬슬 다른 쪽에도 관심이 가는거지. 같은 연쇄살인범으로 십분 이해함.
└견뢰는 너같은 새끼한테 별로 이해받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요즘은 고깃덩어리도 말을 하네.
└와, 진짜 소름끼치는 답글이네……
순전히 제 취향과 논리에 의존해 돈을 건 미친놈들과 철저하게 배당을 계산하는 이들도 있다.
└배당이 이게 말이 되냐? 이건 무조건 역배지ㅋㅋㅋㅋ
└진짜 견뢰가 미친 새끼긴 하구나. 이런 말도 안되는 도박에 배당이 이따위로 걸린게 X발ㅋㅋㅋㅋ
└정배야 고마워!!
“…….”
배당과 선택지에 이야기하는 댓글보다도, 그 아래 새로 갱신되는 댓글의 숫자가 몇 배나 더 많다.
실시간으로 조회수와 트래픽을 카운트하는 딥웹의 게시물이 버벅거리고 있다.
엄청난 숫자의 회원들이 이 게시물 아래 매달려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고 있는 것.
그 모든 화제가, 레녹이 마지막에 떨어뜨렸던 낙뢰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지막에 그거 어떻게 된거냐? 이거 정배가 먹은 거 맞지?
└라바테논 대학 한복판에 벼락을 떨어뜨리다니, 대마법사는 진짜 사고방식이 다르구나.
└이미 인명피해는 없다고 기사 났어. 역배가 이김.
└지랄하지마. 기상조작을 동반하는 전격마법을 썼는데 아무도 안죽었다고? 그런 기사를 믿냐?
└누가봐도 여론조작이지…… 이걸 믿을만큼 순진한 새끼들이 아직 딥웹에 남아 있었네.
강령학부의 영체가 폭주한 것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썬더 콜링.
그것을 이번 도박에 있어서 유효한 변수로 보아야 하는지를 두고 서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애초에 이딴 쓰레기같은 선택지를 두개만 주고 도박을 연 중개자 잘못임. 참가금액 모두 환불해 줘야 한다.] +883└너 역배지?
└환불은 절대 안 됨. 왜 정배가 이겼는데 내 돈 안 줌? 돈 내놔.
└이번 도박 취소되면 중개자 ID 코드 제니의 술집에 보낼거임
└ㅋㅋㅋ
단순히 댓글을 계속 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게시글을 새로 파서 말다툼을 이어간다.
[견뢰가 마지막에 벼락을 떨군 이유 알려준다……. reason.] +3534 [근 3년간 알려진 반의 전적을 통한 행동패턴 분석(심리분석 학습만화 20회독 경험자)] +11244토론을 하고 싶은건지, 아니면 싸우고 싶은 건지, 단순히 장난을 치고 싶은 건지 모를 게시물로 가득하다.
이번 일에 대해 논의하는 게시판을 넘어 딥웹의 다른 커뮤니티들에서도 이 이야기로만 시끌벅적할 정도.
레녹은 잠시 딥웹을 더 들여다보다, 이내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끼고 스크린을 닫았다.
[마스터를 가지고 도박을 하는 게 시건방진데, 배팅 사이트를 폭파시켜 버릴까요?]다비가 레녹의 품 안에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주제를 모르는 유기체들의 지갑. 제가 이놈 하고 혼내줄게요.]“……아니, 괜찮아. 그랬다가는 괜히 일이 커지겠지.”
레녹의 악명을 믿고 멍청한 선택을 한 놈들이 돈을 잃었다는데 딱히 개입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황당하기는 했지만, 딥웹에서 일어나는 일에 굳이 손을 쓸 이유는 없겠지.
그것보다 레녹은 실시간으로 떨어져 내리는 견뢰의 이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더 떨어질 평판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실수했군.”
바닥 아래는 지하실이 있는 법.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고, 실체 없는 소문은 끝을 모르고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다.
신경 쓰지 않고 놓아두었더니, 이제 거슬리다 못해 모든 행적이 악명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을 지경.
레녹조차도 이제라도 이미지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였다.
“기왕 마탑을 세웠으니 후원 같은 방식으로 좀 이미지 개선을 노려볼까?”
[발상이 불순한데요, 마스터.]“…….”
[그리고 지금 그런 일을 하면 쓸데없는 오해만 더 쌓이지 않을까요?]“흠…….”
레녹은 고민하다가 다비의 양쪽 귀를 쭉 잡아당겼다.
“앞으로 딥웹 접속은 일주일간 금지한다.”
수상할 정도로 커뮤니티 여론과 평판을 관리하는 일에 능숙해 보이는 다비의 대답.
이 전뇌정령이 평소에 어디서 놀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은 정황과는 별개로 정령이 제시한 해결책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적당히 열기가 사그라들 때까지 놓아두고, 적당한 시점에 손을 쓰는 편이 맞겠지.
레녹은 거기까지 결론을 내리고 이번 협약으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에반과 반의 알리바이를 위해 시작한 일이기는 하지만, 라바테논과 협약 자체는 양쪽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크다.”
레녹의 마탑이 이렇게 화제가 되고, 그토록 세간의 주목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
그것은 이 도시에 마법사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만이 아니다.
같은 마탑을 통해서만 유통이 가능한 양산 아티팩트를 비롯한 마력내장품.
불법으로 취급되었던 마탑제 아이템 시장을 취급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 때문.
“마법대학이 여러 연구기관과 제휴를 맺고 있는 이상, 굳이 여러 기관과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아이템을 유통 가능하겠지.”
제니의 인맥을 이용하면, 마탑의 권한으로 수입해 온 아이템을 다양한 루트로 판매하고 시장을 확장하는 것 역시 가능해질 터.
그리고 라바테논 마법대학과의 제휴는 그에 필요한 인력과 권한을 보충하는데 좋은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타티아나를 비롯해 마탑 운영에 경험이 있는 마법사나 프리랜서들 역시 해당 안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정도.
“문제는 일처리 자체는 결국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점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마탑이 라바테논에게 권한을 쥐여주고, 필요한 인력을 수급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내막을 따져보면 양쪽 모두 레녹이 에반과 반의 신분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사실과 여파가, 에반이 재직하고 있는 라바테논 마법대학까지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 * *
“따라서 여러분이 기본적으로 지망하게 될 연구기관의 마력노심 통제 방식은 최근 들어 소모를 감수하고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칠판 위에 원격 스크린펜으로 한참 설명을 이어나가던 레녹이, 이내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원소학부 강의동.
에반 바일런의 신분으로, 바일라 교수를 도와 종종 진행하곤 하는 특강.
매번 그렇듯이 수백 명의 학부생들이 빈틈없이 자리한 이 거대한 강의실 가장 앞쪽.
학부생들보다 확연히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에 다른 사람들이 여럿 앉아 흥미로운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막 회사에서 출장을 나온 것같은 정장이나, 학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차림.
당장이라도 무도회에 참석할 법한 드레스나, TPO에 어울리지 않은 갑주를 입은 기사도 있다.
레녹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바라보고 물었다.
“죄송하지만 언제까지 강의실에 앉아 있을 생각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어머.”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그야 물론 교수님이 오늘 진행하시는 강의가 끝날 때까지 여기 있을 예정인데요. 왜 그러시죠?”
“다른 학생들이 강의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레녹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실제로 강의실에 앉은 학부생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가장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힐끗거리느라 바쁘다.
단순히 그들의 인상착의나 외견이 독특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내뿜는 기척이 신경 쓰이기 때문.
그리고 그들이 굳이 이렇게 강의실에 앉아 에반에게 자신의 기척을 보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따로 약속을 잡아 연구실을 방문하시지요.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아, 그건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네요.”
여성이 부드럽게 웃으며 천천히 부채를 접었다.
“하지만 저희는 본교에 정식으로 문의해 청강 기회를 잡고, 정당한 권한을 얻어 여기에 앉아 있는 거예요.”
“…….”
싸늘한 침묵. 하지만 여성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저희로서는 오늘 교수님께 얼굴을 비추려고 온 거니까요. 순순히 협조해 드리죠.”
“이게 저를 보러 왔다는 사람의 태도입니까?”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표정을 찌푸린 순간, 기다렸다는 듯 어깨 위에 올라탄 다비가 힘껏 마력을 내뿜었다.
파지직……!!
전격계열 공용마법을 레녹 대신 받아 사용하는 다비의 전투능력은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가볍게 압살할 정도.
그런 정령의 출력을 확인한 이들의 표정에 순간 놀란 기색이 어렸지만, 의외로 그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호라, 그게 교수님께서 사역하신다던 정령의 모습이군요. 생각보다 훨씬 귀여운걸요?”
오히려 흥미로운 시선으로 어깨 위에 올라탄 다비를 자세히 살피기만 했을 뿐.
여성의 주위에 선 이들 역시 긴장한 기색은 없이, 정령을 유심히 관찰하듯 바라보기만 한다.
“하지만 저희가 오늘 교수님을 뵈러 온 건, 교수님께서 그간 세운 업적이나 공 때문이 아니예요.”
“무슨 뜻이죠?”
“예전에 입회를 약조하셨지만, 저희로서도 교수님께서 어떤 사람인지 한 번쯤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웃는 얼굴로 다비를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여성이 말했다.
“교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협업이 가능한지는 저희에게 있어 생각보다 무척 중요한 요소랍니다.”
“……입회 말입니까?”
레녹이 무심코 반문하다, 곧바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조교수 에반 바일런의 신분으로 입회를 약속했던 유일한 조직이 하나 존재했었기 때문.
“중앙의회 직속 기술자문 위원회. 기억하시죠?”
여성이 그런 레녹의 반응을 보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교수님께서 마탑과 공식적으로 제휴를 맺은 직후, 상원에서 최종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이제부터 에반 바일런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모든 연구와 사업은, 발칸 시정부 중앙의회의 전폭적인 지지와 투자를 받게 될 거예요.”
침묵에 잠긴 강의실을 둘러보며 여성이 말했다.
“원래는 강의가 끝난 뒤에 차분히 말씀을 드릴 생각이었지만, 공사다망하신 분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죠?”
“…….”
“추후 좋은 기회를 잡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일전에 첫 번째 논문을 제출하며 가입 제안을 받았던 중앙의회 직속 기술자문위원회.
라바테논 마법대학 학장, 사이올러스 가르테아논 역시 입회에 있는 조직이자.
현시점에서 발칸의 모든 마도공학 관련 기술에 대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거머쥔 기술자 집단이다.
에반의 신분으로 중앙의회 상원에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실적을 증명하고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수단.
당시 중앙의회에 접근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예비해 두었던 자문위원회가, 이제 와서 뒤늦게 에반을 찾아왔던 것.
“가장 중요한 일은 끝냈으니, 추가적으로 공지할 사항이 있다면 그때는 사이올러스를 통해 말씀을 전달하지요.”
그 말과 함께 일말의 주저도 없이 여성이 걸음을 돌렸다.
정말 말 그대로 이 사실을 전달하는 것만으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듯한 태도.
강의실을 나서는 여성을 바라보던 레녹이 펜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
“통보를 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런 방식을 선택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
“아니면 자문위원회의 특별함을 굳이 제 앞에서 과시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뇨, 꼭 그렇다기보다는…….”
여성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의 반중력 논문이, 모두에게 이득을 가져다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
“세계를 바꿀 만한 신기술과 변혁의 이면에는, 반드시 피해자가 있기 마련이죠.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랍니다.”
조용해진 강의실을 돌아보며 씩 웃은 여성이 천천히 걸음을 돌려세웠다.
“아이들 앞에서 할 이야기는, 역시 아니죠? 오늘은 역시 얼굴만 비친 걸로 마무리하죠. 이건 제 배려예요.”
철컥!!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여성의 모습.
레녹은 그런 여성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저었다.
중앙의회 직속 기술자문위원회.
아마 위원회에 소속된 연구자나 학자들도 나름대로 전문분야와 높은 직책을 가진 저명한 이들일 터.
그것을 생각하면 위원회 중에서 에반의 논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레녹이 발표한 기술과 이론이 가져다주는 혜택과 반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역시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찾아 와 통보를 하면서까지 할 만한 말은 아니다.
레녹은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남아 있던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로 걸음을 돌려세웠다.
“아, 교수님. 오셨군요.”
복도 주변에서 수십 명의 교직원들이 끙끙대며 무언가를 옮기고 있는 것이 보인다.
포장지에 쌓인 박스와 같은 물건들을 힘겹게 카트에 실어다 운반하고 있다.
“외부에서 보낸 택배가 쌓여서, 이제 연구동 내부에 보관해 두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은 교직원이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남는 창고나, 쓰지 않는 강의동에 보관해 두고 있었는데 이제 그럴 공간도 부족해졌어요.”
“그렇군요.”
“그, 혹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따로 보관 방식을 생각해 두신 것이 있는지 여쭐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보내오는 선물이나 카탈로그를 보관해 왔지만, 이 넓은 라바테논 학관 내부에서도 쏟아지는 소포들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졌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학관 아무 데나 쓰레기처럼 던져둘 수는 없으니, 행정처로서도 처리하기 난감하겠지.
레녹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중앙도서관 지하에, 쓰지 않는 서재와 비밀공간이 있습니다. 일단 그쪽으로 보내오는 소포를 전부 옮기는 걸로 하죠.”
“예? 중앙도서관에 그런 공간이 있단 말입니까?”
“학장님과 같이 일하다가 몇 번 드나든 적이 있거든요.”
“……그, 그렇군요.”
실상은 괴신궁에 납치당한 학장을 구해오는 사이 알게 된 곳이지만, 어쨌든 이런 핑계를 대두면 추궁당할 일은 없다.
학장 역시 도서관 지하 공터를 레녹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정도는 협약이라는 명분을 보아 감안해 주겠지.
레녹이 간단하게 위치를 그려주자, 직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소포를 다시 운반하기 시작했다.
“우리 교수님은 그림을 꽤 난해하게 그리시는군.”
“사실 그냥 못그리는 게 아닌가…….”
“어허, 조용히 하게.”
“…….”
레녹은 애써 못 들은 척 잠겨 있던 연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연구실에 산처럼 쌓여 있는 온갖 종류의 공문과 편지들.
편지함에 수북하게 꽂혀 있는 온갖 문서와 편지들은 잔뜩 구겨져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연구실 책상 위에 세 개로 늘어난 컴퓨터는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지금까지 쏟아지는 메일과 연락을 정리하고 응답하고 있었다.
컴퓨터 세대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열기에, 환절기에 가까워 선선해진 연구실의 온도가 올라가는 착각이 들 정도.
소파에 기대 앉은 레녹이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군…….”
마탑과 대학 양측 사업의 주도권을 레녹이 쥔 것은 좋지만, 그만큼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구체적인 과정은 제니와 타티아나에게 일임한다고 해도, 결정 자체는 레녹이 직접해야 하기 때문.
지금까지 사업에 손을 대본 적이 없던 레녹으로서는 무척 고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중앙의회에서 레녹에게 마탑을 맡긴 것이, 쏟아지는 격무로 허튼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 아니었나 의심이 될 지경.
다비가 그런 레녹의 머리 위에 올라타, 다섯 갈래 꼬리로 부드럽게 이마를 쓸었다.
[일주일 정도면 협력 사업체 카탈로그를 효율적으로 선별하는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만 더 힘내보죠!]“그래.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열심히 데이터를 뽑아내고 있는 거였지…….”
멍하니 얼굴을 쓸어대는 꼬리를 바라보던 레녹이 한 손으로 다비의 꼬리를 움켜쥐었다.
[헷.]“생각해 보니 요즘은 꼬리에 대해 별다른 소식이 없잖아. 또 새로운 꼬리를 몰래 숨겨둔 건 아니겠지?”
괴신궁 사태 이후로 다섯 번째 꼬리를 늘리며 위계와 전뇌공능을 대폭 끌어올린 뒤로 시간이 꽤 흘렀다.
그 뒤로 다비 역시 쉴 새 없이 본신의 능력을 사용해 온 만큼, 지금쯤 전조가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터.
하지만 다비는 그런 레녹의 말에 불만이라도 있는 듯이 툴툴거렸다.
[저는 마스터처럼 아, 지금쯤 성장해야지~ 하고 불쑥 강해지는 이상한 유기체가 아니라구요.]“……그래. 평소에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말이겠다?”
[마스터는 정령의 성장과 수련시간을 보장하라!]마구 뒹굴면서 항의하는 다비의 앞발을 잡고 키 크는 체조를 시켜주는 사이,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제니의 이름이 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레녹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지?”
[반, 손님이 찾아왔어.]당분간 그런 연락은 거절해두라 말을 했었지만, 레녹은 굳이 제니에게 다시 말하지 않았다.
제니가 그걸 알면서도 레녹에게 연락을 넣었다면, 그만한 상대가 찾아왔기 때문일 테니까.
“데드라이즈? 아니면 마키나 쪽인가?”
[둘 다 아니야.]레녹이 이 시점에 그를 찾아올법한 상대를 추측하며 질문을 던진 사이, 제니가 살짝 당혹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싱클레어 마탑에서 찾아왔어. 기억해?]“……싱클레어 마탑?”
그 익숙한 마탑의 이름에 레녹이 멈칫거린 순간.
제니가 목소리를 작게 낮추고 속삭였다.
[아리스 리첼렌의 스승이라고 하는데.]“…….”
[할 말이 있대. 어떻게 할래?]침묵하던 레녹이 천천히 휴대폰을 든 채로 외투를 챙겨 들었다.
“지금 바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