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15
약먹는 천재마법사 815화
매듭(2)
레녹의 양어깨 위로 내리 찍히는 눈부신 순백의 광채.
그를 잡아먹으려던 저주의 불길이 그 빛의 경계선을 따라 물러서며,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었다.
어깨를 타고 내려선 신녀의 빛이, 팔을 타고 흘러내리며 양 손목 아래까지 닿았다.
손목 아래서 느릿하게 회전하던 광채가 이내 레녹의 오른쪽 손목 아래서 작은 문신처럼 변했다.
키이잉……!!
피부를 타고 작게 소용돌이치며 스티그마가 되어 각인되려는 듯한 움직임.
그것이 신녀가 스스로의 공능을, 단 한 사람을 위해 양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기적임을 깨닫는다.
무간과 하나가 되어 소멸하려던 군주의 영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교단의 주구. 영혼의 힘조차 다해 위태로운 주제에 유지를 남기려 하는가?”
[…….]“너희를 돌보지 않는 미친 신을 섬기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성심을 다할 수 있는 거지?”
신녀는 그 말에 반응하는 대신, 레녹의 앞으로 다가와 그 시선을 마주 보았다.
마치 군주가 던지는 모욕과 비방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처럼.
교리와 신앙을 모욕하고, 깎아내리며 부정한다 해도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는다.
부정과 거부에도 신녀가 동요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선택한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터.
신녀가 가진 신앙이 그런 힘이라는 것을, 레녹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쳐 보이시는군요.]“……그쪽만 할까. 피차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피로 말라붙은 입술을 겨우 떼어, 레녹이 대꾸했다.
신녀는 레녹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
[그분과 같은 천외의 재능으로, 세계의 저편을 내다보며, 과거와 미래를 뛰어넘은 대답을 그리지요. 하지만 그럼에도…….]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는 일 없이, 신녀의 내면 안에만 남는다.
엷은 미소와 함께 레녹을 돌아보는 그 모습.
이미 신녀는 레녹을 지켜보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낸 것일까.
레녹이 그것을 되묻는 대신, 사라질 것만 같은 흐릿한 영체를 응시하는 사이.
신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귀하께서는 저희들의 교리가 틀렸다고 말하셨었지요.]그녀는 천천히 레녹의 너머 굳게 닫힌 무간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서 인간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것…… 불어오는 미풍에 금세 자취를 감추는 온기에 불과하지요.]“…….”
[이 성소에서 관측되는 저주가 촛불의 형태를 한 것 역시…… 한때는 요르타와 교단 모두가 인간을 그리 정의하였기 때문일 겁니다.]“이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나?”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레녹은 그녀의 문답에 어울려주었다.
레녹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것처럼,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와의 언령으로 죽음을 선고받고, 영혼의 형태로 레녹과 함께한 여정.
하지만 길지 않았던 그 동반도 이것으로 끝이다.
불안정한 영혼의 상태로 무리하게 끌어다 쓴 신녀의 공능.
승천자를 상대로 교단의 기적을 펼치며 남아있는 존재감마저 모두 사라졌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신녀는, 레녹을 상대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겨우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말없이 레녹을 온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신녀가 말했다.
[귀하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되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올바르지 못한 이 불합리한 세계에서…… 저희는 바라고 있습니다.]신녀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양손을 내밀어, 레녹의 손을 붙잡았다.
[스스로가 비록 결말 너머에 존재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혼탁한 세계를 구원해줄 누군가를.]딱딱하게 굳어버린 레녹의 손이 신녀의 양손 위로 포개지는 그 순간.
레녹의 몸이 신녀와 같은 새하얀 영기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제게 주어진 역할이겠지요.]파아아앗!!!
단지 몸을 뒤덮고 빛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신녀가 레녹의 손을 부여잡고 알 수 없는 의념을 불어넣은 그 순간.
레녹의 눈앞에서 완전히 닫혔던 균열이 다시금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쩌어억!!
눈앞에서 공간의 균열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신녀 자신의 존재감은 빠르게 흐릿해진다.
마치 신녀 자신의 존재를 대가로 하여, 공간전이의 통로를 새로이 열어젖히는 듯한 기적.
그 모습에서 익숙한 기시감을 느낀 레녹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사도술식.”
사도술식. 그 중에서도 레녹이 몇번이나 눈앞에서 목도했던 사도의 것이다.
레녹 자신이 교단원을 상대로 수도없이 겪어보았으며, 끝내는 직접 토벌하기까지 했던 10사도 암리타.
신녀 세이나 나이드리는 사도술식 암리타의 저울을 레녹에게 사용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술식의 대가로 반드시 필요한 인신공양을 자신의 존재를 바치는 것으로 완성해 가면서.
타다닥!!
레녹의 몸이 공간의 균열 너머로 이끌리듯, 그 자리에서 전이되는 것이 느껴진다.
레녹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공간 좌표의 입력값 자체가 뒤바뀌며, 무간의 성소를 벗어나는 듯한 기묘한 감각.
신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쥐고 있던 레녹의 손을 천천히 놓아버렸다.
[우리에게 만약 다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만약 교단의 답이 아니어야 한다면.]파아아아앗!!
균열이 크기를 벌리며 레녹의 머리 위에서 회전할 때마다, 신녀의 영체가 조금씩 사라져 소멸한다.
계시의 공능을 사용해가면서도 영체만은 남겨두었던 그녀의 존재가, 사도술식의 반동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 영계 안에서 영혼의 다리를 놓아 레녹을 무간까지 인도했던 것처럼.
그녀는 다시 자신의 존재를 대가로 걸고 레녹을 다시 무간에서 내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역할이라는 듯이.
[그건, 분명 귀하와 같은 존재로부터 시작되는 기적이겠지요.]“……너.”
스스로를 희생시켜 레녹을 무간 너머로 인도하면서도, 그 표정은 마지막까지 평온했다.
레녹이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신녀가 레녹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저는 이제 그렇다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소멸하는 그녀의 영체가 산산히 흩어져 그 표정마저 지워지던 그 순간.
레녹의 몸을 집어삼킨 균열이 무너지는 무간의 성소를 넘어, 영계 전체를 관통해 솟구쳤다.
“이런…… 설마 교단의 신녀가 자기희생을……!!”
그제야 신녀가 자신을 희생해 레녹을 탈출시켰음을 깨달은 군주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무너지는 무간의 공간 너머로 그 비명마저 묻혀 사라질 뿐.
콰아아아아!!!!
신녀의 영체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과 동시에 사도술식 암리타의 저울이 발동.
대규모 공간 전이의 공능을 사용해 레녹의 공간좌표를 무간 바깥으로 날려 보낸다.
쐐애액!!
눈앞이 흔들리고, 귀청이 폭발하며, 감각이 곤두선다 느끼던 찰나.
거짓말처럼 모든 오감이 사라지며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두두두두!!
머리와 발아래로 솟구치는 영혼의 파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 무너진 영혼의 다리와 지켜보는 인도자의 영을 지나.
영혼과 물질이 공존하는 상태를 몇번이고 오가며 감각이 널을 뛰듯 깜박이고.
촤아아악!!!
쿵!!
레녹의 신형이 거대한 탑의 복도 층계 아래로 미끄러지듯 떨어져 나뒹굴었다.
“……!!!”
목이 말라붙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오감이 불타는 듯한 기이한 고통 속에서 되찾은 시야.
그 너머로 보이는 복도의 정경은, 레녹의 기억에도 이미 존재하는 것이었다.
군령도시 요르타. 그 중심부에 위치한 만귀야행의 위령탑.
유령용의 요새에서 영계를 지나, 무간을 넘어. 마침내 레녹은 다시 위령탑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하아, 하아……!!”
뻣뻣하게 굳은 가슴을 두들기며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쉰다.
억지로 호흡을 유지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어버릴 것 같지만, 아직 의식을 놓아서는 안 된다.
위령탑 내부는 진혼정의 영령들이 지배하는 권역.
무간 안에서 있던 일을 전해 들었다면, 틀림없이 레녹을 놓아두지 않을 테지.
어느쪽이든 당장 이 컨디션으로는 최악에 가까운 상황이다.
“쿨럭!!”
복도 층계 사이로 비틀거리듯 일어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몸을 이끌고 움직였다.
마력감지를 통해 위령탑 사방에서 무수한 영체들이 탑 사방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부터 그들을 피해 탑 아래로 내려가 도시를 떠나려면, 아마 상당한 노고가 필요할 터.
하지만 레녹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신녀의 마지막 순간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째서 신녀는 마지막 순간 자신을 희생해서 레녹을 탈출시킨 것일까.
이미 영혼만이 남은 자신의 존재가 마지막으로 의미를 다할 곳을 찾은 걸까.
그녀는 마지막까지 교단을 향한 비난과 부정을 인정하면서도, 굳이 레녹을 설득하려 들지도 않았다.
다만 교단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레녹의 존재조차 의미가 있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희생해서 레녹을 탈출시켰을 뿐.
“쿨럭, 쿨럭……!!”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필사적으로 기침소리를 숨긴다.
손가락 사이로 끈적하게 떨어져내리는 핏물과, 마력사로 한참을 묶어서 피가 통하지 않아 보랏빛으로 변한 팔뚝.
고통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 손으로 힘겹게 위령탑의 층계를 타고, 아래쪽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힌 그 순간.
콰직!!
쿠우우웅!!
레녹은 자신의 신형이 그대로 어딘가에 치여 벽 뒤로 처박히는 것을 깨달았다.
“……!!”
콰아아앙!!
위령탑의 벽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며, 탑의 층계와 공간을 모조리 재편한다.
사방에서 무너지고 다시 조립되는 위령탑의 공간 아래로 레녹의 몸이 떨어져 내리고.
쿵!!
레녹은 어느새, 자신이 거대한 아홉 개의 비석의 앞에 쓰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위령탑 가장 깊숙한 비처에 숨겨진 위대한 영령들.
한때 만귀야행을 지도하고 이끌었으며, 이제는 영락해 그 육신마저 잃어버린 진혼정의 존재들.
비석 너머에서 거칠게 일렁이는 영혼의 불길.
그들의 전성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어찌나 거센지, 성대를 통해 울리지 않는 그 음색이 덜덜 떨리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
[만귀야행이 실패한 뒤로, 네놈만큼이나 이 도시를 욕보인 죄인은 존재하지 않았거늘.]“…….”
[대답하라, 복마전의 술자여. 네 영혼을 불태워서도 속죄할 수 없는 이 죄업을, 어찌 책임질 것인지!!!]쿵!!
그 말과 동시에, 진혼정의 새카만 비석 너머로 온몸이 묶인 무언가가 힘없이 끌려 나왔다.
앳되어 보이는 소년의 영체. 자신만만하던 표정은 힘을 잃고, 그 몸에 흐르던 존재감도 당장 소멸할 것처럼 옅어져 있다.
영체로 이루어진 온몸에는 부적으로 만들어진 말뚝 수십 개가 꽂혀 낭자한 모습.
위령탑 지하 1층계를 지키던 대심판관 오리스.
레녹을 유령용의 요새에 데려다주고, 진혼정을 독대해 시간을 끌겠다던 심판관이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흐릿한 눈길을 들어, 쓰러진 채로 레녹을 돌아본 오리스가 히죽 웃었다.
“……인간.”
“…….”
“맡은 일은, 그럭저럭 잘 해낸…… 모양이구나.”
레녹이 피식 웃었다.
“아직 살아있었군.”
“흐흐, 귀신한테 살아있냐고 안부를 묻는…… 멍청이는…… 오랜만이군.”
오리스가 그렇게 말하며 벌렁 드러누웠다.
“하…… 하지만 계획은 실패다. 너와 나 모두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테니까.”
“…….”
“승천자의 유해를 상대로 승리하는 위업을 이루고, 맨몸으로 무간을 탈출하는 기적을 누렸음에도, 여기서 죽는 거지.”
오리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피차 안타까운 일이군.”
그 말에 맞춰, 진혼정의 영령들이 위치한 탑의 천장이 활짝 열리며, 수천 마리 군령들이 쏟아져 내렸다……
위령탑의 공간을 개편해 만들어진 진혼정의 비처.
공동 전역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법한 헤아릴 수 없는 군령들이, 위령탑 사방에서 깨어나 레녹을 둘러싸고 침을 뚝뚝 흘린다.
[아아, 생자의 육신이다……!!] [무간을 무너뜨린 죄인의 것인가…….] [탑에 가두기엔 지나치게 업이 깊은 영혼이로구나…….]모든 힘을 다하고 죽어가는 생자의 육체.
저항조차 할 수 없을만큼 연약하게 짓밟힌 영혼.
지금이라면 저 한없이 이질적이고 독특한 술자의 영과 육을 남김없이 뜯어먹고,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잠시나마 달랠 수 있을 터.
진혼정의 허락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레녹을 산채로 뜯어먹고도 남을 법한 흉험한 기세.
[판데모니엄의 조작술사. 요르타를 관리하는 아홉 영령의 권한으로 네놈의 처우를 결정하겠다.]그런 레녹의 모습을 진혼정의 영령들이 내려보며 엄중한 판결을 내렸다.
영령들이 진노해서 거센 영압을 분출하고, 그 힘만으로 레녹의 어깨를 짓눌러 상처를 벌리고 피를 떨구었다.
하지만 레녹은 영령의 압박에 짓눌리며 꿈틀대는 와중에도, 로브 사이에 손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책임을 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영계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던 무간과는 달리, 이곳은 레녹에게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현실.
레녹이 마법사로 살아오며 손에 넣은 힘과 아티팩트 모두가 제대로 작동한다.
그림자 로브 안에서 대천사의 연민을 움켜쥔 레녹이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린 순간,
성령계열 마력이 무지갯빛의 보석을 타고 사방으로 번뜩이며 군령의 무리에 쏟아져 내렸다.
키이이잉!!
[아아아악!!]레녹을 둘러싸고 거리를 좁히던 군령들이 삽시간에 형태를 잃고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위령탑에 복속되어 원령이 되어버린 영혼들이 성령계열 마력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정화되어 소멸해 버리는 것.
당황한 군령들이 사방에서 물러나는 틈을 타, 레녹이 곧바로 마력사를 대천사의 연민에 걸고 잡아당겼다.
신녀 세이나 나이드리에 레녹에게 양도한 제사장의 공능.
손바닥에 새겨진 스티그마에 마력을 불어넣고 대천사의 연민을 향해 거칠게 내리찍은 그 순간.
[……아아.]아티팩트 안에 잠들어 있던 구세계의 대천사가 몸을 피고 깨어나듯 움직였다.
[불쾌하고도 그리운 부름이군.]보석의 양옆으로 회백색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카슈인이 눈을 뜨고.
[죽어서도 그리워하던 그분의 공능이구나.]“……!!!”
[성역 선포]실패한 신을 섬기는 대천사의 성역이 이 자리에 펼쳐졌다.